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집을 그려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붕부터 그리고 나서 벽과 창문 순으로 그린다. 집을 짓는 순서는 터를 정한 후 이를 고르고 벽을 치고 창문을 내고 맨 나중에 지붕을 올리는 과정을 거친다. 집은 크게 세 가지 기능적 요소로 구성된다. 즉 벽과 창문, 지붕을 체계적으로 연결해 집을 짓는다. 이처럼 관계 구조란 각기 다른 기능적 요소들의 합리적인 연결체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관계 구조의 해체를 ‘파괴’로 이해한다. 물리적인 관계 구조가 해체되는 데는 전쟁과 자연재해, 인위적인 파괴행위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관광이 아닌 여행의 최고단계가 파괴되고 그루터기만 남은 폐허 유적지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태곳적 생각을 찾는 일이다. 그렇다면 폐허 유적지는 무엇인가. 건축순서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폐허 진행 과정은 가장 먼저 지붕이 날아간다. 그리고 벽이 사라지고, 기둥 일부가 내려앉는다. 끝까지 남는 건 ‘터’다. 파르테논 신전, 제우스 신전, 포세이돈 신전에 가보면 기둥만 남아 있다. 며칠씩 일정을 잡아 이곳에서 기둥과 터를 보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체 무엇을 보는 것일까?  폐허 터가 말해주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폐허 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려면 상상력이 개입해야 한다. 거기에 스토리를 입혀서 원형을 복원한다. 팩트만으론 안 된다.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팩트들을 묶어 감성적 임팩트가 있는 스토리로 만들 때 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팩스토리(fact+story)’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형식은 디지털이지만 내용은 ‘레트로(retro)’ 혹은 ‘고전’이 먹히는 까닭도 여기 있다. 그러려면 하이 콘셉트(high-concept)가 필요하다. 하이 콘셉트는 패턴을 감지하고 언뜻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결합해 새로운 뭔가를 창출해내는 ‘창조적 상상력’과 관계있다. “사실을 말해주면 내가 배울게. 진실을 말해주면 내가 믿을게.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걸 내가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할게.”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 나오는 대사다. 스토리는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폐허 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려면
상상력이 개입해야 한다.
거기에 스토리를 입혀서 원형을 복원한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형식은 디지털이지만

내용은 ‘레트로’ 혹은 ‘고전’이 먹히는 까닭도 여기 있다.

그러려면 하이 콘셉트가 필요하다.


일견 상상은 사물을 달리 보는 법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지 않고 액자만 보거나, 텔레비전 모니터를 하늘에서 내려온 달로 보거나, 바실리 칸딘스키처럼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 「구성을 위한 스케치Ⅴ」를 그릴 수 있는 건 바로 상상의 힘 때문이다. 하이데거와 함께 독일 실존철학의 창시자인 칼 야스퍼스는 ‘상상이란 백만 가지 뜻의 원천’이라고 했다. 이렇듯 상상은 새로운 의미의 샘이다.


1920년대 뉴욕의 한 시각장애인이 ‘저는 앞을 못 봅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앉아 있었다. 행인들은 무심코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팻말의 글귀를 바꿔놓고 사라졌다. ‘봄이 오고 있지만 저는 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투어 적선했다. 팻말의 문구를 바꿔 준 사람은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 그는 평소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상상력의 힘이 우위에 있다면서 현실과 상상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상상력은 일종의 ‘마음의 근육’에 비유된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근육이 빠지는 것처럼 상상력도 빈곤해진다. 상상력은 공중에 떠다니는 허황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벼락처럼 깨닫게 하는 우주의 목소리다.


건축학자 김봉렬(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터에 발을 딛고 유적물을 보지 않고 그림이나 사진으로 감상하는 것은 배달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미식의 진미를 깨달으려면 레스토랑에 직접 가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듯이 말이다. 폐허 유적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장소(토포스, τπο)의 가치를 해석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리스가 디폴트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비아냥거리는 이야기꾼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팔아서 재정위기를 해결하라고 했다. 가당치 않은 이야기다. 문명을 자본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폐허에서는 건축재료와 기법, 당대인의 삶과 생각뿐만 아니라 당대의 국가통치와 함께 관료조직의 실상까지도 읽을 수 있다. 유럽에선 행정기관 건물을 지을 때 당대 최고의 건축 기술과 재정을 투입한다. 행정을 ‘듣거나 읽으려면’ 건물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하고, 건물잔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행정기관의 건물에는 미적 외관은 말할 것도 없고, 상상력과 스토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건물이 침묵한 채 그냥 서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건물에서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다. 최저가 입찰제도에서 비롯된 상상력과 하이 콘셉트의 결여가 빚어낸 결과다.


청계천 바닥엔 조선 시대 유적지라는 위치성을 상실한 채 널려 있는 돌무더기가 많다. 사람들은 그걸 밟고 다닌다. 터무니(터무늬) 없(애)는 개발의 전형이다. 하이 콘셉트의 결여는 건물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정치는 아예 하이 콘셉트 개념조차 없다. 그러니 맨날 싸움박질이다. 하긴 누가 정치의 그루터기를 돌아보려고 할까 싶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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