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호모 스투디엔스 4. 박상희 육아정책연구소장

코로나19는 우리 삶의 중심인 가족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류 역사에서 가족이란 인간이 서로를 의탁하여 살아가는 최소한의 공동체로 오랫동안 기능해왔습니다. 수렵시대 이후 정착하고 농경사회로 이동하면서 함께 일하고 나누며 집적한 것을 물려주는 가족공동체가 자리 잡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태어난 곳에서 살아가고 함께 일상을 살아가다가 성인이 돼서는 또 각자의 세대로 나눠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단위는 서로를 의탁하고 살아가는 인류의 본질적 속성인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다변화하면서 가족의 기능은 변화돼왔지요. 양육?교육?생산 등을 함께 하던 일과에서 일터와 교육 공간 등으로 흩어졌다가 휴식하기 위해 저녁에 모이는 곳이 가정이 된 거죠. 그리하여 가족이란 우리가 공적 존재로서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준비하고 쉬는 공간에 함께 하는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고 봅니다.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도 오히려 일터와 학교에서도 동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족의 의미를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까요?
기존에 공적 기관에 해줬던 것을 가족이 다 떠안아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상황에서 부모들이 깨달은 것 중 하나가 ‘그동안 학교가 우리 아이들을 나 대신 키워주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래서 가장 최종적인 위기가 닥치고 가장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가족밖엔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남긴 거죠. 함께 마주한 가정 안에서 서로에 대한 발견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의 재발견’인 셈이지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면서요. 집에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면서 아이들과 유튜브 요리를 따라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부모들도 있고, 아이들이 통제가 안 돼서 싸움을 하느라 지옥이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학교를 안 가고 비대면 수업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오히려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분, 오히려 집에 있게 돼 학교 폭력의 문제에서 잠시 피할 수 있었다는 분들까지 비대면 상황은 여러 장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상치 못한 감염병 상황으로 인한 상황들이었지만, 이로 인해 함께 있을 때 서로에게 온전한 지지가 되는 가족의 기능을 회복하는 시간이 됐다면 참 다행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다시 그 모습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면 좋겠고요.

 

건강한 가족이라도 갈등이 없는 건 아니라는 현실을, 재택근무를 하게 된 부모가 평일에도, 또 휴일의 대부분을 집안에서 보내게 되면서 맞닥뜨리고 있는데요. 함께 있으면 응당 좋아야 할 가정이라는 공간이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응당 좋아야 하는 가정의 모습이 현실에서 얼마나 존재할까요? 그런 가족이란 성원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 이뤄지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며칠 전 직원 교육장에서 강사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쓰도록 했던 사례를 들어볼게요. 어떤 분들은 가족을 ‘존재의 이유’, ‘사랑’ 등으로 답했더라고요. 아마 많은 분들이 그렇게 답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이것도 강박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강사가 가족은 ‘배낭’, ‘전쟁터’라는 답변도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소장님은 가족을 뭐라고 쓰셨어요?
저는 좀 생각해보다가 ‘나무가 심어진 화분’과 같다고 썼습니다. 하나의 공간에서 여러 가지가 모여 함께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모습이 가정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았지요. 물을 주고 적당한 빛과 환경으로 시들거나 죽지 않도록 세심히 보살펴야 하는 것, 푸르른 잎과 열매를 꽃피워 위안을 주는 것 등이 가족을 은유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어떤 화분을 키웠을까 생각하다가 아지, 우리는 어떤 화분일까?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했더니, 그냥 여름 한 곳에 투박한 화분 위에, 잎이 넓은 잎사귀가 다린 나무가 있는 게 연상되더라고요. 썩은 나무 연상한 건 아니구나 해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저한테는 항상 눈길을 뗄 수 없고, 늘 주의를 기울여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가족이죠. 햇볕이 너무 적어 결핍되지 않도록, 물이 너무 많아 익사하지 않도록, 각자 가지 하나하나로 존재하면서 독립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나무를 이루는 것이 화분, 가정이라는 겁니다.

 

#일본 가족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에 따르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위기 상황을 지나면서 가족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자’로서의 가족과 ‘언제 어디서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도움을 주는 존재’로서의 가족으로 그 의미와 기능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는 새삼 가족의 건강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줬습니다. 아이 보육, 교육은 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내면 해결될 거라 굳게 믿었던 허상이 깨진 거죠. 코로나19로 드러난 가정보육의 허점, 어떻게 보시는지요?
가정보육의 허점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전 오히려 우리 사회가 아이 키우는 것에 있어서 어깨에 힘을 많이 주는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내가 잘해야 아이가 잘 큰다는 이런 부담이죠. 이런 뿌리 깊은 생각이 어디서 연유했을까요? 육아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가족의 본질적인 기능을 재발견을 하게 된 것이 코로나19 이후의 우리 삶에서 중요한 문제였어요. 어떻게 하면 서로 화목한 모습으로 이 위기를 넘기고 극복해 더 새로운 모습으로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가족이나 사회, 국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모든 가족은 다 갈등이 있어요. 건강한 가정은 그 갈등을 건강하게 풀어나가는 가족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가족은 갈등을 없는 것처럼 회피해 잘 살아가는 척하거나 갈등이 더 깊어지거나 하는 가족이죠.

 

육아를 행복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이신가요?
가정보육의 허점이라기보다는 아이를 키우면서 몰랐던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걸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기대할 것이 무엇인지, 부모가 가정에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원시시대나 예전에는 먹이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었다면, 근대를 지나면서 자녀가 성장해 사회에서 한 몫의 역할을 해야 하니, 교육도 잘 해줘야죠. 그래서 육아는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가 된 건데,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상황이 초래되면서, 오롯이 그 모든 책임이 부모에게 전가됐는데요. 부모로서 못하는 부분을 다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비난하지 말고 힘도 좀 빼자고요. 좀 힘들면 어떤가요? 나중에 어떻게든 보완이 이뤄지겠죠. 현실이라는 게 100%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예전에 안 좋았던 일도 나중에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양분이 될 수도 있는 거고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줄이고, 아이들 이야기도 좀 들어주며 추억을 쌓는 시간으로 보내는 거죠. 그런 기억들이 아이들에게 정말 큰 지지가 되거든요.

 

넘어진 김에 쉬어가듯, 아이들과 추억을 쌓으란 말씀이시군요.
성인이 될수록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해요. 지금까지 살면서 좋았던 기억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러나 부모의 사랑도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조금씩 거둬들여야 할 때가 옵니다. 저는 강사 시절을 합치면 30년을 대학에 있었어요. 얼마나 많은 학생들들 상담 했겠어요. 아이들이 각양각색이지만, 두 부류로 나눠서 져요.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때 되면 어학연수 보내주고, 명품 가방을 선물 받은 아이라고 해서 행복할까요? “엄마가 지금 남자친구 만나지 말래요”, “지금 실습기관이 좋지 않다고 바꾸래요” 등등의 말을 하면서 상담에서 펑펑 울어요. 사랑 받고 자란 아이지만 건강한 성인으로 분리되지 못한 거죠. 오히려 자율성도 적고, 부모가 주는 그늘이 여전히 있어서 큰 성장을 이루기 어려울 수 있다는 거죠.

 

그럼 엄밀히 말하면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떤가요?
정확히 말하면 힘들게 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 아이들이죠.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고, 어떤 부모는 아이를 자신의 보험으로 생각하기도 해요. 성인이 돼서 학교도 자기 힘으로 다니고, 부모님 빚을 갚기도 하죠. 이런 아이들과 상담해 보면 1, 2학년 때는 많이 어두워요. 그런데, 한두 사람의 지원, 지지가 생기면 또 밝게 잘 성장하더라고요. 졸업할 때 보면 새내기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죠.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나쁜 환경이 반드시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좋은 환경이 늘 좋은 양분을 주는 것도 아니란 이야기에요. 그런 면에서 인생은 공평한 거고요. 코로나19 시국에 아이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고, 훗날 아이의 기억에 좋은 지지가 되도록 영유아 시기에는 추억을 쌓으면 좋겠습니다.

 

과한 또는 부족한 사랑을 받은 아이…, 코로나19 시대에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요?
부모들이 너무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염병 상황에서는 오롯이 모든 시간을 부모가 함께 하는 상황이 많아지지요. 이럴 때 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기초학력이 뒤처지지는 않을까, 나홀로 고립돼 육아하는 힘겨움에 더해 나는 정말 잘 하고 있나, 아이는 잘 크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함들이죠. 그런데 그 불안은 아이에게 더러는 짜증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아이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는 죄책감을 느끼는 시간도 있을 거고요.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시간을 성인이 일방적으로 그들을 안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아이를 안아보면 아이뿐 아니라 부모인 나도 따뜻해지는 충만함을 느낍니다. 부모가 자녀랑 있으면서 겪는 갈등의 주요 문제는 기실 내가 해야 하는 훈육의 정도와 기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교육기관이 그 기대와 역할을 많이 담당해주었기 때문에 가벼울 수 있었지요. 일관되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내가 선생님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내 아이와 오롯이 다시 오지 않을 어린 시절의 시간을 서로 더 많이 안아주며 보낼 시간이 많아졌다는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 먼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아이의 기억 속에 좋은 감정으로 남아,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고요. 집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아니듯, 부모님들도 선생님이 돼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하고요.

 

그래도 부모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학력이 떨어질까 걱정이 많을 거예요.
아이들이 각자 자신 삶의 에너지를 작고 인생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부모와 학교의 역할입니다. 단순히 미시적으로 학업을 놓치고 있다? 이건 중요한 지점이 아니라고 봐요. 저는 코로나19 상황에 대한 교육적 대처에 불만이 좀 있어요.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왜 인류에게 닥쳤을까? 이 부분을 아이에게 물어보고 설명해준 적이 있나요? 제대로 아이들을 교육한다면, 초등학생 정도 아이에게는 왜 우리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전 세계적인 감염병 상황을 맞게 됐는지는 설명해줬어야죠. 우리도 당연히 과학자들에게 공동의 질문을 했어야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은 몇 단계고, 확진자가 몇 명이 나왔다는 것에만 주목해요. 아이들에게 학습 결손을 이야기하기보다, 기후 변화를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학력은 우리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기관을 찾아 이사하는 부모도 많고요.
마음이 급하다고 유치원에서부터 한글, 영어를 가르치게 하고, 숫자를 배워 셈을 하도록 하면 뭐가 좋을까요? 스스로 궁금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 그것이 소위 ‘자기주도적 학습’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재미를 놓치지 않도록 부모도 협조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을 발달적으로 보면 2~3개월이 지나면 엄마를 보고 웃어요. 이걸 사회적 미소라고 하죠. 그 전의 배냇짓은 신경학적 웃음이고요. 나를 보호해주는 존재를 인식하는 익숙함 때문에 웃어주고, 존재가 나에게서 멀어지면 위험신호로 받아들여서 울죠. 영아들은 이처럼 최선을 다해서 주위의 자극을 통해 배워갑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스스로 일어나 걸음으로써 만물의 영장임을 선포하지요. 보행기에서 설 때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는 순간이에요. 신경학적으로 보면 발 끝까지 신경이 활성화되면 일어서려고 해요. 옆으로 갔다가 잡고 갔다가 자꾸 서려고 노력하다가 자기 힘으로 서는 그 순간, 아이는 웃어요. 승자의 웃음이죠. 스스로 해내는 아이에게서 그 웃음을 볼 수 있어요. 그런 즐거움을 줘야죠. 어떤 아이는 7~8개월에도 서고, 어떤 아이는 13개월이 지나서 서기도 해요. 혼자서 스스로 알아가는 즐거움, 그런 즐거움을 영유아기에 계속해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글을 아이들이 언제 스스로 읽겠어요? 유치원 가서 신발장에 실내화를 자기 이름이 써 있는 칸에 넣을 때에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게 한글로 내 이름이란 걸 스스로 알게 되는 거잖아요. 배움의 즐거움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해주면서 초등학교에 진학하게 해야 주도적인 학습이 가능합니다.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해서 공부를 한다면 걱정이 없겠죠. 부모가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아이가 입시까지의 학습을 자기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봅니다.

 

유아교육에서 사교육의 대표를 꼽자면 영어유치원을 들 수 있겠죠. 정부에서는 누리과정에 영어를 넣는 방식으로 보완하는 것 같은데요. 유아기 외국어 교육,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영어라는 도구 교육보다 시급한 것은 다문화가정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반문하고 싶어요. 최근 어린이집과 유치원 원아 구성을 보면 다문화가정 자녀를 흔히 볼 수 있잖아요. 우리 사회가 좀 더 포용적인 사회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워낙에 단일민족 신드롬이 강하다 보니, 사실 저출산 문제와 관련해서 정책으로 채택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유럽 국가들 특히 독일은 저출산 문제를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걸로 돌파구로 삼았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 분위기 전반이 그걸 거부하죠. 미국 사람들마저도 양키라고 폄하하잖아요. 타인에 대한 혐오가 너무 강한 민족이란 생각도 들어요. 문화상으로는 안 받아들이는데, 실제 엄청난 다문화가정이 있어요.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가 걱정입니다. 이른바 우리랑 피부색만 다르면 야, 다문화가정이다 이러는 문화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살아가겠어요. 게다가 역으로 다문화가정이 많은 지역에서는 한국 아이들이 왕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어느 부분이나 다 문제죠. 영어교육보다도 이런 본질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차이들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좀 더 고민을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은 마스크에서 드러나는데요, 아이들에게 교육도 필요할까요?
감염병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기후 변화를 설명해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같이 잘 살아갈 수 있을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교, 학원에서 공부를 못 하니까 엄마가 교사처럼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고, 아이도 엄마 말을 선생님 말 듣듯이 하길 바래요. 그런데 여긴 집이지 학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아이들과 갈등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이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부모 자녀 관계 핵심은 독립된 인격으로 봐주는 것. 객관적으로 봐주는 자세가 중요해요. 가수 이적의 어머니인 박혜란 교수도 자녀를 제3자처럼 보라고 조언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녀를 우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나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존재인 거죠. 나를 완전한 엄마로 만들어주는 존재니까,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 좋은 학교에 가게 하고, 그러려면 정보를 얻으려 고군분투해야 하는 거고요. 맹모삼천지교를 모성애와 사랑으로 보는 그 인식을 빨리 깨야 해요. 아이를 객관화해서 보고 스스로 자랄 수 있는 힘이 있도록 키워야죠. 아이들마다 패턴이 다 달라요. 육아서적 보기 전에 아이 눈을 늘여다 보세요.

 

육아서적 말고 아이와 눈을 맞추라고요?
형제간에도 달라요. 지금 아이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어딘가에 생각이 걸려 있는 걸 수도 있어요. 몸이 아프거나,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거나 할 수도 있는 거죠.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를 포착했다면, 육아서적을 뒤적일 것이 아니라,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어줘야죠. 아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 아이의 욕구는 무엇인지 그것을 물어보고 함께 찾아가는 부모가 되는 것이지요. 내 안에 아이의 바람직한 모습을 먼저 만들어놓고 그것에 따라 맞추려고 할 때, 아이들과 나는 잔뜩 긴장하게 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지요. 내 아이 하나에만 집중하고 그 아이의 눈을 따라가면서 아이의 뒤에서 쫒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면서 점점 가정 보육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 등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강제로 늘어나면서 더욱 아이들과 부딪히는 현실에서, 부모교육이 절실해 보입니다. 반면 우리 교육과정에는 공부하고 싶어도 마땅한, 공인된 부모교육 과정이 없다고 호소하는 젊은 부부들이 많습니다. 대책이 있을까요?
부모 역할에 대한 것도 배우자는 말이 많죠. 핵가족화가 이뤄지면서 조부모나 마을 공동체의 도움 없이 부모와 자녀들만 있기 때문에 특히 초보 부모일수록 난감할 상황이 많기도 합니다. 저는 청소년기 교육과정에 가족의 기능과 역할, 생애 발달, 영유아기 부모 역할 정도는 배웠으면 해요. 청소년기에 부모가 되는 경우는 적겠지만 장차 성인기에 이르러 더욱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는 소양 정도는 미리 배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양육수당이나 주택 혜택 등 지원을 받을 때도 부모 양육 관련 내용을 교육받는다면 더 좋을 거라고 봐요. 더 나아가서 직장인들이 받는 폭력 예방교육이나 장애인식 개선 교육 등과 같은 기본교육에도 포함하면 참 좋겠습니다. 정규 교육과정이 아니라도 요즘은 지자체나 각종 교육기관의 프로그램 중에 양육에 관한 내용을 다양한 형태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소위 부모 역할, 부모 노릇에 대해 우리가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고 살아왔는지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 역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배경이 뭔가요?
우리 문화에서 좋은 부모 역할을 생각하면 우선 ‘ 맹모삼천지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교육에 좋은 환경을 골라 3번의 이사를 하여 훌륭하게 자식을 키웠다는 이야기기죠. 자식은 부모하기 나름이라는 것 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 게 부모 역할의 전부인 걸로 한정하는 거죠. 아이의 성적이 곧 부모 성적이에요. 애들은 부모 말을 잘 들어야 하고, 그렇게 키우려면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교육특구, 학군이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오늘날의 맹모인데요. 우리 사회는 이걸 엄마의 능력으로 받아들여요.

 

맹모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존재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하는 부동산도 결국은 이면을 보면 ‘대치동’이라고 하는 교육환경과 가장 관련이 깊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 질문해 볼게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 즉 부모가 나름대로 생각한 이상적인 환경을 주는 바대로 자식들은 성장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하는데도 다른 모습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무엇인가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인가요?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부모 역할의 전부는 아니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다른 동물보다 미숙한 채로 태어납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도 1년 이상이 걸리고 말을 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시간도 걸리죠. 또 교육을 받는 것도 유일무이한 존재에요. 그런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의탁하며 온전한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서로 돌보며 지내는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근대이전까지는 부모나 마을 공동체가 학교의 역할도 했지요. 산업혁명 이후 대량 생산을 통한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진 이후 학교는 노동자를 만들어 내야 하는 최소한의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이 됐고, 기존에 부모들이 해왔던 많은 삶의 도구인 지식을 표준화된 내용으로 제공하게 됐습니다. 부모는 학교에 자신의 권위를 이양했고 학교라는 제도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계층이동의 사다리에서 신분 상승에 성공하는 지름길이 됐기 때문에 자식을 잘 뒷바라지하는 것이 부모에게 중요한 사명이 됐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에 예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한석봉 일화를 아실 것입니다.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내려온 아들에게 불을 끈 채로 글을 쓰라고 하고, 자신은 떡을 썰었죠.
게으른 아들 석봉이를 깨우쳐주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식을 올바로 이끄는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것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인의 문화로 자리해왔지요? 자식은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는 그런 자식을 깨우치기 위해 자신도 갈고 닦아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내용을 우리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내면화해오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나도 ‘부모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그런 문화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코로나19 이후에는 ‘맹모, 한석봉 어머니’ 신화가 어떻게 변했나요?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의 모습은 아이들이 공부를 하게 하고 훈육과 통제를 해주던 학교, 교사의 존재가 멀어지게 되면서 오롯이 부모의 것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현장이 됐어요. 이 지점에서 부모는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을 하는 ‘현대판 석봉이’의 모습에 매우 불편해하게 됐죠. 내 안의 ‘한석봉 어머니 모드’가 작동하게 됩니다. 전쟁터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죠. 앞서서도 말씀드렸지만, 함께 서로의 온기로 불안을 견뎌 이기며 먼 훗날 아이가 삶에서 어려운 장애물을 만났을 때 부모랑 함께 이겨냈던 어린 시절의 고난의 기억을 등대 삼아 회복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모두 함께 만들었던 요리, 모처럼 집에 있는 아버지가 나를 안고 들려주었던 이야기 그림책, 함께 만들었던 야외 조형물 등의 기억을 만들 수 있는 의외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다가도 또 와르르 넘어져 아이들과 옥신각신하겠지만 그럼에도 ‘좋은 기억’은 인생에서 참 중요하답니다. 정신건강전문가들은 이걸 ‘회복탄력성’이라고 말하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묶이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이 전환이 좀 필요하다고 봅니다.

 

코로나19로 ‘집콕’문화가 확산하면서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재택근무가 보편화하면서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늘었지만, 일과 쉼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매 끼니를 집에서 해결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스트레스도 커지고 있어요. 동일 공간 내 거주하는 가족 간 스트레스가 높아지고 있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홈트레이닝, 홈 헬스, 홈 힐링에 대한 욕구도 커지는 추세다. 또한 감염병에 대한 대응으로 가정에도 공기청정기, 살균기, 정수기 등의 사용이 일반화되는 추세다. 가족 행복을 위한 안전 보장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가 시행되면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서로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프로그램들로 아이들과 지내야 할지 궁금합니다.
프로그램이라고 칭하는 말 자체에서도 부모를 선생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녹아 있는 것 같아요. 아이를 통제하고 뭔가 결과가 나와야 하고. 내가 뭔가를 아이에게 교육적으로 해줬다는, 그래서 나는 좋은 부모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이 정도는 해야 한석봉 어머니 정도는 되는 거라는 마음이 있다는 거죠. 우리 안의 ‘한석봉 어머니 모드’를 잠깐 끄십시다. 지금은 코로나19와의 전시상황이고 엄마는 교사가 아닙니다.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모습을 내리고 릴렉스! 하자고요. 아이나 나나 이 불안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건너는, 등불 없는 시대를 견뎌야하는 동지인 것입니다.

 

프로그램이라는 말 자체에도 좋은 부모가 돼야 한다는 강박이 숨어 있었군요. 그럼 어떻게 놀아주면 좋을까요?
‘돌밥 돌밥’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음식 주문이 아니라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또 밥 차리는 시간’이라는 어머니들의 상황을 빗댄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돌밥 식사 준비를 하면서 아이랑 프로그램 하느라 안 따라와 주는 아이랑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재료를 가지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것이 코로나19 시대의 부모에겐 좋을 것 같아요.

 

요리는 아이들이 참 좋아하죠. 또 다른 걸 추천해주신다면요?
부모와 아이가 하는 소위 프로그램 중 가장 좋은 것은 ‘이야기책 읽어주기’라고 봅니다. 어지러운 집은 눈을 질끈 감고 넘기세요. 아이를 품에 안고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많이 보내시고, 혼자 아이 재우고 욕실 청소하러도 가지 마세요. 아이랑 스킨십 있는 거품목욕을 즐겁게 하고, 함께 욕실을 치워도 돼요. 잘 안치워지면 또 어떤가요? 어차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또 어질러지는 걸요. 부모 역할을 잘 해준다는 건 이야기를 잘 읽어주고 들려주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아이의 청지각 발달에 정말 좋은 영향을 미치거든요.

 

아이의 청지각 발달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인류는 아주 옛날엔 마을에 모여 우두머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고 합니다. 참 지혜로운 인간입니다. 그 옛날에 뇌과학이 없었을 때인데도 말입니다. 인간은 엄마의 뱃속에서 만들어진 태중에서도 오직 듣는 것의 힘, 청지각의 힘으로 두뇌를 발전시키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기본감각을 통해 발달시키는 뇌를 통해 만물의 영장이 된 인류에게 가장 기본적인 감각은 청각입니다. 출생해서 누워있는 것이 대부분인 신생아기에도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인간의 소리와 아닌 것, 인간의 소리 가운데 유의미한 것, 억양, 단어등을 구분하며 뇌를 발달시키거든요. 그림책읽어주기는 그렇게 발달된 청지각과 보이는 것, 시지각을 결합하는 활동입니다. 자꾸 반복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는 그림을 읽어가고 들리는 소리에 의미를 상상해가며 다음을 예측하는 매우 의미있는 사고능력을 발달시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세워지고 전개하며 결론을 맺어가는가하는 틀 말입니다. 이야기들려주기를 많이 한 아이들이 즉, 부모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은 아이들이 초등에서 학습준비도가 높았다는 연구들은 1980년대 많이 이뤄져서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연구들입니다.

 

청지각 발달이 학습 능력 향상과도 연관이 있군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얼개를 잘 짜서 의미를 잘 정리하는 능력은 초등학교에 진학하여 선생님의 이야기를 잘 듣고 정리하는 능력을 예견하지 않겠습니까? 베드타임스토리를 전통으로하는 유대인을 자주 언급합니다만 우리나라도 화롯불 옆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문화는 있었지요. 이야기의 능력은 이처럼 언어를 통해 사고를 돕는 것 이외에도 저는 삶을 잘 만들어내는 능력에도 의미있을 거라고 봅니다. 내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면서 즐기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후손들이 인생에서 가지고 살아야 할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문이지만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쥐여주는 건 역시 지양해야겠죠?
스마트폰이 문제가 뭐냐면요, 자, 청지각 이야기를 방금 했죠. 들으면서 성장해요. 아이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자기 안에서 상상을 해요. 뇌가 활성화되는 거죠. 사실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도 그림 없이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보다는 뇌 활성을 제한해요. 옛날에 화롯불 옆에 둘러 앉아서 할머니가 이야기해줄 때 아이들 각자 상상의 크기가 다 달라요. 이걸 많이 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하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학교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아이에게 이야기 들려주기, 함께 그림책 읽기,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경험은 요즘은 거의 없어졌지요? 이걸 잘 하는 게 코로나19 시대에 정말 실천해볼 부분이라고 추천드립니다.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을 쥐어주더라도 함께 하십시오.

 

아빠, 엄마에게 이야기 보따리가 많아야 하겠어요.
우린 읽는 세대였죠. 그런 경험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게다가 지금 젊은 부모들은 공부만 하고 자라서 놀이를 잘 몰라요. 주중에는 출근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니, 집에 데려와서 씻기고 재우고 다음날 출근하는 것의 연속이죠. 주말에는 놀아야 하는데, 어떻게 놀지를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 아이를 데리고 마트를 가요.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어린이집 놀이터를 가서 놀죠. 아이들은 스스로 놀던 걸 기억하니까요. 애들이 또래를 이뤄 규칙을 정하는 건 발달상으로 보면 7세 정도에 가능해요. 우리 어렸을 때는 놀이터에서 편도 갈라보고 전쟁놀이도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시간이 없어요. 스마트폰 들고 노는 건 고립놀이잖아요. 규칙 있는 게임을 단계를 높여가며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노는 게 학습이란 걸 알아야 하는데, 유아기는 특히 더 그래야 하고 그래야 뇌도 발달하거든요. 그러니 그림책이라도 함께 읽고 그 다음에 태블릿 주세요. 그리고 함께 태블릿으로 놀아주세요. 태블릿은 단순한 사고만 하게 하잖아요. 그림책이 없으면 옛이야기라도 들려주세요. 옛날이야기 중에는 비합리적인 것들도 있지만, 장점이 굉장히 많아요. 강력한 정서를 담고 표현하고,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하죠. 물론 비싼 돈 주고 책 샀는데, 아이가 안 본다고 화내며 아이 야단치는 건 더욱 해서는 안 되고요. 한두 번이라도 정성스럽게 책 읽어주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책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요. 그런 가족의 좋은 질서를 아이에게도 물려줘야죠.

 

그럼 같이 즐거우려면 태블릿 게임 같이 해도 될까요?
무슨 게임 하니? 라고 묻지 마시고, 무슨 게인이 이렇게 재밌니? 라고 말할 수 있어야죠. 같이 하세요. 아이가 뭐 때문에 이 게임에 과몰입하게 됐는지, 뭐 때문에 힘이 든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어요. 아이와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지금 아이가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 있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물어보세요. 모든 걸요.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한다는 마음으로요. 힘 빼시고요!

 

재택근무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많다. 하지만 인적자원관리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71%의 사람이 원격근무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인간은 누구나 소통을 필요로 하고, 직장에서도 공동작업에서 시너지가 발생하는데, 재택근무에서 혼자 일하는 외로움으로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 이는 아이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걱정이 든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플랫폼으로서의 집 공간을 재설계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개별공간 확보가 안 된다는 점이 코로나19 시국에 우리가 집에서 맞닥뜨린 문제죠. 집은 함께 모이기도 하고 또 혼자만의 독립이 있기도 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큰 집이 아니라도 가능합니다. 저는 아이가 돌이 되기 전 기어 다닐 때 마루에 헌 냉장고 박스로 집을 만들어줬어요. 세모 네모 동그라미 구멍을 낸 다음 셀로판지를 붙인 창도 냈죠. 담요와 장난감을 넣어줬더니 아이가 그곳을 참 좋아했어요.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조금 큰 아이들이 그 종이집을 너무 좋아해서 몇 명씩 들어가서 놀다 결국 터졌어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집이 복작복작해서 힘들어지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집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세요. 인내심이 폭발할 때까지 집에서 머물다 보면 갈등만 생기니까요.

 

일과 쉼 구분을 위한 조언과 재택근무 중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이지요. 집안일이라는 것이 끝이 있기가 힘들고 육아도 뭐 잘떄가 퇴근 아니겠습니까? 일은 나 혼자 하게 될 때는 오롯이 그것만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인데요. 누군가가 그 시간을 위해 내 일을 분담해주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가족 구성원들끼리 분담하고 제 역할을 책임감있게 할 수 있는 신뢰가 반드시 만들어져 있어야지요.

 

『에밀』의 작가이자 교육학의 대가인 장 자크 루소는 아이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선택의 자유를 주라고 말했다. 102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역시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고, 아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라고 조언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역시 자녀 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방목’이라고 강조한다. 

 

머리로는 아이의 선택권과 자유를 주고, 느슨하게 방목하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도무지 어려워 보입니다.
부모와 자녀란 태중에는 한 몸이었다가 세상에 나오면 매일 조금씩 멀어져서 마침내 성인이 되면 떨어지는 그런 존재라고 봅니다. 부모는 건강한 분리와 건강한 성인으로의 독립을 돕는 존재인 거죠. 부모의 역할은 그 거리를 잘 조정하고, 그 속도를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분리-개별화라고 하는 부모의 최종 역할까지 영유아시기는 부모가 베이스캠프와 같은 존재여야 하겠지요. 자녀들은 조금씩 주변 세상을 탐색하러 나갔다가도 부모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면서 마침내 부모가 일관성 있게 있어 주는 것을 확인하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 심리적 주유인 거지요. 그게 아이에게 분명히 인지돼야 해요.  아이들이 걸어다니기 시작하면서 ‘내가 할 거야’, ‘이건 내 거야’ 하면 부모 입장에서는 섭섭하죠. 쥐방울만한 녀석이, 나중에 청소년 되면 키까지 더 커져서 부모를 내려다보고 문 쾅 닫고 돌아설 수도 있으니까요. 원수가 되는 건대요. 건강한 성인으로 분리하는 것이 목표란 이야깁니다.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든 건강한 존재로 분리될 수 있도록요. 

 

아이들의 자아가 강해지는 시기에 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아이들의 발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할 거야’라고 말하는 자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부정적인 신호로 보면 안 돼요. 아이들은 실패를 통해 배웁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어요. 인생은 레이스가 아니라 경험이거든요. 우리는 인생에 대해 직선적인 사고를 합니다. 비슷한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취직해야 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는 등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키워요. 남과 조금만 달라도 불안해해요. 대학 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한다고 하면 걱정하고, 좋은 직장에 입사했어도 언제 결혼하고 애를 낳을 건지를 걱정하죠. 비슷한 경주에요.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빨리 죽으려는 경주 같다고 할까요? 그러지 말고, 인생을 나선형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선형 인생은 무엇인가요?
인생을 직선형으로 살기보다는 중간중간 자기 선택지를 되돌아보고 살아가는 사회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장해준다면, 지금 초등학교에서 아이가 좀 늦는다고 해서 대학까지 늦을 거라는 조급함을 갖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죠. 레이트 블루머(late bloomer, 얼리 블루머의 반대말로 늦게 꽃 피는 사람, 대기만성형 인간을 칭함)라고 하죠. 아이들마다 다 달라요. 어떤 아이는 발달이 또래보다 늦을 수도 있고요, 청소년기를 좀 더 오래 살아야 하는 아이도 있죠. 그런 아이들의 특성을 인정해주면 좋겠어요. 경험이 많이 필요한 아이라면 경험을 더 많이 시켜주고요, 갭이어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학교를 잠시 쉬더라도 그 부분을 충족시켜주는 겁니다. 육아서적 대신 아이의 눈을 들여보란 이야기가 바로 이 맥락이에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쉼이 필요해요. 엄마들도 ‘훌륭한 엄마’ 되기 패턴을 깨면 자신도, 또 아이도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수백만 명의 부모들은 코로나19가 초래한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원격교육 기술을 익혀야만 했습니다. 원격기술에 능한 부모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감염병 상황에서 낯선 학습환경에 접한 자녀들의 원격교육을 위해 좌충우돌한 상황이 된 것은 사실 학부모들의 문제만은 아니었죠. 모든 직장인, 아니 전국민에게 닥친 상황이 됐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존재들은 교사 즉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문서수발 정도의 디지털 기술만을 쓰면 되었던 환경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화면 속의 학생들과 공부를 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초중등 교사, 대학 교수들은 하나의 구획된 공간 안에서 상호작용이 이뤄지던 현실에서 부모와 다중의 불특정 인간들에게 자신을 노출하며 코로나19 상황을 뚫고 접하지 못했던 디지털 구현을 위해 자료를 만드랴 그야말로 고군분투 했습니다. 저 역시 기존에는 대면 설명만으로 충분했던 학습내용을 새롭게 전달하느라 유투브의 세상을 헤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대비하도록 정부에서도 에듀테크 관련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학교를 갈 수 없는 또는 집에서의 재택학습을 잘 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우선 인터넷 접속에 원활한 인프라 구축이나 디지털 기기가 잘 갖추어져 있는가, 독립된 학습이 가능하도록 하는 공간 환경 확보 등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 환경을 제공해 준다면, 부모가 반드시 원격교육관련 기술에 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가르쳐줘야 한다는 완벽주의를 버리면 아이와 함께 더욱 행복한 육아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덕선(혜리 분)은 생일이 동생과 비슷한 시기이다. 엄마가 동생 생일에 맞춰 자신의 생일을 함께 해주자 서운해 화를 내고는 집을 나간다. 뒤따라 나온 아빠(성동일 분)가 덕선이를 찾아 동네 구멍가게로 데리고 갑니다. 케이크에 초를 켜고 덕선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미안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에서

 

코로나19 시대, 디지털 수업이 보편화되는 세상에서 아이들의 교육은 독립적인 학습자가 되는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이런 교육 방향 설정은 중요해보이는데요. 현재 유아교육, 보육에서 디지털화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나요?
사실 유아교육과 보육 차원에서 이 논의가 진전된 건 없어요. 일부 기업이 하고 있지만 조심스럽죠. 유아 말고 아동기 아이에게도 미디어 적정 사용에 대한 논란이 많잖아요. 사실 발달상으로 봤을 때 마스크도 아이에게 부담인데, 미디어를 활용한 수업 논의 자체가 불경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건 교사들을 위한 플랫폼으로 활용해야 할 겁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가정에서 양육할 때 교육 서비스나 팁을 전달하는 용도 정도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유아교육의 디지털화가 아이가 아닌 교사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아이들의 경험이 제한되고 있죠.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은 감각을 통해 뇌가 발달하는 존재라는 점이에요. 태중에서는 청지각, 듣는 걸 통해 뇌가 발달하고요, 출생 후에도 누워서 듣죠. 아이들을 많이 돌아다니게 하고 경험하게 하고 듣게 해야 하는데 못하니 걱정스러운 겁니다. 그걸 교육기관이 못하니 부모가 해줘야겠죠.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꾸 말 걸어주고 만져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표현하게 하고 하는 것들이죠. 이 부분이 여전히 부모가 해줘야 하는 부분으로 남아 있어요. 그러니 밀폐된 공간인 집보다는 밖에 나가는 게 좋다는 이야기에요. 트인 곳에서 산책하고, 자연을 보여주고 말 걸어주는 것들이 중요하단 겁니다. 에듀테크는 물론 중요하지만, 아이에게는 오히려 이보다는 아날로그적인 것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놀이터에서 몸을 써서 움직이는 것이 더 본질적이란 거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유아교육 방향은 어떤 방향으로 전환돼야 할까요?
디지털 시대에 학습자는 독립적 학습자가 된다기보다, 학습자의 개별화교육이 강화될 것입니다. 개인 맞춤형 교육이 강화될 것입니다. 유아교육과 보육분야에서는 어느 학교급보다도 영유아 개별적 특성에 맞추어 교육과 보육을 해왔으므로 교육방향 설정을 다시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은 기술이지 교육의 본질을 넘어서기는 어렵습니다. 놀이중심으로 개별 유아의 요구와 흥미에 맞추어 교육하는 흐름은 기술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인공지능(AI) 교사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반복적인 업무를 담당하겠죠. 반면 부모와 교사의 교육자 역할은 멘토와 코치로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인공지능 교사가 중요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개인 맞춤형 교육을 가능케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대면 교육을 다 맡아서 하기에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죠. 보조적인 역할을 할 것이고, 이조차도 인간이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유아교육에서 부모와 교사의 역할은 멘토의 역할이지 유아를 앞서서 끌고 가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개인 맞춤형 교육 진단, 평가, 기록 등이 보다 원활하게 진행되겠죠. 교사와 부모는 이를 활용해 유아에게 더 수준 높은 교육적 지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가정교육도 강화될 것으로 예상해요. 홈스쿨링과 온라인 교육이 강화되더라도 영유아에게 제공되는 교수학습의 방식은 실물중심의 직접체험하는 방식에서 크게 변할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유아교육, 보육의 콘텐츠 문제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비대면 시대를 맞이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요. 민간과 정부가 협력해 에듀테크 서비스를 지원하는 일 또한 요구되고 있습니다. 교육콘텐츠, 학습관리시스템(LMS), 소통도구(SNS) 등의 서비스 기능을 자유롭게 제공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개발된 콘텐츠의 질을 관리하는 표준 기구, 분류?보존하는 교육콘텐츠 아카이브도 구축해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인간다운 성장’을 염두에 두면서요.
에듀테크 서비스 제공을 위한 플랫폼을 공공에서 기반을 갖춰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해당해당 플랫폼에서 컨텐츠 질 관리가 함께 이뤄져야 하겠죠. 여기에 더해 다양한 민간 플랫폼에서도 컨텐츠가 생산될 것이고, 교사들이 직접 만드는 컨텐츠들도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해요. 공공과 민간의 다양한 교호작용 속에서 컨텐츠들이 생산되는 시대가 오는 거죠.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이러한 컨텐츠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에서의 표준 마련이 돼야 하겠고요. 기관 내부적으로 내용과 질, 윤리적인 측면에서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나가야 하므로, 교사의 디지털 리터러시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도 함께 진행돼야 할 거예요. 기관내 디지털 자료의 질에 대한 검증 제도를 마련해나가는 과정도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동학대, 미래 어린이집과 유치원 공간 재구조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

인터뷰 전문은 추후 발간될 단행본에서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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