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하얀 피부를 접목해 준 푸른 눈의 여의사1890년 초겨울, 화상을 입은 지 4년 되어 손가락과 손바닥이 붙어버린 소녀가 젊은 서양 의사를 찾아왔다. 여의사는 3시간여의 수술을 통해 소녀의 손가락을 분리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손가락의 피부가 다 떨어져 나가 버렸다. 의사는 두려워하는 소녀를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팔에서 피부를 몇 군데 떼어내어 이식해 주었다. 한양 땅 보구여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양인 여의사의 헌신은 곧바로 소문이 났다. 나중에는 이화학당 학생들, 다른 선교사들까지 나서서 소녀에게 피부를 기증했다. 그렇게 소녀의 손은 접붙이기의 과정을 거쳐 되살아났다. 이 25세의 여의사는 바로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이었다. 화상으로 뭉개진 피부가 다른 피부를 만나 하나가 되는 데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접수(뿸穗, 접을 붙일 때 바탕이 되는 나무에 다른 나뭇가지를 꽂음. 또는 그 나뭇가지)가 대목(臺木, 접을 붙일 때 그 바탕이 되는 나무)과 하나가 되듯, 이식된 피부도 상처가 아무는 아픔의 시간이 있다. 로제타 셔우드 홀! 그녀는 대목인 조선에 자신을 접수로 삼았다. 접붙이기는 한 개체(접수)의 지상부와 다른 개체(대목)의 지하부를 연결해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접붙이기는 상처 치유 과정이기도 하다. 절단된 줄기 또는 가지의 단면이 만나 접합 부위가 붙고 물관과 체관이 연결돼 제 기능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푸른 눈의 서양의사 로제타, 처음에는 자신의 살점 몇 조각을 병든 조선소녀에게 주었지만 이후에는 자신의 남편과 딸, 아들까지 온전히 이 곳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바쳤다.   내가 아니라 내가 인생에서 말한 진실이, 내가 아니라 내가 인생에서 뿌린 씨앗이, 후세에 전해지게 하소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이 잊혀질지라도 내가 말한 진실, 내가 행한 실천만이 남겨지게 하소서.(호라티우스 보나르의 글, 로제타의 일기 1권) 상처 입고 희생당한 접수의 아픔특별히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열정과 사랑을 온전히 조선여성들에게 쏟아 부었다. 로제타는 조선에 여성의사가 절실하다는 소식을 듣고 의료선교사로 자원했다. 뉴욕의 병원에서 선교를 준비하던 중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1860~1894)을 만나 함께 사역하기로 했다. 로제타가 먼저, 선교지를 바꾼 윌리엄이 이듬해 도착했고, 둘은 이역만리 낯선 한양에서 결혼했다. 하지만 한양과 평양을 오가는 의료선교 활동 중에 남편 윌리엄이 열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썩어가는 중국인 군사들의 시체로 오염된 평양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다가 발진티프스에 걸려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로제타가 활동하던 조선에 부임해 함께하기를 그토록 애타게 바랐건만, 윌리엄은 부임 4년 만에 아들 셔우드와 부인 로제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양선교의 개척자, 고아들의 친구로 남았다. 남편을 잃은 충격을 뒤로하고 로제타는 윌리엄 홀을 기리는 기홀병원(記忽病院, The Hall Memorial Hospital)을 평양에 세웠다. 1897년의 일이다. 남편을 떠나보낸 28세의 로제타가 출산을 위해 잠시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가 남편의 죽음을 기려 조선 땅에 의료기관을 설립하고자 모금운동을 한 값진 결과물이다. 그녀는 딸 이디스를 낳고 3년 후에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긴 항해 길에 쇠약해진 어린 딸 이디스마저 평양에서 이질로 죽음을 맞았다. 눈을 크게 뜨고 엄마를 바라본 채 작은 영혼은 서서히 엄마를 떠나갔다. 아빠인 윌리엄의 곁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남편과 딸을 양화진에 묻은 로제타는 깊은 슬픔을 더 큰 선교사역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로제타의 아픔은 그저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다. 튼튼한 대목(臺木)으로 서다 슬픔은 곧바로 사랑의 헌신으로 승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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