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우리말에서 읽는 한국인의 심층

 말이 달라지면 마음도 달라져사람들은 어떤 말을 배우고 쓰느냐에 따라서, 머리를 굴리는 것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말을 배우고 쓰는 사람과 영국말을 배우고 쓰는 사람과 중국말을 배우고 쓰는 사람은 말이 달라서 머리를 굴리는 것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는 것이 달라짐에 따라서, 마음을 쓰는 것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어떤 말을 배우고 쓰더라도, 머리를 굴리는 것과 마음을 쓰는 것이 같거나 비슷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이런 말과 저런 말이 서로 다른 바탕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배우고 쓰는 것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한국말은 상대에 따라서 말을 높이고 낮추는 말이 매우 많아서, 어떤 사람이 한국말을 배우고 쓰게 되면, 무엇이든 위아래로 차려서 바라보는 버릇을 갖기 쉽다. 그러나 영국말은 상대에 따라서 말을 높이고 낮추는 말이 매우 적어서, 어떤 사람이 영국말을 배우고 쓰게 되면, 무엇이든 나란히 차려서 바라보는 버릇을 갖기 쉽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말을 배우고 쓰는 사람과 영국말을 배우고 쓰는 사람은 머리를 굴리는 것과 마음을 쓰는 것에서 다름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매우 가볍게 생각해왔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배우고 쓰느냐에 따라서, 머리를 굴리는 것과 마음을 쓰는 것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살펴보려면, 사람들의 몸과 머리와 마음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봐야 한다. 몸은 내가 온갖 것과 함께 하는 일을 통해서, 살아가는 일을 이뤄가는 나의 기틀을 말한다. 내가 나로서 나고 살고 죽는 것은 온갖 것과 함께 하는 나의 기틀인 몸이 나고 살고 죽는 것을 말한다. 머리는 나의 몸이 살아가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갖가지 것을 부리는 나의 재주를 말한다. 나는 머리가 돌아가는 일을 바탕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서, 몸이 살아가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나간다.   마음은 내가 몸과 머리를 써서 만들어나가는 나의 세계를 말한다. 나는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굴려서, 나의 안에 마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나는 마음의 세계를 갖게 됨으로써, 마음의 밖에 있는 사물의 세계를 마주하여,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몸과 머리와 마음을 아우르는 하나의 임자를 ‘나’라고 말한다. ‘나’는 기틀이 되는 몸의 임자이면서, 재주를 부리는 머리의 임자이면서, 나름으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마음의 임자이다.    사람들은 ‘넋’이 나가거나 ‘넋’을 잃으면,생각이 온갖 것으로 뻗어나가서, 어떤 것을 어떠한 것으로 녀겨서 알아보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마음의 세계를 풀어내는 말들한국 사람은 나라는 임자가 몸을 바탕으로 머리를 굴려서 마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것’, ‘늧’, ‘느끼다’, ‘얼’, ‘얼이다’, ‘말’, ‘넋’, ‘녘’, ‘녀기다’, ‘알’, ‘알다’와 같은 말로써 풀어왔다.한국말에서 ‘것’은 임자가 마주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말이다. 임자는 ‘어떤 것’을 마주하는 일을 함으로써, 내가 ‘어떤 것’을 ‘어떠한 것’으로 느끼거나 녀겨서 알아보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임자가 마주하는 ‘것’에서 냄새, 맛깔, 빛깔, 소리, 모양과 같은 ‘늧’이 일어난다. ‘늧’은 ‘것’이 임자에게 느낌이 일어나게 만드는 감각 자질이다. 사람들이 ‘느닷없이’라고 말할 때, ‘느닷’은 ‘늧앗’으로서 ‘늧’의 ‘씨앗’을 말한다. ‘늧’의 ‘씨앗’이 흐릿한 상태에서 갑자기 어떤 것을 마주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느닷없이’라고 말한다. ‘것’에서 비롯하는 ‘늧’이 몸으로 들어오면, 머리에 ‘어떤 것’에 대한 ‘어떠한 얼이’가 얼이게 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얼이’를 마음에 비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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