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손수 지은 옷을 편안하게 걸친 노작가는 자연이라는 수도원에서 잠시 외출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신비로운 비밀을 캐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노련하게 말머리를 돌린다. 자신의 작품은 생명을 객관화한 것일 뿐, 자신의 삶을 내보인 것이 결코 아니라고 단호하게 자른다. 진행자는 인간과 사회를 묻지만 그녀의 대답은 자연과 생명이다. 무엇이 그녀를 인간에게서 자연으로 돌아서게 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자연에 복속하는 수도사로 내몰았을까?  작가로서의 그녀는 일제 강점기 평사리 사람들과 함께 했지만, 사람으로서의 그녀는 별별 생명들과 온전히 교감했다. 어미 잃은 꾀꼬리 한 마리, 올챙이 한 마리에 연민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녀 자신 또한 하나의 생명체였다.   통영의 외로운 소녀아름다운 도시 경남 통영은 아버지 없이 자란 소녀에게 자연의 위대함을 가르쳤다.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해변에 나가 도도한 파도를 바라보다 문득 두려움에 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소녀는 신(神)이 이 무서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어려서 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다시 결혼한 아버지와,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며 현실감각으로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둔 소녀. 하지만 소녀는 수평선을 타고 올라 작은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작고 예쁜 새였다.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역사와 문학을 좋아했고, 책이라면 중독됐고 밤마다 시(詩)를 일기처럼 썼다. 이 소녀는 한국문학사에 불멸의 존재로 남았다. 바로 작가 박경리(朴景利, 1926~2008. 본명은 박금이. 본관은 밀양)이다. 통영은 충무(忠武)라는 이름도 가졌듯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향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8월이면 한산대첩 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일본과 가까이 있었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을 많이 당한 곳이기도 하다. 1926년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경리는 평생 일본을 용인하지 않았고, 21살까지의 경험과 기억으로 일본문화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정신대를 피해 이른 나이인 21살에 결혼해 딸과 아들을 뒀지만 5년 만에 남편을 한국전쟁으로 잃고 얼마 안 되어 다시 아들을 잃는다.  기품 있는 아름다움과 높은 자존감을 지닌 그녀에게 ‘과부’, 세상의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힘든 문이 열린 것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는 마지막 행으로 유명한 시 「옛날의 그 집」에는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라는 구절이 있다. 젊은 날 홀로 되어 감내해야 했던 야속했던 작가의 인생이 보인다. 『토지』와 대지 사이에서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1955년 단편 「계산」,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박경리는 작가의 삶을 시작한다. 50년 작가 인생의 대표작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토지』다.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 만석꾼 최참판 댁이 몰락하면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5부 20권의 방대한 대하소설로, 등장인물도 700여명에 달한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4반세기, 무려 25년이 걸렸다. 월간지 <현대문학> 연재로 시작된 이 글쓰기는 작가가 유방암 수술을 받은 직후에도 강행됐다. 소설이 격찬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그녀를 만나기 원했으나 박경리는 문을 닫아걸고 전화도 끊은 채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토지』에 파묻혔다. 작가가 지녀야 하는 자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고독, 두 가지 다 무겁고 시린 일이지만 박경리는 『토지』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고독과 자유를 감당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떠난 그녀의 곁을 지킨 건 나무와 풀들, 잔디, 농작물, 들고양이와 개와 새들, 올챙이와 개구리, 강가에서 가져온 조약돌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역사 속 인물들과 살았고 현실의 그녀는 자연과 생태 속에 있었다. 토지를 집필하는 내내 작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초반에 머물러야 했다. 글을 쓰고 고양이와 개들의 밥을 지어주고 나무를 해치는 벌레를 잡고 고추농사를 짓고 마당에 돌을 깔고 광목을 끊어다가 옷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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