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당장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가거나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할 수 없다. 만날 약속 장소도 정할 수 없다. 주소가 없다면 생길 일이다. 주소는 이런 이유로만 생긴 걸까?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서 용산구 한강로동 이태원로 22로 옮긴 대통령 집무실을 보고 든 생각이다.


디어드라 마스크(Deirdre Mask)는 『주소 이야기』(원제는 The Address Book, 민음사, 2021)에서 주소가 행정적 목적뿐 아니라 권력 작용의 결과라고 말한다. 국가가 세금을 매기고 치안을 유지하며 범죄자를 찾아 투옥하기 위해 주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소에는 정치성이 숨어 있다.
650여 년간 오스트리아 왕실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현 폴란드 영토인 슐레지엔 땅을 프로이센으로부터 되찾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봉건 지주들이 힘세고 성실한 농노가 아닌 약체 사람을 장병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이때 테레지아가 묘안을 발휘한다. 모든 가구에 번호를 매겨 거주자 명단을 작성했더니 110만 총 가구 수와 700만 명의 전투 가능한 장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전쟁에서 이긴 건 불문가지. 주소는 국가 권력 작용의 통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주소를 통해 사회의 일원이 됐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시민으로서 정체성도 품게 된다. 주소 덕택에 유권자 등록과 선거구 책정이 쉬워졌다. 그래서 주소는 민주주의 증진에 보탬이 됐다는 평가가 있다. 동시에 세금을 납부하며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됐다.

 

주소는 우리 정체성의 상징이자,
정부가 권력을 미치는 수단이며,
사회 구조를 반영하고 또 개선해 나가는 방법이 됐다.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이전한 대통령 집무실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자못 궁금하다.

 

 

주소가 신원을 증명하는 데 필수인 인도에선 송곳 박을 땅도 없는 빈민들은 은행계좌 개설은커녕 연금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정부가 발급하는 생체 인식 신원 증명서인 아드하르카드(Aadhaar card, 힌두어로 ‘기반’이란 뜻)를 소지해야 하지만 빈민촌 주민은 주소가 없어 카드 발급이 쉽지 않다. 열두 자리 개인 고유 번호를 부과한 이 카드는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같다. 이게 없으면 출산 지원, 연금, 진학 등과 같은 공공 서비스 혜택을 거의 받을 수 없다. 식비 지원도 받지 못한다. 인도에서 주소는 생존의 열쇠다.


주소는 전염병 확산을 막는 데도 이바지했다. 19세기 영국 의사 존 스노가 지도와 주소를 활용해 콜레라의 진원지를 파악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영국은 1837년에 호적 총국을 설립해 국민의 출생과 사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호적 총국에서 새로운 데이터 정리를 담당하던 윌리엄 파는 의대 출신이다. 그는 영국 사람들의 사망 원인과 직업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윌리엄 파는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지 모르면 왜 죽는지도 연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사망자가 ‘어디서’ 발생했는지는 공중보건에 있어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정보다. 이렇듯 주소를 통해 발병 지역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게 됐다. 우리도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식당과 가게를 드나들 때마다 개인 신원과 위치추적 정보를 제공했다.


주소는 단순히 위치를 지정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성격을 규정하고 주소가 자본증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 불문가지. 바로 인접한 토지도 서로 다른 행정 구역에 편입되는 순간 가치가 달라진다.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스트리트(street)’보다는 ‘레인(lane)’에 있는 건물이 더 비싸고, 미국에선 주소에 ‘레이크(lake)’가 들어간 주택은 전체 주택 가격의 중앙값보다 16퍼센트 높았다.


뉴욕시는 주소를 돈 받고 부동산업자에게 판다. 트럼프가 돈 번 비결이다. 주소의 경제성을 간파한 행정기관이 자본 논리로 마케팅한 사례다. 센트럴파크와 파크 애비뉴 주소를 단 집값이 비싼 이유다. 공원과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라 할지라도 말이다. 서울교통공사가 을지로3가역을 ‘을지로3가(신한카드)역’으로 역명 병기 계약을 체결하면서 신한카드사로부터 8억7천400만 원을 받는 것도 주소의 경제학으로 설명된다. 도로에 이름이 없는 도쿄와는 비교된다. 주소에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다. 서양인들은 도로(선)에 집착하고 도로에 이름을 붙이는 관행을 고집해 왔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블록에 더 주목한다. 일본에서 도로는 블록과 블록 사이의 공간일 뿐이다.


주소는 우리 정체성의 상징이자, 정부가 권력을 미치는 수단이며, 사회 구조를 반영하고 또 개선해 나가는 방법이 됐다. 그래서 윤 대통령의 청와대 탈출은 정치권력의 상징을 바꾸는 일이며, 권력을 미치는 수단의 변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이나 큰 사건 후에 주소 이름 개정이 뒤따른 사례를 보면 주소 개정은 갈등의 축소판이자 기억의 전장이다. 지금까지도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주소 변경이 혼란을 야기하는 이유다.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주소의 정치경제학을 알고 나면,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이전한 대통령 집무실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자못 궁금하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극복하고 탈권위에 따른 더 민주적인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방아쇠가 될는지 지켜볼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소에 담긴 터무니가 오롯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강성남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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