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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이 유럽 전역에서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한다. 4년여 동안 600만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동시기 제국주의 일본이 주변국에 자행한 홀로코스트도 이에 못지않다. 중국 남경에서 최소 12만 명, 최대 35만 명이 학살당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타이완에서도 일제의 차별정책에 저항한 원주민에 대한 대량학살이 있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대륙 진출을 기도했기 때문에 한국인의 저항과 피해는 더 극심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 조동걸 교수는 1998년 일제 식민통치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 수를 이렇게 파악했다. ①동학군희생자 4만 명 전후, ②의병전투전사자 2만1천 명 외 민간인희생자 3만 명 전후, ③31운동 희생자 7천5백여 명, ④연해주 4월 참변 희생자 1천명 전후, ⑤간도참변 희생자 3천6백여 명, ⑥관동대진재시 ‘조선인사냥’ 희생자 5천여 명, ⑦1920년대 독립운동 희생자 1만5천여 명, ⑧1930~45년 독립운동 희생자 2만1천여 명, ⑨징용징발, 군위안부 등 전시동원 희생자 부지기수. 국내 학계, 1990년대부터 재조명 
이 중에서 연해주 4월 참변과 간도참변, 일본 관동대학살은 단기간에 특정 지역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대사건임에도 한반도 밖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간도참변은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과 최고의 독립무장투쟁으로 평가되는 청산리전투에 직결돼 있음에도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간도, 즉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에서 벌어진 일이고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관련돼 있었기에 세계사적 이념 갈등이 엄존했던 시기 동안에는 금기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유신사, 1920),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대한민국공보처, 1949), 김정주의 『조선통치사료』 2(한국사료연구소, 1970)를 통해 그 단면이 소개되다 1989년 중국과 수교되면서 박창옥, 김춘선 등 조선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1990년대 이후부터 학술논문이 본격적으로 제출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조동걸 교수 역시 1998년  「1920년 간도(경신)참변의 실상」(<역사비평>, 역사문제연구소)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간도참변이 바로 경신참변이다. 경신(庚申)은 1919년 기미년의 이듬해인 1920년에 해당한다. 사전에서 참변은 ‘뜻밖에 당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재앙이나 사고’라고 풀이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면 경신참변은 ‘1920년에 뜻밖에 당했던 끔찍하고 비참한 재앙 혹은 사고’다. 과연 ‘뜻밖에 당한’ 재앙 혹은 사고일까. 아니다. 경신참변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사전에 계획하여 진행된 명백한 홀로코스트다. 
 
주지하듯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서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에는 일찍이 국경을 넘어 정착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수십 개의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일제의 강제병합 전후 시기에는 수많은 의병들과 민족운동가들이 그곳으로 망명해갔다. 특히 북간도로 불렸던 지금의 연변 지역은 인구의 80%가 조선인이어서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19년 한반도에서 거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들 지역에서는 반일무장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 반일부대들은 국내로 진격해 일제의 식민통치는 물론 대륙침략정책에도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더 극악해진 일제 만행
일제는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웠다. “조선독립운동의 책원지는 만주(즉 서북간도), 시베리아, 상해에 있으며, 그 근거지를 복멸하지 않으면 조선 내의 무사태평을 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서북간도 지역은 책원지(策源地:  전방부대에 보급, 정비, 위생 따위의 병참 지원을 행하는 후방 기지) 중 책원지, 근거지 중 근거지로 지목됐다. 두 달 뒤 10월 마적단이 일으켰던 훈춘사건을 빌미로 이 지역에 대한 ‘대토벌’ 작전이 감행됐다.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과 관동군(만주 주둔 일본군)에서 동원된 2만여 명의 대병력이 동서남북으로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청산리전투는 이 토벌전에서 큰 승리를 거뒀던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김좌진 등 조선인 반일부대의 항전을 말한다. 
 
이후 일본군대의 보복은 더 극악해졌다. 반일 세력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천 명의 인명을 살상하고 수백 채의 가옥과 학교, 교회당을 불태워 온 마을을 파괴했다. 양곡도 닥치는대로 소각했다. 독립군의 주력은 모두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해 갔기 때문에 피해자는 대부분 일반 백성이었다. 얼굴 가죽을 벗기고 두 눈을 도려낸 채 처형하고, 전선을 끊은 혐의를 받은 12세 소년의 머리를 잘라서 전선에 매달았으며,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내어 쇠줄로 손과 코를 꿰어 끌고 다니다가 총살하기도 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다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죽이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총칼로 찔러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했다. 어머니와 처자들로 하여금 마을 청년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강제로 지켜보게 했고, 수십 명의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당시 <독립신문>(제92호)에 따르면 북간도 4개 현에서만 3천664명이 살해되고, 민가 3천520채, 학교 59개교, 교회당 28채가 소실됐다. 일제가 감행한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은 서북간도 다른 지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잔악했던 경신대토벌전의 궁극적 목적은 반일무장부대에 대한 초토화뿐만 아니라 이들 단체의 토대를 이루는 재만 한인사회를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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