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현대 명저 106선 해제

 풍부한 일상적 삶의 자락을 담고 있는 순간을 통해 거시적인 삶의 의미를 해석해내는 박완서의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라는 익명성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기억들을 안고 살아낸 개인으로 실명화된 여성의 역사를 구성한다.  일상적으로 치르는 고백성사를 위해 찾아간 성당에서 왜 조급하게 달려왔는지도 몰라하며 허둥거리고, 앞에 선 여자의 대머리를 보며 괜히 “치부를 본 듯이 참담한 기분”을 맛보는 중년 여성, 그저 매일 하는 아침 산책을 나서면서 대문을 열고 닫는 일일 뿐인데 삐걱거리는 문을 여는 행위를 두고 ‘고약한 버릇과의 타협’이라고 극적 긴장감을 느끼는 노인, 막힌 하수구를 고무 벙거지로 뚫으면서 가슴을 후벼파는 ‘아찔하면서도 까닭 모를 슬픔’을 느끼는 갓 결혼한 새댁, 아이의 도시락밥에 넣을 보리를 사기 위해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계단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승용차의 헤드라이트가 “해할 목적으로 달려드는 괴물의 눈빛 같”다고 공포감을 느끼는 고등학생 아이의 엄마. 삶의 비의(秘意)에 육박하는 소설의 힘두서없이 골라낸 몇몇 박완서(1931~2011) 소설의 극적 장면들이다. 박완서 소설은 사소한 일상사 가운데에서 불현듯 낯선 감각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자세히 묘사돼 있기에 세밀한 일상의 풍속도라 불리며, 그 일상의 자락에서 느끼는 내면의 거대한 마찰과 동요가 클로즈업되기에 치밀한 내면심리의 서사로도 평가된다. 사람들이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는 치부와도 같은 바닥의 심리와 평범한 일상사의 켯속을 모두 하나의 장면으로 모아내는 박완서 소설의 힘은 구체적 일상의 순간에서 위기의 실체를 잡아내는 통찰력과 실감 속에서 우러나온다. 이 실감이 사회적 공감으로 이어질 때, 번뜩이는 섬광처럼 순간에 포착된 위기의 실체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으로 자연스럽게 비약한다. 박완서 소설이 일상사의 순간적 포착을 통과해 삶의 비의(秘意)로 육박해가는 힘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소설은 자아의 진실과 자아 바깥의 해석이 어긋날 때 생겨나는 내면의 동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르다. 박완서 소설은 바로 이 어긋남의 실체를 파헤쳐 진상을 찾아가는 집요함이 두드러진다. 이러저러하게 놓여져 모자이크처럼 병치되는 사건이나 마음의 정황은 옮아붙을까 봐 피하게 되는 악의나 추한 겉모습이지만, 주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기에 ‘합리적인 해명’이나 ‘자의식’과 같은 이성적 해석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한 무의식의 편린들이다. 박완서 소설은 이런 무의식적 편린들이 구체화되는 일상사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수다스러운 문체, 삽화적 형식, 산만한 서술구조 등 박완서 소설의 형식적 특성을 언급하는 평가들은 대부분 이런 구성적 특성의 다른 표현이다. 박완서는 1970년에 등단해 15편의 장편소설과 7권 분량으로 모아낸 단편소설을 비롯해 수십 편의 콩트와 에세이를 발표하며 2011년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꾸준히 현역으로 활동한 작가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공인받은 작가이며,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작가다. 작가의 원체험에 해당하는 한국전쟁기의 체험은 박완서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더불어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는 여성들을 다룬 작품들, 자전적인 경험을 소재로 한 자전소설, 1960~1970년대의 개발 독재와 그로 인해 물신화된 사회 풍속이나 세태를 다룬 작품 등과 더불어 1990년대 이후에는 나이가 들어가는 작가의 분신인 듯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노년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폭넓은 주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속물주의 비판도1960~1970년대 한국의 경제 구조가 재편되는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중산층 가족 구성의 변화다. 이른바 핵가족이라는 가족 모델이 이 시절에 모범적인 것으로 제시되면서 도시 중산층 여성들은 가정 안으로 유폐된다. 도덕적 규범과 아내의 도리를 내면화한 산업역군의 내조자들은 출세주의에 휘둘려 속물화되는 남편과 중동으로 돈 벌러 떠난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자기를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 목적지는 바로 고급 아파트와 남편의 출세와 아들의 학벌이다. 박완서는 이렇게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속물주의와 물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성들의 소외를 다룬 일상생활 서사는 이런 문제의식을 집약한 최후의 생활세계다. 박완서 소설들은 같으면서도 다른 듯한 일상적 세계를 소재로 전쟁 이후의 한국사회를 그 내면적 정황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폭넓고 다양한 일상의 세계를 ‘냉전’의 적대적 대결상태로 지속되는 ‘분단’의 시선으로 엮어내고 배치한다. 거대한 힘으로서의 ‘분단’은 마치 운명인 듯이 개개인의 사소한 일상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박완서 문학은 분단과 냉전의 한국사회를 정밀하게 탐색하는 기록지의 의미를 구성할 정도로 생활세계의 정치성을 헤아린다. 『엄마의 말뚝 1·2·3』(연작소설, 1980년·1981년·1991년 작)은 박완서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작가의 문학세계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서 ‘엄마(억척 모성)’를 구성한 작품이다. ‘엄마’는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에서부터 창작기간 내내 소설의 주인공으로, 혹은 숨겨진 관념적 존재로서 작품의 근간이 되는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도 연작소설의 형식으로 발표된 『엄마의 말뚝』 은 박완서의 가족사와 관련되기도 하지만, 한국의 근대사를 아우르는 한 여성, 엄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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