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질병과 세계사

2007년, 스페인의 텔레비전 방송국 ‘안테나 3’은 여론조사를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추렸다.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추앙받은 당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1938~)와 『돈키호테』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에 이어 3위를 차지한 인물은 크리스토발 콜론, 속칭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였다. 제노바공화국(현 이탈리아) 출신인 그가 ‘위대한 스페인인’에 선정된 것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1451~1504)의 후원을 받아 스페인에 본거지를 두고 신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여느 탐험가와 달리 서쪽으로 출항해 대서양을 횡단한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그가 인도라고 착각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에 도달했다. 4차례의 항해를 통해 그가 남긴 업적은 단지 유라시아에 알려지지 않았던 신대륙을 ‘발견’한 데 그치지 않는다. 약 2만~1만5천 년 전 유라시아대륙의 몽골로이드 집단이 베링육교를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했는데, 그 후 빙하의 쇠퇴로 베링해협의 육로가 봉쇄돼 두 대륙 간의 왕래와 교류는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됐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 이래 이 두 대륙이 해로로 다시 연결됨으로써 지구사·인류사적 전환이 초래된 것이다.금과 은·작물 가져가고 학살·역병 뿌려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구대륙(아프로·유라시아)과 신대륙(남북아메리카) 사이에는 인적·물적·문화적·생물학적 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지게 되는데, 이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 부른다. 미국의 역사가 앨프리드 크로즈비(1931~2018)가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The Columbian Exchange: Biological and Cultural Consequences of 1492)』(1972)에서 내놓은 개념으로, 역사학 분야에서는 하나의 용어로 자리 잡았다. 지구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콜럼버스의 교환’의 중요성이 인식된 것이다.그러나 ‘콜럼버스의 교환’은 결코 등가교환이 아니었다. 고구마, 토마토, 호박, 땅콩, 고추, 카카오를 비롯한 신대륙의 여러 작물이 구대륙에 반입됐는데,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이 수천 년에 걸쳐 개량한 옥수수와 감자 등 재배식물은 유럽의 기근 극복과 인구 증가에 공헌한 바가 크다. 반면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넘어간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등의 작물과 소, 돼지, 말, 양 등의 가축은 기본적으로 소유주인 유럽인의 배를 불리는 것이었다. 신대륙에서 채굴된 금과 은이 고스란히 유럽인의 손에 들어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교환’의 장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학살과 역병이었다.‘원주민의 보호자’ 라스 카사스(1484~1566)에 따르면, 스페인인은 원주민에게서 금을 빼앗은 뒤 원주민을 큰 건물 안에 가득 채워 불을 질러 죽이거나 기분에 따라 원주민의 손과 코와 귀를 자르는 등 도륙과 학대를 일삼았다. 금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4~5천 명의 스페인인이 페루에 들이닥쳐 10년간 4백만 명 이상의 원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쿠바의 한 원주민이 수도사에게 화형당하기 전에 천국에 스페인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옥에서 악마와 지내는 편이 낫겠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스페인인의 만행으로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원주민 인구의 감소에는 역병의 영향이 더 컸다.두창(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말라리아, 백일해 등 10종류 이상의 감염병이 스페인인과 함께 신대륙에 반입돼 유행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두창의 맹위가 거셌다. 콜럼버스 일행의 방문 이후 두창은 10년간 히스파니올라섬의 인구를 10분의 1 이하로 감소시켰고,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등이 속한 대앤틸리스제도로 건너가 원주민을 사멸시켰다. 1520년대에서 1560년대에 걸쳐 현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브라질 지역에서도 두창이 크게 유행하며 수많은 원주민이 희생됐다. 수준 높은 문명과 군사력을 보유한 아스테카제국과 잉카제국도 두창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콜럼버스의 비등가 교환’은 언제든 현실 문제로 닥칠 수 있다. 인구의 9할을 잃은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비극은 케케묵은 전래동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또한 두창의 유행이 학살, 정복, 전쟁과 동반해 더욱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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