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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시인 백곡 김득신(1604~1684)은 대대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어려서 큰 병을 두 번이나 앓은 탓인지 방금 외운 것마저 기억하지 못할 만큼 머리가 나빴다. 열 살 무렵에야『십구사략』을 공부한 그는 스물여섯 자에 불과한 첫 단락을 사흘 동안 배우고도 쩔쩔 맸다. 모두가 그를 둔재라고 조롱했으나 아버지는 아들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며 그를 신뢰했다.


어려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던 그는 열아홉 살에야 겨우 몇 수의 시를 지어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시를 본 아버지는 “참 잘 지었다”라며 60세가 될 때까지 과거 시험을 볼 것을 당부했다. 이듬해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로서 고을을 순시하던 중 순직했다. 김득신은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 뒤 책상을 짊어지고 깊은 산 속으로 갔다. 절간에 틀어박혀서 36년 동안 36편의 고문(古文)을 외우고 또 외우며 시를 지었다. 오언 절구를 특히 잘 썼던 까닭에, 예조판서를 지낸 택당 이식은 “김득신은 조선 최고의 시인이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39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47세 때에는「용호(龍湖)」라는 시를 지었다.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가을산엔 소낙비가 들이친다/저무는 강에 풍랑 이니/어부가 급히 뱃머리 돌리네’라는 시를 본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은 “「용호」는 당시(唐詩) 속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라며 상찬했다. 김득신은 59세에 마침내 문과 급제해 아버지의 유훈을 지켰다.


그가 괴산 취묵당(醉墨堂)에서 쓴 「독수기(讀數記)」 첫 대목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백이전」은 1억1만3천 번을 읽었고,「노자전」,「분왕」,「벽력금」, 「주책」,「능허대기」,「의금장」,「보망장」은 2만 번을 읽었다.” 옛날에는 십만을 1억으로 표기했으니 「백이전」만 무려 11만 3천 번이나 읽은 것이다.


18세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김득신을 두고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상하 수천 년의 시간과 종횡으로 3만 리 드넓은 지구상에 독서에 열심이고 굉장한 분 가운데 백곡을 으뜸으로 쳐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김득신은 스스로 지은 묘비명에서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해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노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그러니 힘쓰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만약 재주가 넓지 않거든 마땅히 한 가지에만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차라리 이것저것 해서 이룸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의 도도한 물결이 눈앞에서 전개되는 100세 시대다. 물질문명이 극성을 이루는 이때 우리 삶에 힘과 용기, 그리고 위안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가장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문학, 그중에서도 시가 아닐까.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보자.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보자. 깊은 밤 홀로 사색에 잠겨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쳐 보자. 노트나 휴대폰에 나만의 시를 적어 보자. 꼭 잘 쓸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만한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꾸준한 독서와 시작(詩作), 다상량(多商量)은 삶을 추동하는 힘이 될 것이다.


4백 년 전의 김득신은 자신의 나약함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줄기찬 도전 정신으로 꿈을 이뤘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김득신의 열정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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