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지진과 나눔을 경험한 어린 시절
캘리포니아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대형 놋 침대에 혼자 남겨진 소녀가 있었다. 침대는 매끈한 마룻바닥 위에서 미끄럼을 탔다. 집은 바다 위의 배처럼 흔들렸고 집 뒤편 커다란 물탱크에서는 지붕 꼭대기까지 물이 솟아올랐다. 부모님은 엉겁결에 몸을 피하며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갔고 공교롭게도 소녀 혼자만 집에 남아 있었다. 지진이 휩쓸고 간 집은 난장판이었다. 깨어져 바닥에 뒹구는 접시며 쏟아져 내린 책들, 떨어진 전등 장식, 굴뚝은 무너졌고 집 전체는 금이 갔다.
남겨진 소녀는 생각했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잠시 후 해안 건너편에서 지진으로 화재를 만난 이재민들이 배를 타고 오클랜드로 몰려왔다. 경마장에는 이재민을 위한 천막이 가설됐고 소녀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주민들과 나눴다. 어릴 적 지진과 나눔의 기쁨은 소녀의 인생 전체를 관통했다.
이 소녀의 이름은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 인생의 지진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녀는 스스로 쓰러져 땅 위에 누운 나무토막으로 살았다.

 


“모든 가정은 그리스도를 위한 방을 가져야 한다.

당신의 옷장에 걸려있는 외투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만일 이웃이 굶주리면 즉시 먹여야 한다.

국가 기관이나 자선 기관으로 달려가면 안 된다.

당신 자신이 즉각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 도로시 데이 지음, 김동완 옮김, 『고백』‘해설의 글’ 중에서


독립심과 가난, 그리고 독서
도로시 데이는 뉴욕 브루클린 배스비치에서 1897년 11월 8일에 태어났다. 신문기자인 아버지 존 데이와 어머니 그레이스 사이에서 오빠 둘과 여동생을 두었다. 지진으로 인쇄소가 불타고 아버지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 시카고로 이주했다. 미시간의 호숫가 빈민 아파트에서 도로시 데이는 가난을 경험했다.
지하 공동 빨래터에서 여섯 식구의 빨래를 해야 했던 어머니는 가난과 노동에 지쳐 연이어 네 번의 유산을 했고, 큰 딸인 도로시는 집안일을 열심히 도왔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인터오션〉지의 스포츠 주간으로 자리를 잡고 노스 사이드의 주택으로 이사했다. 경제적 안정과 함께 늦둥이 여동생이 태어났고, 14세의 큰 언니인 도로시는 갓난아기 동생을 전적으로 키우고 돌보면서 일찌감치 모성과 사랑을 느꼈다. 도로시는 조숙해졌고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문사가 주관한 시험에 합격해 입학금과 수업료를 장학금으로 받게 된 도로시는 일리노이대에 입학한다. 아버지의 신문사가 마침 그해에 도산했으니 장학생이 된 것은 행운이었다. 17세에 집을 떠나 독립한 그녀는 교수댁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등 닥치는 대로 노동했다. 글쓰기 모임에 가입해 처음으로 제출한 글이 ‘굶주림’에 관한 글이었으니 그녀의 독립심과 가난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다. 그때 도로시는 세계의 명작들에 심취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을 비롯해 고리키와 톨스토이도 읽었다. 독서는 그녀의 일이었다.
 
햇빛과 비와 폭우 사이에서
독립한 대학생 시절, 아버지가 뉴욕 〈모닝 텔레그래프〉에서 일하게 돼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됐고, 도로시도 대학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뉴욕에서 사회주의 계열 일간지 〈콜(Call)〉에 취직해 다시 독립해, 춥고 벼룩이 들끓고 악취가 심한 아파트에서 파업, 시위, 평화 촉구 집회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치열한 기자로 활동했다. 〈대중(The Masses)〉지로 옮겨 활동하다가 〈대중〉지 출판 탄압 이후 워싱턴에 가서 여성참정권론자 단체의 연합 시위에도 참가했다. 이 시위로 그녀는 처음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고 단식투쟁도 경험했다. 언론인과 사회운동가로서 도로시의 인생 초반은 공산주의 혁명과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브루클린 킹스 카운티 병원의 간호 실습생으로 1년간 일한 경험도 있다. 그곳에서 죽음과 질병 앞에 선 사람들의 생생한 고통을 목도했다.
도로시가 부부로 만나 사랑하며 지낸 남성은 영국인 혈통의 생물학자이며 아나키스트인 포스터 배터햄이었다.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는 그를 통해 도로시는 창조주 신의 곁에 다가서게 된다. 몇 명의 남성을 만나 낙태도 경험했던 도로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체념했는데, 포스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된다. 하지만 포스터는 당시 세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세상으로 아이를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즈음 도로시는 가톨릭 신앙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는데, 포스터는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태어난 딸에게 도로시는 다말 테레사라는 이름을 주었다. 다말은 ‘작은 종려나무’란 의미였고 테레사는 도로시가 롤 모델로 삼은 가톨릭 성녀였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도로시의 결혼생활은 휘청거렸다. 포스터는 다말을 사랑했지만 다말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극도로 싫어했다. 결국 도로시가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결혼생활은 끝났다.


대가족을 품은 나무토막이 되어
도로시는 사랑하는 남자뿐 아니라 급진운동가로서의 삶도 떠나보냈다. 그녀는 교회 자체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안의 ‘그리스도의 삶’을 사랑했다. 신념에 따라 도로시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으로 들어갔다. 1927년 12월 28일의 일이다. 도로시는 천성적으로 세상을 긍정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였다. 그 안에서 남성과의 아늑한 사랑도 가능했다. 포스터와 헤어지기 이전의 삶은 하늘과 햇빛을 향해 줄기와 가지를 올리는 시간이었다 할 수 있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따뜻하게 식물적 삶을 살았다.
포스터와 헤어져 독실한 가톨릭 교인이 된 그녀는 매우 중요한 인물을 만나고, 이후로 자신의 둥치를 스스로 잘라 땅에 누이고 갈 곳 없는 생명을 보듬어 키웠다. 그 시작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 애버뉴에서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을 취재하고 기사를 올린 후 눈물과 고통으로 특별한 기도를 했다. ‘보잘것없는 재주이오나 우리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길을 열어달라’는 기도였다. 응답은 아주 빨랐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린 것은 특별한 인물, 프랑스인 농부 피터 모린이었다. 1909년 자작농 노동자로 캐나다에 들어온 그는 1911년에 미국에 들어왔다. 50대 중반의 피터는 그날그날 노동으로 벌어먹는 사람이었으며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굶거나 옷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그녀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신문 창간을 제안했고, 1933년 5월 1일에 대공황의 진원지 뉴욕의 한복판에서 〈가톨릭 노동자(The Catholic Worker)〉 창간호 2천500부가 첫선을 보였다.
피터는 도로시에게 공동체를 제시했고, 도로시의 초라한 아파트가 최초의 ‘환대의 집’이 됐다. 이 집은 유리하는 빈민을 형제자매로 맞아들이고 굶주린 자를 먹이는 곳이었다.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줄이어 찾아왔고, 수년 내에 전국에 33개의 가톨릭 노동자들의 집과 농장들이 생겨났다.
〈가톨릭 노동자〉 신문은 서너 달 만에 2만5천 부를 발행했고, 기차 안, 여인숙, 광산의 갱도는 물론이고 로마, 멕시코 등지에까지 무섭게 퍼져나갔다. 피터는 육체노동을 찬양했고 노동의 철학을 지지했다. 농업공동체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봉사자들은 기꺼이 즐겁게 신문을 팔았다. 그러면서 길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우정을 쌓아 나갔다. 피터와 도로시가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 쫓겨난 자들, 착취당하는 이들이었다. 가난과 극빈에 처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불쌍히 여겨 택하신 이들로 존중했다.
피터 모린이 1949년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도로시 데이는 1950년대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섰으며, 인종차별철폐운동에 헌신했다. 살아있는 나무는 많은 생명을 키운다. 하지만 죽은 나무가 더 거대한 생명 종들을 살린다. 피터를 만난 후 도로시는 스스로를 땅에 눕힌 나무가 되어 엄청나게 많은 생명을 보듬어 길러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산 도로시는 1980년 11월 29일 소천했다. 그녀는 온전히 대지로 돌아갔다.
도로시의 롤 모델이었던 마더 테레사는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그렇게도 많은 사랑과 희생을 바친 도로시 데이는, 예수라는 포도덩굴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가지였다”라고 평가했다. 가톨릭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도 그녀를 가리켜 “인간의 깨어진 상태를 가장 극심하게 드러내는 자들과의 긍휼에 근거한 연대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김회권 장로교 목사도 “도로시 데이는 오늘날 한국의 복음주의 청년들이 추구하는방송대 농학과에 재학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식물처럼 살기』,『유학과 사회생물학』,『식물에서 길을 찾다』등의 책을 썼다. 사회선교사의 모범이다”라고 그를 기렸다.


참고문헌
- 짐 포리스트 지음, 유영난 옮김,『도로시 데이 전기, 잣대는 사랑』, 분도출판사. 1991.
- 도로시 데이 지음, 김동완 옮김,『고백』, 복있는 사람, 2010.
- 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환대하는 삶』, 낮은 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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