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지평을 넓히는 방송대인

 

“모조 주얼리(보석) 상품 위탁생산(OEM) 바이어 사업을 1984년도에 시작했는데, 20년 뒤에 방송대에 입학했습니다. 1년에 네 번씩 미국, 캐나다, 홍콩, 일본을 오가고 매달 일주일씩 중국 청도 출장을 다니던 때였습니다. 한참 일하던 중 어느 날, 한 일간지 광고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방송대를 봤습니다. 그때 바로 ‘이곳에 가야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오유식 한나인터내셔날 대표는 방송대에 문을 두드리던 날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2004년 3월 방송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2006~2007년 방송대 경영학과 25기 학생회장을 맡은 오 대표는 한창 사업 성공 가도를 달리다, 문득 배움에 대한 갈급함으로 방송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6년 만에 진로를 확 틀어, 돌연 해외 수출 기업인 청신산업에 입사했다. 이때는 보다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성실함’ 무기로 세계 무대 도전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고학력 동료들뿐이었다. 그들과 경쟁하려면 그에게 무기는 ‘성실함’밖에 없었다. 전국 각지 공장으로 동분서주 발품 팔고, 잠을 줄여 가며 일했다. 경쟁자보다 빠르게, 더 많이 실적을 쌓기 위해 직원들에게 간식을 사다주는 등 친화력 공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한 미국인이 자신의 회사가 판매할 물품의 제조를 맡아줄 해외 공장을 찾는 ‘바이어’ 역할을 부탁하면서 그에게 사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의 상업 확장기의 광풍을 역이용한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SKY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즐비했어요. 그들이 잔뜩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데, 저는 고졸 공무원 출신이었죠. 누구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했고 개발실에서 물품을 조립하는 여직원들과 먼저 친해졌어요. 껌, 초콜릿, 빵을 사다주며 ‘내 것을 더 빨리 처리해달라’라고 했죠. 공장 협력업체에 직접 출입하다보니 부품이 얼마고, 납땜, 도금, 포장을 어디서 하는지도 알게 됐어요. 다른 직원들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라고 질투도 하더군요. 열심히 일하는 절 가장 좋아한 건 당연스럽게도 사장이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미국 근무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30대 초반 나이였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일만 했다. 그런데 그가 글로벌 마켓의 한가운데인 미국에 있다 보니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전까진 스스로를 깎아가며 무조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면, 이때 깨달은 점은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었다.


“제가 미국 사업을 관리하던 시기엔 직원들을 퇴근시간 정각에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미국 무역부 직원들이 잔업을 많이 하지 않다 보니 전 회사에 소문이 나고, 회장,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어요. ‘대체 일은 다 해놓고 가는 거냐’라는 상사의 물음에 ‘확실하다’라고 답했어요. 머니머니(money money) 해도 타임(time)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보니 선택과 집중을 하며 시간을 아껴 쓰더라고요. 제가 그때 미국 사람이 다 된 거죠. (웃음) 집에서 뒹굴뒹굴 놀아도 좋습니다. 그렇게 쉬어야 에너지가 쌓이고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의 나이 35세, 어느 날 일면식 없던 미국인이 찾아왔다. 서울 소공동 한 호텔에서 만나, 자신의 사업과 연계된 바이어 에이전트를 부탁했다. 공무원을 그만 두면서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길 거부했는데, 미국인이 제안한 제2의 도전은 새삼 또다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미국인은 나와 일하면 잘 풀릴 것 같다고 했어요. 바이어 에이전트, 듣기엔 좋은 말인데 제가 그 미국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 미국인은 나를 잘 안다며 강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2년 동안 먼발치에서 나를 봐왔다고 했습니다. 3일 동안 고민했어요. 사장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다 죽어’ 한마디에 방송대 선택
그는 ‘한나패션’이란 이름으로 바이어 에이전트 문을 열었다. 북미 대형마트 등에 납품하는 저렴한 모조 주얼리 상품을 제작하기 위해 국외 공장들을 알아봐주는 역할을 하는 회사였다. OEM 에이전트라 할 수 있다. 그는 사업 첫해부터 기대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250만 달러 규모를 거래하면서 이에 대한 수수료로 17만5천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다음 해엔 2배 이상의 거래량과 수수료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보통 아침 6시가 되기 전 기상해 15년 동안 수영을 해왔고요, 중국 공장에 매달 일주일씩 출장 갔어요. 1년에 4번 이상 미국, 홍콩을 오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어요. 그러니 아내가 저한테 ‘그러다 죽어’라고 한마디 했어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죠.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고, 방송대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어요. 방송대에 입학하겠다고 하니 아내와 자식들은 ‘아이고 못 말려’라며 두손 두발 다 들더라고요.(웃음)”


그는 방송대 생활을 하며 자신이 한뼘 더 자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달러를 만져본 경험은 수없이 많았지만, 경영에 관한 지식 뼈대가 부재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일반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는 또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오 대표를 방송대로 이끌었다. 그는 캠퍼스 없이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소문 난 방송대가 시간을 획기적으로 활용하며 사업을 키울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

 
“저는 달러를 벌어본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사업해 성공한 사람은 돈의 가치를 일부 등한시할 수 있다고 봐요. 내수 사업이 ‘쩐치기(동전놀이)’라면 해외 수출은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니까요. 오히려 큰돈을 만지며 겸손을 배웠습니다. 불필요한 유흥을 하지 않으며 오직 사업에만 집중했고요. 그런 저의 커다란 포부를 받아줄 곳은 방송대밖에 없었어요. 늘 방송대 교재를 들고 다니며 공부하고, 주말마다 스터디 했던 기억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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