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4.『축음기, 영화, 타자기』 (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는 악명 높은 문장과 함께, 지난 세기말 우리 인류가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렸던 독일의 매체학자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A. Kittler, 1943∼2011)다. 여전히 서구 학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의 이론은 실용주의적인 영미권의 정보이론이 주도하던 매체이론계를 유럽식 매체철학의 무대로 바꾸어 놓았으며, 2011년 10월 만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우리 시대 매체의 개념과 역할에 대한 혁신적이고 대담한 주장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독문학 및 문헌학 전공자로 출발했으나, 1987년 보쿰대 교수 임용 후 본격적으로 매체이론가로 활동했고, 1993년부터는 베를린 훔볼트대 문화학과로 자리를 옮겨 ‘베를린 매체학파(Berlin School of Media Studies)’를 이끌었다. 1980년대 중반에 출판돼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학술서가 바로 『축음기, 영화, 타자기(Grammophon, Film, Typewriter)』(1986)다. 이보다 앞서 출간된 주저로는, 그의 교수자격시험 논문을 출판한 『기록시스템 1800.1900(Aufschreibesysteme 1800.1900)』(1985)이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의 연구는 고전 철학과 음악, 아름다움과 숫자의 근원적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 문화기술학’으로 선회했고, 이러한 근원적 문화를 다시 우리 사회의 디지털 문화와 연결하는 폭넓은 사유를 펼쳤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 를 포함한 키틀러의 주저 2권은 우리나라에서도 모두 출간된 바 있다. 『기록시스템 1800.1900』은 키틀러 매체이론의 뼈대를 이루는 개념인 ‘기록시스템’을 설명하면서, 서구의 문명사를 각 시대의 주도 매체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기록시스템 중에서도 우리의 ‘현재’와 보다 밀접하게 관련된 20세기 초의 아날로그 매체기술들을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축음기, 영화, 타자기』다. 이 저서에서는 키틀러가 중시하고 있는 매체의 ‘하드웨어’ 측면, 즉 매체가 정보를 어떻게 저장하고 전송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감각과 지각도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푸코의 계보학을 매체이론의 관점에서 전유한 이러한 키틀러의 시각을 이어받아, 우리 시대 매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인 미디어고고학도 탄생할 수 있었다. 가장 처음 소개했던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는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문장으로 키틀러는 ‘매체결정론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사실상 이는 매체결정론 혹은 매체유물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키틀러 이론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역사의 동력은 더는 인간이거나, 인간의 사상이거나,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매체는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고 있을까? 키틀러는 이것을 인류의 역사 전체를 매체사로 재편성하면서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인간 주체를 지워버린 키틀러의 인간관에 대한 논쟁은 종종 포스트-휴머니즘의 논의와 연결돼 진행된다. 키틀러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용자나 인간이 기계와 매체에 부여하는 의미가 아니라, 기술에 의해 의미가 생산되는 과정 그리고 기술이 오히려 사용자를 제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매체사로 재편성된 인류사키틀러에게 있어 역사 단위를 구성하는 것은 정치제도나 주요 사상과 같은 상부구조가 아니다. 혹은 노동 및 생산성과 같은 이전 시기에 중요하게 여겼던 하부구조도 아니다. 그가 지목하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르게 우리 시대의 토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정보처리기술(data-processing technologies)이다. 다시 말해서 한 시대가 가지는 동질성이란 그 안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동일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저장하는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하나의 역사적 단위는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 안에서 담론이나, 교육, 정부의 관행은 변화되겠지만, 그러한 정보를 유포하고 처리하는 코드와 프로토콜은 유지된다. 그렇다면 역사의 단위가 바뀌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를 주도하는 매체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정보를 처리하는 새로운 기술적 매체가 도입되면, 전체적인 문화적 상부구조가 전복된다. 따라서 새로운 매체기술의 침투와 매체 사용에 있어서의 균열은 언제나 사회 변화의 징후로 읽을 수 있다. 키틀러의 매체유물론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구도를 보여주며, 이렇게 인류의 문화사는 매체사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던 인간 주체에 대한 인식 역시 극적으로 변화된다. 인간 주체를 변화시킨 매체기술사실 키틀러의 관심사는 ‘지각하는 (인간)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는 언제나 대상에 종속된다고 본다. 인간의 지각이 물리적 현실과 인터페이스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 조건을 구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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