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평화’를 말하며,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평화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주로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 또는 ‘전쟁이나 다툼, 분쟁이 없는 상태’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런 답변은 너무 상식적인 만큼 함정을 가지고 있다.
만일 사장이나 상사가 회사 이익을 내세워 직원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도록 강요한다면, 만일 아버지가 자식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식의 진로를 결정한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회사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직원은 상사나 사장과, 자식은 아버지와 싸우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30여 년 전의 세대만 하더라도 ‘회사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장에 대한 직원의 복종도,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도 아내와 자식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종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형태의 폭력은 권력의 비대칭성, 즉 권력 친화적이며 권력자에 편향적이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묵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를 단순히 ‘다툼이 없는 상태’라는 정의에서 벗어나 ‘모든 형태의 폭력이 없는 상태’로 정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평화를 사유한 사람이 있다. 현대 평화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다. 그는 ‘전쟁이 없거나 무력 충돌이 없는 상태’, 즉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로 규정하고, 진정한 평화는 ‘적극적 평화’로서 구조적이거나 문화적인 폭력을 포함해 직-간접적인 모든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갈퉁이 말하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우리에게 매우 잘 보인다. 반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성, 인종, 계급과 같은 사회 구조에 의해 내재화된 ‘구조적 폭력’이나 다양한 매체나 언어, 상징체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문화적 폭력’은 자신이 지금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평화는 기존에 내가 가진 통념과 상식을 따를 때 오히려 실천될 수 없다. 기존의 통념과 상식에 따르면 그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폭력들을 정서적으로 느끼고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훈련과 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는 ‘평화교육’은 폭력의 잔혹성을 보여주기 위해 더 선정적이고 파괴적인 폭력 장면을 재연하거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낳는 결과를 보여주고,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곧 평화라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저학년 초등학생들도 인식할 수 있다. 문제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구조적 폭력이나 문화적 폭력은 잘 못 본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폭력은 언제나 권력에
친화적이고, 집단적이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의식적이고 문화적인 혁명 없이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들에 대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인지 능력뿐만 아니라 지배 권력에 저항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정의감에 기초한 평화주의적 실천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