가게에서 일하고 밤에 책가방과 노트북을 챙겨서

서울행 아침 비행기를 타면서 시험공부를 하던

그때의 내 자신이 참으로 멋있게 느껴졌다.

청바지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비굴하지 않고 자신에 차 있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자양분이 되어서 그 힘든 시기들도 견뎌낼 수 있었다.

 

1982년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게 됐다.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자립하기 위해 성실 그 이상의 노력으로 살았다. 이민 온지 25년 만에 내가 다니던 사찰에서 진행하는 여행단을 따라 고국을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도착하니 그냥 좋았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정말 다 잊고 살았었구나. 그리고 나에게도 조국이 있었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한국을 찾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에서 만난 친구 숙례가 필라델피아로 나를 찾아왔다. 그때 친구는 방송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에게 방송대를 권유했다. 시간이 없어서 밥도 대충 먹고 다니는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그것도 한국에 있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방송대? 친구는 공부에 대한 고생스런운 면은 숨기고, 달콤한 말만 건네주면서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라고 떠밀었다. 자기도 마감 하루 전날 친구에게 끌려서 등록했는데, 너무 잘한 것 같다고 학교 자랑까지 했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길도 멀고(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 가서 다시 인천까지 비행기로만 13시간!), 일 년에 두 번씩 기말시험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자영업을 하느라 늘 바쁜 일정, 공부하기에는 좀 늦은(?) 나이 58세, 마지막으로 학교를 졸업한지 40년, 컴맹에다가 한국말도 많이 잊어버린 상태였다. 친구의 권유에도 방송대에 대한 정보도 없고, 가까이 사는 선배도 없다는 이유로 망설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들은 우리 한국인들 내면에 깔려있는 학구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여기에 주지 스님의 강력한 권유가 보태져 고생길(입학)을 택하게 만들었다.


2016년 3월, 대학 공부를 처음으로 하게 된 설렘은 잠깐이었다. 첫 과제물 제출과 1학기 시험에 마음이 달라지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친구와 주지 스님이 주신 용기, 학교를 꼭 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원격교육 시스템, 문제가 있을 때 국제전화를 하면 친절한 한국말로 해결할 수 있었던 점이 큰 도움이 됐다.


또한 말로만 들었던 조국의 발전을 실감하면서 직접적인 혜택을 받으니 나도 모르게 자부심이 생겼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조국이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다. 과제물을 받으면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제출하고 난 뒤의 뿌듯함으로 어느새 다음 학기 과제물과 교재를 기다리게 됐다.


나에게 이런 실력이 있었나 하는 자신에 대한 발견과 신뢰는 용기를 북돋아줬다. 한국어로 학습하면서 한국적인 정서로 해답을 찾아 나가니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방송대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점들이었다.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못했지만, 옷가방 대신 책가방을 싸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가게 될 줄은 몰랐다. 떠나기 전날까지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 책가방과 노트북을 챙겨서 아침 비행기를 타면서 시험공부를 하던 그때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거주하고 있다. 기말시험때면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찾으면서 공부했다.내 자신이 참으로 멋있게 느껴졌다. 청바지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비굴하지 않고 자신에 차 있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자양분이 되어서 그 힘든 시기들도 견뎌낼 수 있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하다가 보니 더 좋아져서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솔직한 심정은 졸업하지 않고 계속 학생으로 남아있고 싶었다. 그리고 코로나19 때문에 졸업식(2019년 8월)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무척 억울(?)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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