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을 정말 좋아합니다. 주변에 자란 잡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식물원이라면, 거기서 내내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화분에 키우기는 하지만 다섯 개뿐이고 그나마 셋은 전혀 돌볼 필요가 없는 다육식물입니다. 이들은 십 년 이상, 우리 집에 있습니다. 그밖에 20년 이상 된 부겐빌리아와 10년 정도 된 호접란이 있습니다. 모두 이미 가족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몇 개나 되는 화분을 말려버렸습니다. 지금도 재작년에 말라버린 만데빌라와 서양국화가 그대로 방치돼 있습니다. 모두 키우기 쉽다고 하는 것들이지만 나는 곧잘 말려버리곤 합니다.
식물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내가 사숙하는 식물 마니아,
작가이자 멀티 탤런트의 소유자인 이토 세이코는 “식물은 말려도 좋은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토 상의 집에는 대량의 화분이 놓여 있지만 그중 상당수가 말라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시인 이토 히로미(이분도 열렬한 식물애호가)는 ‘시신이 산더미’라고 표현했습니다.
식물은 말라도 된다. 이것은 냉혹한 태도일까요? 목숨을 경시하는 것이 되는 걸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르면 마른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말라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식물도 인간도 생물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존재입니다. 돌과 같은 무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섭취하고 그 에너지로 자율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는 존재이지요. 돌은 아무것도 먹지 않지만, 생물은 먹자마자 빛으로 광합성을 하고 밖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돌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돌이지만, 생물은 에너지 섭취를 그만두면 생물이 아니게 됩니다.
생물이 생물이 아니게 되는 그 변화를 인간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체가 아니게 되는 것이 ‘죽음’이라면 식물이 마르는 것도 ‘죽음’의 일종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죽음’과 ‘시드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식물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지만, 내가 긴 시간에 걸쳐 『식물기』라는 소설집을 쓰면서 내린 결론은 ‘인간에게는 뇌와 심장이 있지만, 식물에는 뇌와 심장이 없다’입니다.
뇌와 심장이 있고 없음에 따라 생물은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요. 아주 간단히 말하면 뇌와 심장이 있으면, ‘개체’가 이뤄집니다. 미생물이나 균류, 식물 중에는 분열해 증식하는 것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뇌와 심장이 없습니다. 뇌와 심장을 가진 생물은 분열해 증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개체입니다. 한 개의 뇌와 심장이 관할하는 범위가 하나의 개체인 생물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뇌와 심장이 멈추는 것입니다. 개체가 생물이 아니게 되는 ‘죽음’인 것이지요.
뇌도 심장도 갖지 않고,
개체의 범위조차 확실하지 않은 것이 식물입니다.
마른 식물의 입장에서는 죽음이라 생각하려면
맘대로 해라, 하지만 그것은 너희들의 문제잖아?
하는 느낌인 거죠.
뇌와 심장, 개체와 죽음
식물의 경우, 뇌와 심장은 없기 때문에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이 없습니다.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는 그 환경에 따라 우연히 여기저기 가지나 잎이나 뿌리나 꽃으로 배분됩니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뿌리를 통해 이웃 식물에게 양분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뇌를 가지지 않은 이상, 이들은 어디에서도 지시받는 일 없이, 환경에 따라 자동적으로 되어갑니다. 복잡한 조건 반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동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면, 예를 들어 물고기도 자동적으로 먹이를 취하고 자동적으로 번식하고, 자동적으로 적에게서 도망치지요. 거기에 물고기의 개체적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한 마리의 멸치만 다른 멸치와 달리 보통 먹지 않는 먹이를 먹어보려 한다든가, 번식기가 아닌 때에 번식을 시도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습니다.
뇌를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자동처리를 하는 프로그램밖에 인스톨돼 있지 않고, 프로그램 외의 행동은 하지 않으며, 스스로 프로그램을 바꿀 수도 없지요. 그것을 인간은 ‘본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동화된 프로그램을 점점 업그레이드하면서 여타 동물과는 다른 존재가 됐습니다. 인간의 프로그램은 개체 레벨에서도 스스로 교체하는 게 가능합니다. 이 가변성을 인간은 ‘의사(疑似)라고 부릅니다.
뇌에는 원래 자동화된 프로그램이 있고, 인간은 그에 묶여있어 그 프로그램을 ‘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프로그램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점차 개체마다 ‘의사’의 영역이 커지고 중요해진 것이 인간 ‘진화’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동화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바뀜으로써 ‘개인’의 개념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심장과 뇌가 총괄하는 범위가 하나의 개체가 된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아무리 상대의 생각을 알고 싶어도 자신의 뇌는 다른 사람의 뇌에 연결될 수 없고, 눈앞에 있는 사람의 피가 순환하지 않고 멈출 것 같다 해서 내 심장을 연결해 피의 순환을 돕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습니다. 심장과 뇌가 기능하는 범위가 하나의 개체를 만듭니다.
하지만 자동화 프로그램밖에 인스톨되지 않은 뇌를 가진 생물은 개체이더라도 ‘의사’가 없습니다. ‘의사’가 없기 때문에 ‘나는 멸치이며 멸치 가운데 한 마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은 뇌의 프로그램이 교체를 거듭하면서 개체마다 프로그램의 내용이 미묘하게 달라져 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완전히 같은 프로그램을 인스톨하면 ‘개체’라 하더라도 ‘자신’이라는 인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자기 인식과 의인화 행위
그리하여 ‘자기’를 인식하게 된 순간, 인간 개체는 멸치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다른 개체와 구분되는 ‘개인’입니다. 멸치의 ‘개체’가 무리 중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 데 비해, 인간의 ‘개인’은 군상 속 한 사람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다름 아닌 ‘나’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기본 단위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본적 인권’의 탄생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을 가집니다. 완전히 같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가치를 가지며 그 다름에는 우열이 없고, 어떤 사람에게라도 같은 무게의 가치가 주어집니다. 그러한 개인이 모여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한 개체의 뇌와 심장이 활동을 그만두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개인의 ‘죽음’이며, 상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런 생각, 가치관을 만든 순간, 지구의 생명계 전체를 인간의 방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자동화된 프로그램 속에 살아가는 동물에게도, 뇌와 심장을 갖지 않은 식물에도 인간의 가치관을 적용해 생과 사의 의미를 붙여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식물이나 동물을 인간인 듯이 보는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을 ‘의인화’라고 합니다. 애니메이션이라든가 동물의 캐릭터가 인간처럼 말을 하고, 울거나 웃거나 하는 것만 의인화가 아닙니다. 인간의 세계관으로 우주 삼라만상을 해석하는 것 자체가 모두 의인화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의인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뇌도 심장도 갖지 않고, 개체의 범위조차 확실하지 않은 것이 식물입니다. 여기에 ‘개체’나 ‘개인’의 기능 정지를 감상적이고 네거티브하게 받아들이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킨다 한들,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마른 식물의 입장에서는 죽음이라 생각하려면 맘대로 해라, 하지만 그것은 너희들(인간)의 문제잖아? 하는 느낌인 거죠. 앗차, 해 버렸네요! 나도 결국 의인화를 해버렸습니다.
이제 막 발간된 한국어판 소설집 『식물기』(김석희 옮김, 도서출판 그물코)에는 이런 생각들을 담았습니다.
번역 김석희 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