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다시, 생명을 묻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이들은 2022년 11월 30일 기준 3만506명이다. 그렇다면 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어떤 인식의 확장을 경험했을까? 혹은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점에서 “재난이 일어나면 우리는 사유를 강제 당한다.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밀린다. 이 과정에서 재난은 그 이전에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특정 존재의 역량을 집합적으로 식별하는 계기를 준다”라고 말하는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과)의 설명이 흥미롭다. 그는 지난 11월 12일 네이버 ‘열린연단’ 시즌9 「자유와 이성」 강연에서 미증유의 감염병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점검한 「팬데믹 시대의 개인과 사회」를 발제해 눈길을 끌었다. 그의 글 가운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결론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전문은 네이버 ‘열린연단’ 홈페이지(openlectures.naver.com)에서 볼 수 있다.
정리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코로나19를 맞이해 한국 사회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는 코로나19를 비교적 큰 파국 없이 대처해나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한국 사회는, 확진자의 동선 공개나 마스크 착용, 혹은 백신 의무 접종이나 개인적 자유의 부분적 제한 등에 대해,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겪지 않았다.
서구의 경우, 새로운 감시 사회의 등장에 대한 우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방역 정책이 침해하는 상황에 대한 저항, 혹은 근대적 생명 정치의 작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지만, 한국은 이에 비하면 별다른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위기 상황에서 소수의 목소리나 이견을 청취하지 못하는 경직되고 반민주적인 사회라는 사실의 방증인가? 혹은 한국 사회에 자유의 관념, 자유의 경험과 가치의 절실함이 부재해 생명 정치적 ‘위급 상황’에서 자유보다는 생존을 추구하기 때문일까?

 

한국 사회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보여준 것은 안전이 어떻게 공적이고, 정치적이고,
집합적인 가치가 되어 ‘나’의 안전을 넘어서는

‘우리’의 안전, 그리고 좁은 의미의 ‘우리’를 넘어서는

안전으로 진화할 수 가능성이었던 것이 아닐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최근 10여 년간 한국 사회가 겪은 진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일 수 있다. 즉, 코로나19를 200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일련의 재난들의 연쇄 속에 위치시키고 살펴보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분기점으로 주목을 요하는 사건이 바로 2008년 쇠고기 촛불 집회다. 이 운동은 생명과 안전이 정치적 다이너마이트로 폭발한 최초 사건이라는 중요성을 갖는다. 이후 가습기 살균제 사건, 세월호 참사, 강남역 살해 사건, 미투 운동, 페미니즘 리부트 그리고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변형시킨 정치적 정동은 ‘안전’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1990년대의 여러 재난에 이어 IMF 외환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고통을 겪으며 21세기를 통과하면서 ‘안전한 사회’에 대한 집합적 열망을 정치화한 것이다.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리온(prion), 아이들 방에 뿜어지는 가습기의 화학 물질,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의 관리 상태, 여성의 삶을 위협하는 일상적 폭력, 이 위해의 시스템을 차단, 관리, 조절하는 것, 즉 안전(security)에 대한 꿈이 한국 사회를 끌고 간 핵심 정동 중 하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안전이라는 가치가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보편적 근대성의 가치들과 연결돼 창조적 변형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생성돼, 파급력을 갖고 운동하고 있다.
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쉽게 살해되고, 맞고, 위협에 떨어야 하는가?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가난한 청년이 유력한 부모의 자식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한국 사회는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유란 자신의 신체가 몰래 촬영돼 불법 사이트에 공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라돈(radon)에 의한 저선량 피폭을 걱정하지 않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한국 사회는 ‘안전으로서의 자유’ 혹은 ‘자유로서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안전하지 못한 삶에 내던져진 희생자, 빈민, 장애인, 동물들과의 연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한국사회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피해자에 대한 박애’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근대성의 중심 가치를 재조립하는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안전에 대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가장 정확히 읽어낸 사회학자가 울리히 벡(Ulrich Beck)이다. 2008년 봄, 쇠고기 촛불 집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그가 한국을 방문해 3월 31일 서울대에서 행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시민사회의 거주자들에게 인류학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더이상 베케트의 형이상학적인 집 없는 상태, 자리를 비운 고도(Godot)도 아니고, 푸코의 악몽적 전망도 아니며, 막스 베버를 겁에 질리게 한 합리성의 소리 없는 독재도 아니다. (…) 오늘날 사람들의 우려는 근대성에 대한 인류학적 확신이, 흐르는 모래 위에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으로부터 온다. 사스와 광우병은 단지 시작일 뿐이고 기후 파국은 곧 현실화될지도 모른다.리고 그것은 물질적 의존과 도덕적 책임의 구조가 부서지고, 세계 위험 사회의 민감한 기능 체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공황에 빠진 공포가 될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물구나무선다. 베버, 아도르노, 푸코에게 섬뜩한 전망이었던 것(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감시의 합리성)이 현재 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약속이 된다.”(울리히 벡,『위험에 처한 세계와 가족의 미래』, 한상진·심영희 편저, 새물결, 2010)

벡에 의하면, 위험 사회의 시민들은 베버가 예견한 자본주의적 ‘철창(iron cage)’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도르노가 비판한 ‘도구적 합리성’을 폄하하지 않으며, 푸코가 분석한 ‘파놉티콘’과 규율 권력에 공포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합리성’을 기대한다. 비판 지성이 오랫동안 디스토피아로 형상화한 바로 그 세계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의 상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험 사회의 시민들은 타자에 대한 과민한 공포를 품고 에고에 대한 위험을 신경증적으로 회피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로 폄하될 수 없다(지젝). 왜냐하면, 안전에 대한 욕망은 위험에 관한 지식에 기초해, 다수의 재난을 겪어내면서 대중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에너지, 집단 지성이 생산한 사회적 공통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이 비판하고자 하는 환상이나 현실에 대한 단순한 오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아감벤의 정치철학 역시, 우리 시대 안전에의 욕망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얼마나 탄력적인 변이와 차이를 생산하면서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가령, 생명정치가 작동하는 모든 곳이 곧바로 절멸 수용소가 되는 것이 아니며,  생명정치에 포섭된 대상들이 곧바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전락하는 것도 아니다. 글로벌 위험 사회의 시민들은 생명권력과 안전에의 욕망 사이에 넓은 교섭 공간을 갖고 있으며 거기서 탄력적이고 창조적인 협상을 수행해간다. 예컨대, 더 많은 CCTV를 설치하여 일상적 범죄를 예방해 주기를 청원하되, 동시에 데이터를 불법으로 사용하거나 전유하려는 국가나 자본에 저항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아감벤이 비판하는 근대 생명정치의 가치인 ‘벌거벗은 삶(bare life)’은 저급한 형태의 생명이 결코 아니다. 어떤 생명도 그저 단순하고, 벌거벗은 생명일 수 없다. 생명과 안전을 향한 욕망은 각자도생이나 이기적 안녕에 대한 열망으로 비판될 수 없다. 생존은 21세기적 생태 위기, 즉 제6의 멸종이라는 위협 앞에 있는 세계에서 다른 어떤 정치적 가치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로 재구성되고 있다. 민중의 생존권은 단순한 경제적 권리 요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권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타자를 감염시키지 않아야 하는 의무도 고전적 의미의 자유 개념을 넘어서는 위험 사회의 새로운 시민 윤리로 읽혀야 한다.

한국 사회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보여준 것은 안전이 어떻게 공적이고, 정치적이고, 집합적인 가치가 되어 ‘나’의 안전을 넘어서는 ‘우리’의 안전, 그리고 좁은 의미의 ‘우리’를 넘어서는 안전으로 진화할 수 가능성이었던 것이 아닐까? 즉, 인간-너머의 존재들로 확장되는 어떤 ‘함께-살아남기’의 사상, 그 씨앗이 우리에게 뿌려진 것일 수도 있다. 아직 한국 사회는 생태 감수성도 낮고, 기왕의 발전주의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세계를 여전히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경제적 영토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 지배적인 것이 영원히 지배적인 것으로 남을 까닭은 없다. 빠르게 변화하고, 역동적으로 진화하는 우리 사회의 역량이 우리를 발전주의를  넘어 새로운 생태주의적 감수성으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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