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우리는 몸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체험한 공포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무엇이 차별인가 하는 것은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알게 되었지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무엇이었던가를 분명하게 말하라면 착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경험한 굶주림과의 투쟁을 일일이 이야기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괴롭히는 그 억압자들에 대한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리고베르타 멘츄』(리고베르타 멘츄 구술·엘리자베스 부르고스 정리, 윤연모 옮김, 장백, 1993) 중에서


국제사회는 1992년을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의 해로 기념하려 했으나

리고베르타는 1989년부터 적극 반대활동을 벌였다.

침략자의 관점에서는 ‘발견’됐을지 몰라도

그 땅의 주민에게는 ‘정복과 침략’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리고베르타의 투쟁은 승리해
1994년 유엔은 ‘국제 원주민의 날’을 제정했다.

 

 

과테말라 노벨평화상 수상자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과테말라의 한 여성이었다. 35세의 그녀는 양 갈래로 묶은 긴 검은 머리에 초록 바탕에 원색의 물결무늬와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 마야 원주민 의상을 입고 있었다. 갈색의 둥근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서 가장 도드라진 것은 동그랗게 큰 눈이었다. 그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말하는 듯했다. 수상 연설을 하러 연단에 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과테말라에서 식민시대뿐 아니라 독립 이후 공화정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무시되고 멸시받아온 원주민들의 정서와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민생활의 모든 측면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도록 기여하는 원주민들의 독특한 정체성이 없다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과테말라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원주민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보존하는 것이 과테말라뿐 아니라 세계가 함께 추구할 평화의 길임을 강조했다. 이 젊은 여성은 리고베르타 멘츄 툼(Rigoberta Menchu Tum, 1959~ )이다. 1983년 23세의 나이에 출간된 구술자서전 『나, 리고베르타 멘츄(I, Rigoberta Menchu: An Indian Woman in Guatemala)』로 세계인들은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리고베르타는 과테말라 북서부 산악지대 마야문명의 발상지인 우스판탄 마을에서 족장인 아버지 비센테 멘츄와 어머니 후아나 툼 데 멘츄 사이에서 태어났다. 족장인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어머니는 산파로 많은 사람들을 돕고 품어주었다. 리고베르타의 가족은 라디노(ladino)가 마을에 몰려오면서 고향에서 쫓겨나게 됐다. 라디노란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를 뜻하며 이들은 정복자의 편에 서서 원주민인 인디헤나를 동물처럼 취급하고 멸시했다.
리고베르타는 지주와 군부의 비인도적인 착취와 탄압을 겪으며 성장했다. 8세 때부터 커피농장에서 커피를 수확했고, 12세까지는 목화와 사탕수수를 땄다. 그 사이 겨우 두 살배기였던 남동생이 영양실조로 사망했는데 지주는 가족들이 아이를 매장하느라 하루를 쉬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해고했다. 이웃에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과테말라 원주민은 각각 22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어린 리고베르타는 스페인어를 습득할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도시로 향해 수도 과테말라시티의 부잣집에서 하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온갖 착취와 부당한 대우,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 출처=menchutum.com

부당한 탄압과 착취 속에서
결국 8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데, 13세 소녀가 만난 현실은 아버지의 구금과 18년형 선고였다. 지주들은 정부와 한통속이 돼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았고 리고베르타의 가족들도 1967년부터 집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주들에 맞서 22년간 물러서지 않고 투쟁했다. 가족들의 노력으로 아버지는 14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다시금 지주의 경비병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폭행을 당했어도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치료하지 말도록 지주들이 라디노 의사들을 매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주들의 만행은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75년에 16세의 리고베르타는 친구 페토로오나의 시체와 마주했다. 페토로오나는 세 살짜리 딸과 두 살짜리 아들을 둔 미모의 유부녀였는데, 지주 아들의 끈질긴 구애를 거절하다가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소작인인 그들 부부는 농장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없는 시간에 지주의 아들이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언쟁이 벌어졌고 지주의 아들은 농장의 경비원들에게 페토로오나를 손도끼로 토막 내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경비원들은 그녀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 바람에 엄마에게 안겨있던 아기의 손까지 떨어져 나갔다. 원주민 인디헤나들은 이처럼 동물 취급을 받으며 살아갔다.
다시금 투옥됐던 리고베르타의 아버지는 1977년에 석방돼 UCC(농민통일위원회)에 참가하게 되고 아버지, 어머니와 전 가족이 농민해방운동에 뛰어들어 과테말라의 소수 백인과 그 하수인 라디노에 대항해 원주민의 토지복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2년 후 농민통일위원회 서기로 일하던 16세의 남동생이 동료의 밀고로 군부에 잡혀가고 16일간의 처참한 고문 끝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져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이듬해인 1980년에는 아버지가 주과테말라 스페인 대사관 점거시위 도중 화재로 사망했다.
리고베르타 가족 전원은 착취와 부당함에 항의하고 이를 바로잡는 농민운동을 하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각자가 심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남편의 희생을 보면서 점점 더 강한 투사가 된 어머니는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돼줬다. 어머니를 노리는 군부의 감시와 추적이 심해지자 동료들은 어머니의 망명을 권했다. 하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던 어머니는 동지들의 먹을 것을 조달하러 시장에 나갔다가 같은 해 4월에 곧바로 체포됐다.
수차례의 성폭행과 잔혹한 고문 속에 던져진 어머니는 양쪽 귀가 도려지고 온몸이 상처로 곪고 썩어 단시일에 반죽음 상태가 됐다. 군부는 어머니를 미끼로 가족을 모두 소탕하려고 그녀의 옷을 우스판탄 시청 앞에 내다 걸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자 다 죽게 된 어머니를 산속에 내다 버렸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어머니의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었고 며칠이 지나 이윽고 숨이 끊겼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군인들은 유해 한 조각도 찾아가지 못하도록 곁을 지켰고, 어머니의 시신은 들개와 독수리의 먹이가 됐다. 4개월 후에 산짐승들이 시체를 몽땅 먹어 치워 뼈 한 조각도 남지 않을 때까지 군인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경계를 넘어 세상의 발자취가 되다
리고베르타는 과테말라시티의 한 수녀원에 피신했고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익혔다. 그녀는 1981년에 멕시코로 망명하고 사무엘 루이스 가르시아 주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과테말라 원주민의 참담한 실상을 폭로하는 일을 시작했다. 1982년 1월 파리 국제회의에 참석한 리고베르타는 그곳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부르고스(Elizabeth Burgos)를 만났다. 이 운명적인 만남에서 엘리자베스는 리고베르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1주일간 그녀의 서투른 스페인어 회고담을 16개의 테이프에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의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책의 이름은 『나, 리고베르타 멘츄』다. 이 책은 1992년 리고베르타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그루터기가 됐다.
리고베르타는 1991년 유엔 원주민 권리선언 준비 작업에 동참했고, 노벨상 상금으로 ‘비센테 멘츄 툼’재단을 만들었다. 1994년에는 조국으로 귀환했고 이듬해인 1995년에 전국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제약회사를 만들었고, 1999년에는 두 번째 저서 『리고베르타, 마야의 자손』을 집필했다. 그녀의 두 번째 책은 경계를 넘어 마야 원주민의 문화적 상징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촉구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1992년을 아메리카의 발견 500주년의 해로 기념하려 했으나 리고베르타는 1989년부터 적극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 침략자의 관점에서 아메리카는 ‘발견’됐을지 몰라도 그 땅의 주민 처지에서는 ‘정복과 침략’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리고베르타의 투쟁은 승리해, 1994년 유엔은 ‘국제 원주민의 날’을 제정했고 그녀는 친선대사로 활동했다. 그녀는 원주민 정당을 만들었고 비록 3.1%의 득표에 그쳤지만 2007년에는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그녀는 1983년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인디헤나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질경이는 양지바른 길방송대 농학과에 재학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식물처럼 살기』,『유학과 사회생물학』,『식물에서 길을 찾다』등의 책을 썼다. 가나 들판에서 자라지만, 차와 사람이 빈번하게 다니는 길에서도 살아남는 끈질긴 잡초다. 줄기가 없는 질경이는 타원 모양의 잎이 뿌리에서 곧바로 나와 여러 겹으로 비스듬히 갈라지며 퍼진다. 질경이는 약초다. 봄과 여름에는 어린순을 먹고, 말린 씨는 이뇨와 지사 작용과 간 기능 회복에 효과가 있다. 햇빛을 마음껏 받으며 자라는 이 식물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리고베르타 멘츄 툼이 그랬다.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서 꿋꿋이 살아낸 마야의 딸은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고, 질경이의 꽃말인 경계를 넘는 ‘발자취’를 남겼다.

참고문헌
- 리고베르타 멘츄 구술, 엘리자베스 부르고스 정리, 윤연모 옮김, 『리고베르타 멘츄』, 장백, 1993.
- 박현주·신명철 지음, 『여성 평화와 인권을 외치다』, 낮은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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