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현대 명저 106선 해제

 중국인이 자신들의 나라를 ‘중국’이라 부르는 데 대체로 동의하기 시작한 때는 이른바 ‘3천 년 만의 대격변’으로 ‘대청국’의 굳건했던 국체와 가치관이 동요된 19세기 말이었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국’을 자국의 호칭으로 채택한 그 시기에 당시 중국인들은 오래된 중국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중국을 만드는 과제를 떠안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신중국’은 보통 1949년 중국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을 일컫는다. 하지만 새로운 중국을 향한 지향은 그보다 앞선 청제국의 몰락기, 즉 역사 속에서 ‘중국’이 관습적 국호가 된 시기에 격렬히 형성됐다. 따라서 신중국 의식의 실질적 연원은 19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신중국의 동행자, 량치차오『구유심영록(歐游心影錄)』의 저자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신중국을 향한 모색에 몰두해서 정치와 사상, 언론, 문학 등 폭넓은 영역에서 활약했다. 많은 근대 지식인이 그러했듯 과거에 응시했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신사상, 신제도로 눈을 돌렸다. 스승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황제에게 개혁을 건의한 후 변법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수구파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첫 정치경력을 마감했다. 파란만장한 정치이력 이면에 량치차오의 사상적 이력은 방대한 양의 전집인 『음빙실합집(飮室合集)』(1936)으로 집약됐다. 사실 량치차오의 집필 업적은 정치이력보다 훨씬 풍부하고 역동적이다. 사용한 필명만 30개가 넘고 전집 분량은 1천400만자에 달한다. 캉유웨이와 활동하던 초기부터 만년까지 쉴 새 없이 잡지를 발행하고 저술을 펴냈기 때문이다. 집필 영역은 정치, 역사, 철학, 문학, 학술 등 다채로운 분야에 걸쳐 있었다.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한 그의 행보는 항상 독서, 사유와 함께 했다.당시 량치차오가 중점적으로 고민한 주제는 국가였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국가를 정치의 기본 단위로 당연하듯 여기지만 당시 량치차오에게는 중국인들이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세계가 국가단위로 세력을 형성하고 그 국가들이 중국을 위협하는데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 또는 막연한 천하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량치차오는 중국인이 국가의식을 갖춘 새로운 구성원으로 거듭나 ‘신민’이 되기를 희망했다. 또한 개혁운동이 성공하고 강국으로 거듭난 새로운 중국을 ‘신중국’이라 불렀다. 저서 『신민설』, 『신중국미래기』 등은 바로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중국의 신민’은 량치차오가 즐겨 쓰던 필명이기도 하다. 그때 유럽의 신사상은 중국에서 신민을 탄생시키는 자원이었고 유럽이 이룩한 문명은 신중국이 배워야 할 모범이었다. 량치차오는 단 6개월 만에 일본글을 익힌 후 일본에 유입된 유럽 지식들을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에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이를 통해 량치차오는 중국 내외에서 ‘언론계의 총아’,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명성을 떨쳤다.량치차오는 유럽 견문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19년 유럽의 현장과 중국의 상황과 입장을 연관지어 논평한다.이 점에서『구유심영록』은 『미구회람실기』,『서양사정』, 『서유견문』등 학습의 성격이 강한 19세기 서양 견문 서적과 시기와 성격 면에서 차별성을 갖는다.‘파리강화회의’ 참석 당시의 기억들『구유심영록』은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베이징의 <신보(晨報)>와 상하이의 <시사신보(時事新報)>에 동시에 연재됐다. 책에는 1918년 10월 상하이를 떠난 후 1919년 2월에 유럽에 도착한 후 런던, 파리, 벨기에 등지를 둘러보았을 때의 행적과 감상을 기록했다. 이때 량치차오의 유럽행은 중국정부와의 인연, 언론인으로서의 명성에 의해 성사된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그를 고문이자 기자 신분으로 중국대표단에 합류시켰다. 그는 회의 참석 이외의 비공식 활동과 네트워킹을 담당했다. 『구유심영록』은 ‘파리강화회의 중국대표단원의 유럽 방문(歐游) 인상(心影) 기록(錄)’인 셈이다. 당시 량치차오와 동행한 이들은 유럽, 일본 등지에 유학 경험이 있는 군사, 외교, 과학, 경제학, 철학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유럽 방문기간 동안 중국의 외교적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이 배우고 입신의 발판으로 삼은 유럽의 현황을 목격했다. 이때 량치차오는 유럽견문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19년 유럽의 현장과 중국의 상황과 입장을 연관지어 논평한다. 이 점에서 『구유심영록』은 『미구회람실기』, 『서양사정』, 『서유견문』 등 학습의 성격이 강한 19세기 서양 견문 서적과 시기와 성격 면에서 차별성을 갖는다.책은 전체 8장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은 성격에 따라 일반적인 감상, 여정에 대한 기록, 유럽전쟁 경과, 파리강화화의와 관련 기구(규약) 및 규약(국제노동규약)에 대한 소개와 평론으로 나눌 수 있다. 1919년 유럽에 대한 량치차오의 종합적인 감상은 1장에 집약돼 있다. 1장은 ‘유럽방문 중의 일반적 관찰과 감상’이라는 제목 아래 상편(대전 전후의 유럽)과 하편(중국인의 자각)으로 나뉘어 있다. 따라서 책을 펼치면 방문 중에 량치차오가 목격한 유럽의 사회, 경제, 문화적 상황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 집필 당시 귀국 후 연재를 시작하면서 핵심적 메시지를 전반부에 집약해서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1장에 기록된 유럽의 모습은 근대 ‘문명’의 발원지이자 배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19세기와 달라져 있다. 전쟁이 막 끝난 상황의 피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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