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도전하는 방송대인

“제가 종손이라 좀 완고했는데, 방송대를 다니면서 인식 체계가 바뀌었습니다. 오래 공부하며 지식도 많이 늘었지만, 다양한 학우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아우르는 과정을 겪으면서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진 거죠. 지금도 아내와 아이들과도 존대를 하니까요.”

 

현윤보 학우(74세)는 제주 성산포 온평리 마을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막내와는 20년 정도 차이가 난다. 부친은 오랫동안 병환을 앓으셔서 모친이 이웃의 밭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자식들을 건사했다. 현 학우 역시 중학교를 졸업 1년 후 자동차회사에 들어가 자동차 수리 기술을 배우며 가계에 손을 보탰다. 군 제대 한 달을 앞두고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일찍부터 실질적인 가장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공부라는 꿈을 꿀 여유조차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그저 8남매가 세끼 밥을 먹었으면 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제대 후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고교 졸업장이 없어 취업이 쉽지 않았다. 택시를 몰며 짬짬이 대형 면허증, 트레일러 면허증을 땄고, 탱크로리를 몰며 기름을 배달했다. 수년을 성실하게 일하는 그를 눈여겨본 이들이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를 권했고, 실제로 입사 원서를 제출했지만 8개월을 기다려도 감감무소식. 그저 종이 한 장일 뿐이라 여겼던 고교 졸업장의 위력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딸은 고2, 아들은 중2, 아빠는 고1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나이 마흔에 방송통신고를 찾아갔다. ‘혹시 나이 많은 사람도 받아줍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런 분들을 위한 학교입니다’라는 답을 들었다. 또래는 많지 않았다. 학교 밖 청소년, 딸의 유치원 친구도 있었다. 입학원서를 냈다. 당시 딸은 고2, 아들은 중2였는데, 아빠가 고1이 된 것이다. 그는 아들, 딸과 함께 공부했다. 자녀들도 갸우뚱하는 수학 문제를 만나면, 이웃집 대학생 방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3년을 꼬박 공부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현 학우는 졸업식에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고 방송통신고를 졸업하던 1993년 곧장 방송대(제주지역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법학과 경쟁률은 높았다. 하지만 고교 졸업장이 없어 힘들었던 직장 생활을 돌아보면서, 비슷한 처지의 직장 동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법학과를 선택했다.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며 노사 갈등으로 회사에서도 편이 갈려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당시 곽노현 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들으며 졸업논문도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구제방법」으로 제출했다.

 

제주 토박이인 현 학우는 방송대에 입학한 덕분에 뭍으로 처음 나들이도 나갔다. 법학과 과대표를 하면서는 혜화동 대학 본부도 자주 찾았다. 공부 자료가 없었던 제주 학우들을 위해 본교에서 교수연구실, 학과사무실 조교를 찾아가 자료를 받아 함께 공부했다. 그해 제주지역대학에서 40여 명이 동시 졸업하게 된 게 현 학우의 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한완상 당시 방송대 총장으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방송통신고부터 방송대 법학과까지 쉼 없이 8년을 달려왔는데, 그는 학사모를 벗자마자 다시 일본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밀레니엄에 접어들면서 제주도에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하자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던 것. 외환위기 이후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던 상황에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자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일본학과에서 왜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제강점기를 겪어야 했는지, 일본의 사회문화, 역사, 정치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됐다. 정진성 당시 일본학과 교수와 이영 교수의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다.

 

하지만 모친이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면서 학업을 병행하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서도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해야 했다. 동생들과 힘을 합쳐 병원비를 냈지만, 힘들었던 시기였다. 치매로 15년을 고생하시던 노모가 돌아가시고, 그는 몇 년간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2017년 그는 방송대로 다시 돌아와 일본학과를 졸업했다. 곧바로 중어중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특히나 힘들었던 어학 과목에서는 암기로 정면 돌파 했다. 한자 원문 아래 한글로 해석을 달아 달달 외웠지만 턱걸이로 통과. 대신 관심 있던 역사 관련 과목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2021년 네 번째 학과인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다. 호기심에 시작했던 법학, 필요로 공부한 일본어, 알고 싶어서 공부한 중국까지. 그런데 왜 사회복지학과였을까? 경쟁률도 높은 신생학과인데. 그는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고 답했다.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치매 환자가 있는 가족들을 더 이해하게 됐습니다. 치매 환자와 동반자살 하고 싶다는 가족들의 사례를 보며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것도 알게 됐고요. 70대 인 저는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회 불평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회의 평등, 조건의 평등이란 말 자체도 모르죠.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노력해서 직장을 찾아야지, 왜 국가에서 책임져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특히 제주라는 한정된 공간에 살다 보니 눈을 크게 뜨지도 못했겠죠. 사회복지라는 학문이 엊그제 태어난 학문은 아닌데 말이에요.”

 

‘자존감’ 지키기 위해 공부
어느덧 그의 긴 인생 이야기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공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오전 6시부터 8시 사이에 무조건 한 시간은 강의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유가 있는 주말에는 강의 5개를 몰아서 보기도 한다. 1.4배속이 딱 그에게 적당한 속도다. 너무 느리면 ‘졸려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

 

그에게 공부는 ‘자존감’이다. 책임질 것들은 많은데 가진 것이 없는 집에 태어난 그는 오랜 세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내지 못하며 위축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방송대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의 모습이 나아졌다고 느낀다. 이제는 남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고 싶다.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입고 다니면 떳떳하다고 느끼게 됐다.

 

올해로 일흔 넷인 현 학우는 지금도 어린 학우들에게 꼬박꼬박 존대한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에서부터다. 함께 공부했던 동기, 선배들로부터 배운 것처럼 모임이 있으면 총무에게 몰래 밥값도 종종 쥐어준다. 후배들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일흔 넘은 나도 할 수 있는데 너는 당연히 할 수 있지’라고 말해준다. 개인택시를 하면서도 블로그를 만들어 법학과, 일본학과, 중어중문학과,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했던 내용, 과제물에 참조할 자료를 모두 올렸다. 혹시라도 학우들에게 도움이 될까 봐서다. 매일매일 좋은 글귀도 잊지 않고 올린다.

 

“방송대는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대학입니다. 고교 졸업장이 없다는 회사의 지적을 받을 때는 구시렁대면서 방송통신고를 다녔는데, 졸업하고 방송대에 와 보니, 외국어뿐 아니라 여러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동료들을 도울 수도 있었고, 외국인 손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죠.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해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한 학기에 서너 과목만 들으면서, 80대까지는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제주=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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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gle***
    우와!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게을러지는 자신을 다시 추켜 세워봅니다. 감사해요!
    2023-04-15 23:23:19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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