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질병과 세계사

“아! 차라리 지진이었으면! 지진은 한번 크게 흔들리면 더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수만 세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이 지긋지긋한 병은 말이죠! 걸리지 않은 사람까지도 마음을 감염시킨다니까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페스트(La Peste)』(1947)의 한 구절이다. ‘지진보다 지독한’ 감염병의 본질을 역사상 페스트만큼 완벽히 구현한 질병도 없을 것이다. ‘역병’을 뜻하는 라틴어 ‘pestis’가 ‘페스트’라는 특정 질병을 가리키게 됐듯이, 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단속적으로 유행한 페스트는 유럽 문화에 하나의 ‘트라우마’로 각인됐다. 적어도 기록상으로 페스트의 유행을 겪은 바 없는 한국에서도 페스트는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돼왔다.중세에는 흑사병과 더불어 ‘암흑기’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 있지만, 불안을 극복한 인류가 근대의 ‘광명’을 잉태한 시대이기도 하다. 중세 유렵의 흑사병은 오히려 인류가 감염병과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세 차례의 페스트 팬데믹페스트는 중국에서 기원해 실크로드를 통해 유라시아대륙 전체로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최소한 기원전 3000년경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역사상 크게 세 차례의 팬데믹을 일으켰다. 541년 이집트의 펠루시움에서 시작된 제1차 페스트 팬데믹(‘유스티니아누스역병’)은 542년에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에 상륙해 프랑스와 영국 등지로 퍼졌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의 약 20∼40%, 지중해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이 희생될 정도로 동로마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페스트 유행의 흔적이 나타난다. 8세기 중반 이후의 오랜 침묵을 깬 페스트는 13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또다시 등장해 북유럽과 러시아를 포함한 전 유럽을 강타하며 1350년대 초까지 맹위를 떨쳤는데, 이것이 좁은 의미로 ‘흑사병’이라 불리는 제2차 페스트 팬데믹이었다. 이처럼 중세 유럽은 페스트 팬데믹의 주요 무대였다. 페스트는 이후 18세기까지 유럽을 반복적으로 괴롭히다가 다시 19세기 중반에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제3차 페스트 팬데믹을 일으켰는데, 이때 처음으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라는 병원체가 드러나게 된다. 페스트는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벼룩이나 (폐페스트의 경우) 인간의 비말을 통해 전염되는 것이다.역병의 창궐, 공동묘지로 변한 도시들세 차례의 페스트 팬데믹 모두 인류의 ‘대량 학살’을 초래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인명을 희생시킨 것은 단연 제2차 페스트 팬데믹이었다. 유럽에서만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3천만 명, 전 세계적으로 약 7천500만∼2억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공할 역병의 직접적인 기원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여겨진다. 13세기 초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영토 확장과 함께 페스트균이 다양화했고, 1330년대 중앙아시아의 페스트 유행을 계기로 1340년대 유럽에 흑사병 창궐이 시작된 것이다. 현 키르기스스탄 이식쿨(Issyk-Kul)호 근방 묘지에는 1338∼1339년에 ‘역병’으로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데, 최근 유골의 DNA 분석을 통해 그 ‘역병’이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원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흑사병이 13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시칠리아에 상륙한 것은 교역물인 모피에 붙어 있던 벼룩이 매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페스트는 겨드랑이와 샅 등에 가래톳이 돋는 선페스트(가래톳페스트)가 주류였지만, 합병증으로서 피부 내출혈로 검은 반점을 동반하는 패혈증페스트(패혈성페스트)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불리게 됐다. 치명률은 30∼75%에 달했다. 시칠리아에 유입된 흑사병은 이듬해부터 지중해 세계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하며 수많은 도시를 ‘공동묘지’로 변모시켰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넘치는 시체를 ‘라자냐’처럼 겹겹이 쌓아 묻어야 했고, 시에나에서는 들개가 잘 묻히지 않은 시체를 끌어내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참상을 앞에 두고 일부는 쾌락과 방종에 빠지거나 폭력과 약탈을 일삼았고, 다른 일부는 흑사병을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여겨 극도의 금욕과 속죄 행위에 몸을 맡겼다.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며 피투성이로 여러 마을을 누빈 ‘고행자’가 유럽 곳곳에 출현하기도 했다.대응, 점성술에서 공공적인 대책으로당대 의학자가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주로 점성술에 기초한 천체의 운행과 대기의 오염이었다. 이를테면 파리대학교 의학부는 1345년에 목성과 화성이 지구에 대해 ‘합(合)’의 위치를 점한 것이 지구의 인류를 대량의 죽음으로 몰았다고 설명했다.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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