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다시, 생명을 묻다

지난 10월 29일, 또 하나의 가슴아픈 소식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태원 ‘핼러윈(Halloween)’ 축제에서 158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수학여행에 나선 고등학생 등을 태우고 인천항을 떠나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맹골수도)에서 침몰하면서 304명(미수습자 5명 포함)이 사망했던 2014년 4월 16일로부터 8년 하고도 6개월여가 지나 빚어진 참극이었다. 재난과 참사에 대한 그토록 많은 ‘대비책’, 사회적 자성과 성찰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다시 재난 앞에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그 사이 코로나19로 숨진 사망자들도 3만 명을 넘어섰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다시 생명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수한 희생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커버스토리 1면에서는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짚고, 2면에서는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탐색한 한 사회학자의 강연을 소개한다. 3면에서는 생명 문제를 다룬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면서, 생명 이해의 확장을 제안한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로 기독교 예술의 주제 중의 하나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애통해하는 어머니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생명에 대한 인식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변화한 것이 거의 없다는
참담한 사실에 맞닥뜨렸다는 게
더욱더 절망적이다."


시인 최승호는 시 「고슴도치의 마을」(『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1985)에서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라고 묻는다. 산사태나 곰, 산불은 모두 한밤중에 사람들과 마을, 생명과 삶의 터전을 위협한다. 그래서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온몸에 가시 바늘을 키워야 하며, 돌담을 높이 쌓거나, 문을 걸고 한숨을 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긴다. 37년 전의 이 시적 성찰은 낱낱의 생명이 무너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하나의 상징이 될 만하다(기사 제목의 ‘하나씩의 별들’은 박두진 시인의 시「하나씩의 별」에서 가져왔다).

안전, 우리 시대의 공적 가치
시계를 2014년 4월 이후로 돌려보자. 세월호 사고는 생명과 안전 문제를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떠올린 사건이었다. 종합일간지 사설 249건을 분석한 한 기자의 분석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부터 5월 31일까지 약 2달 동안 신문사들의 논조는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침몰 직후인 4월 17일 사설을 보면 모든 신문사가 세월호의 침몰을 ‘애도’하며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고 이를 계기로 제도와 문화 속에 ‘안전 의식’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국민들은 무엇보다 이번 참사를 통해 대한민국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기분을 뼛속 깊숙이 느끼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고, <국민일보>도 “정부가 안전에 관한 총체적인 점검을 통해 확실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 언론사에서 많이 쓰인 단어는 ‘사고’ ‘안전’ ‘정부’ ‘침몰’ ‘실종자’ 등이었다. 특히 ‘안전’은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많이 쓰인 핵심 단어였는데, <조선일보>(59회), <세계일보>(36회), <경향신문>(30회), <동아일보>(22회), <중앙일보>(16회) 등에서 많이 쓰였다(강아영 기자, <기자협회보>, 한국기자협회, 2016.4.13. http://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38931).
이 분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사회학자 김홍중 서울대 교수의 말처럼, 분명히 이 시기 우리 사회에 떠오른 ‘안전’에 관한 목소리들은 “공적이고, 정치적이고, 집합적인 가치가 되어 ‘나’의 안전을 넘어서는 ‘우리’의 안전, 그리고 좁은 의미의 ‘우리’를 넘어서는 안전으로 진화할 수 가능성”의 것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비극적인 사건
그런데 8년 6개월이 지나 또다시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방송대 동문인 방현희 소설가는 “이번 비극에 대해 우리가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불과 얼마 전에 세월호 참사가 있었으며 그로부터 사회 안전 대책이 강화됐으리라는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생명에 대한 인식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 변화한 것이 거의 없다는 참담한 사실에 맞닥뜨렸다는 것이 더욱더 절망적이다”라고 지적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생사가 갈리는 순간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했던 이혜림 학우(사회복지학과 3)도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생명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관점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생명과 안전이 제도와 문화, 삶 속에 자리잡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의 ‘사태’를 놓고 사고, 사건, 참사 등으로 각자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더 극명하게 갈라졌다는 뜻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라는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도 생명을 바라보는 데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10·29 참사 1개월 뒤에 나온 <동아일보> 사설(2022.11.29.)을 보자. “참사 발생 한 달이 지나도록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는 이유는 재난의 참혹함 때문만은 아니다. 재난이 발생한 후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실패하고 있다는 무력감 탓이 크다. (중략) 이번 참사와 같은 후진적 인재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매번 책임자 처벌로 끝날 뿐 재난에서 배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처 과정에서도 실패’, ‘재난에서 배우는 데 실패’ 등은 안전의 제도화와 의식의 내면화가 미흡했다는 지적일 테지만, 이 사설 어디에도 낱낱의 생명에 대한 치열한 인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8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국가주의적, 발전주의적 ‘생명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방증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논리를 따르면, 여기에는 ‘생명 권력’ 문제가 작동한다.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성찰
푸코의 주장을 빌리면, 생명 권력은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을 법적 주체이기보다는 인적 자본(경제적 주체)으로 환원함으로써 생명 그 자체가 자본과 소득의 흐름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의 생명 권력 분석은 살아있는 존재가 인구의 한 요소로서, 또한 구체적으로 계산된 인적 자본으로서 관리되고 조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이후 국가가 보여준 대응 방식은 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지난해 12월 조선대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이 주최한 제3회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재난의 충격,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환기해볼 수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 인권과 생명 권력」을 발표한 철학자 조난주는 “우리가 생명 권력의 작동 방식과 그 효과를 분석할 수 있을 때, 그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내부에서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과도한 통치에 저항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실존적 삶을 지켜낼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생명의 원리』(1963)에서 생명을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죽음과 대결하고 있는 적극적인 존재”로 정의했다. 이를 재해석한 정우현 덕성여대 교수(약학과)는 자신의 책 『생명을 묻다』(2022)에서 “역학법칙에 따라 규칙적인 운동만 하는 자연 세계에 예측 불가능한 운동을 일으키는 존재, 어디로 튈지 모르며 어떤 뜻밖의 결과를 유발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존재, 그것이 바로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생명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살필 줄 아는 것”을 강조했다. 10·29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생명’의 의미 성찰과 ‘생명을 존중하고 살피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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