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지평을 넓히는 방송대인

“어린 시절 꿈은 외교관이었습니다. 전 가만히 있는 걸 못 버티는 성격이에요. 조금만 안정이 되면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하거든요. 중국에서도 사업을 하고, 러시아, 남미 등 안 가본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외교관보다 더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일한 걸 지금 돌아보니 ‘민간외교관’으로 삶을 살았네요.”

 

김광재 CP R&D 대표가 11세 때, 부친은 사고를 당해 몸져누웠다. 그때부터 지게를 지거나 등짐 나르는 일은 그의 몫이 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소여물을 끓이고 나뭇짐을 나른 후 등교하면 8시. 어릴 때부터 겪은 고된 일상은 훗날 그가 전 세계를 누비는 원동력이 됐다.

 

러시아에서 첫 실패 경험 후 중국으로
대구공고 졸업 후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입사했다. 대기업 직원이 돼 하청업체 공사감독 업무를 맡았다. 아침에 억지로 눈을 뜨고 출근해 긴장감 없는 하루를 보내고, 저녁 술자리 이후 귀가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4년 6개월 만에 아내와 상의도 없이 퇴사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돈을 벌 자신은 있었다. 1991년 대원전기콘솔을 창업해 큰돈을 벌었지만, 바둑에 빠져 3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이후 카드조회기 대리점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그가 한 일은 바로 방송대 입학이다. 

 

“여유가 좀 생기니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대학 졸업장 따는 일이었습니다. 법학과를 선택한 건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보험 회사와 소송을 했는데, 판례집을 다 외울 정도로 읽고 변호사 없이 재판에 임해 승소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때부터 법학을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죠.” 특히 철저한 수업 준비가 인상적이었던 강경선 교수의 강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국내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해외 진출의 길이 열린 건 2001년. 한 교회 목사님 일행과 모스크바신학대 졸업식에 동행하면서다. 당시 러시아에 1억 원이면 큰 땅을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투자했는데, 허가신청에 마피아가 개입하면서 ‘한국인이 사업할 토양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업을 접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중국 여행을 갔다가 걸어서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눈 내린 백두산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백두산 자락에 한국식 휴게소를 차리면 장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후 중국동포를 비롯해 공안, 산림보호국, 세무서 등에 여러 번 사기를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들의 연속이었지만, 뚝심으로 버텼다. 결국 60명이 넘는 한국인이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백두산 자락에 ‘폭포식당’을 개업할 수 있었다.

 

2003년에는 ‘해외 1호 방송대인의 집’ 현판식을 열었고, 이후 조규향 당시 방송대 총장이 타 국립대 총장단과 동반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백두산 천지에 사는 산천어를 낚시로 잡아 회를 떠드렸죠. 당신 제자가 여기서 일한다는 걸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던지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최길석 당시 전국총학생회장은 임원단과 함께 한 달여 머무르며 식당 일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이 거세지면서 결국 2006년 문을 닫고 말았다.

 

폭포식당은 문을 닫았지만
하지만 그는 이보다 1년 앞서 길림성에 바둑교실을 열었다. 그에게 바둑을 배우러 오는 학생이 500명에 육박하면서 중국인 교사도 10여 명 넘게 채용했다. 2007년 7월 청도에서 열린 ‘전국청소년바둑선발전’에는 그의 바둑교실에서 출전한 7~12세까지의 문하생이 전원 입상하는 쾌거를 거뒀다. <산동TV>를 비롯해 여러 언론사가 그의 바둑교실을 취재했고 문하생은 점점 늘어갔다.

 

그때 한 중국인이 김 대표의 이력을 문제 삼았다. 외국인인 그가 과연 바둑교실을 운영할 자격이나 제대로 갖췄겠느냐는 지적이었다. 그는 “그때 방송대 졸업장이 빛을 발했습니다. 바둑 아마 6단 단증과 방송대 졸업장을 제출했더니 그런 소리가 쑥 들어가더라고요. 이후 2019년 귀국하기까지 14년 동안 3만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식업, 대북사업, 무역업 등 여러 사업을 하면서 그가 꼭 지키려고 했던 소신은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이다. “어디서 무슨 업을 하든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면, 굳이 자신을 알리지 않아도 멀리서 반드시 오게 돼 있어요. 백두산 1호 식당을 하면서도 오는 손님들에게 유머와 위트를 섞인 말을 해주니 단골도 늘고, 장사가 더 잘 됐고, 바둑교실에 오는 아이들 학부모와도 많은 교제를 하게 되더라고요.”

 

중국에 장기 체류하면서 자연스레 그는 대북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북한에 있는 친척을 찾는 이들에게 소식을 알려주는 단순한 일부터 시작했다. 무료봉사로 하던 일이 점점 전문적으로 성장하며 2015년부터 본격적인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 2018년에는 빌리 그레이엄 재단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 의료기기 등을 보내는 일도 도맡았다. 미국 측에서 최고의 북한 라인 중 하나로 인정을 받은 것.

 

현재 경색된 남북관계에 대해 그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한국이 역할을 더 하되,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조금 긴 호흡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북한 고위급 간부들과 연결되는 북한 라인들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조언했다.

 

2019년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이듬해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두 자녀는 일자리를 잃었다. 일자리도 창출할 겸 경험 삼아 해보라고 효자동에 차린 ‘청기와식당’이 청와대 개방으로 세칭 ‘대박’이 나면서 본인도 꼼짝없이 식당에 묶인 몸이 됐지만, 그에겐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이다.

 

“방송대는 내 지식의 샘”
그는 어딜 가도 최종학력란에 ‘방송대 졸업’으로 적는다. 법학과 졸업 이후에도 2019년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여러 학과에서 공부하는 것이 꿈이다. 그에게 방송대는 단순한 대학 졸업 증명서 발급처가 아니라 신선한 활어 같은 지식을 항상 배울 수 있는 ‘지식의 보고이자 샘터’다.

 

앞으로 그의 도전 과제는 조금 뜬금없지만 교육이다. “방송대에서 공부하면서 인문학의 가치를 정말 많이 느꼈죠. 논어, 소학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동서양 고전을 원 없이 읽을 수 있었어요. 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대북사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으면, 우리나라에 세계 1등 드론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바둑과 역사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으면 좋겠고요. 중의학을 전공한 아들을 위해 대학병원이 있는 대학을 인수하면 어떨까 생각도 해요. 벌써부터 즐겁네요.” 과연 그의 도전은 어디가 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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