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독은 단기적으로는
그 어느 것보다 기능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어느 것보다
역기능적이다.
‘내가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계란프라이’라는 말이 있죠. 무언가 배우고, 능력을 키우며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때 이런 비유가 쓰이곤 합니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론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에선 주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흔들어 깨워 현실을 자각시켜야 하죠. 대표적인 예가 ‘중독’ 상태입니다.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 중독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의외로 운동, 주식, 카페인, 대인관계 등도 충분히 중독될 수 있습니다. 또 중독의 기준이 예상보다 낮아 ‘나는 괜찮겠지’ 싶다가 중독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주변에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이 있으신가요? 이번 커버스토리 ‘중독을 이기는 동맹’에서는 나를 돕고 가족을 돕는 중독 치료에 대해 소개합니다. 방송대 진로·심리상담실이 개최한 ‘중독심리 특강’(ZOOM 화상회의로 진행)에서 발표한 전영민 마음고요심리상담센터 원장의 강의를 정리했습니다.
김민선 기자 minsunkim@knou.ac.kr
가족·지인을 돕고 싶은 마음들
지난 5월 12, 19일 2회에 걸쳐 진행된 중독 심리 특강에는 매회 150명 이상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학우들이 참여했다. 학우들이 특강 참여 신청시 작성한 신청 동기를 보면 중독 분야 심리상담 자격증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외에도 본인이 중독자라거나 가족 중에 중독자가 있어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토로한 학우들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 증상이 심하다. 치료 의지도 없고 치료 거부도 심해 가족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특강을 통해 중독이 무엇이길래 가족들과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지 이해하고 싶다.”
“일상에서 매일 커피 마시는 습관, 소비 습관 등 자기 조절 능력을 배우고 싶다.”
“운동을 좋아해 몰입해 운동하곤 한다. 그런데 몸이 아플 때도 운동을 하는 게 아마도 중독 성향이 있는 것 같다. 몸매 관리에 대한 강박 때문인 것 같다.”
“요즘 우리 반 학생들의 휴대폰 중독 문제를 크게 실감하고 있다. 학생들이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방송대 학우들이 중독 심리 특강을 신청하며 밝힌 동기들이다. 이같은 수요를 바탕으로 강연자 전영민 원장은 중독심리 상담가에게 필요한 이론적 요소를 중심으로 강의를 준비했으며, 덧붙여 실생활에서 중독에 빠진 가족을 도울 방법을 함께 소개했다.
전 원장은 중독심리전문가로, 서울시 은평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사로 10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 더 오랜 기간 제대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새로운 중독 치료 체계를 구축하고자 알코올 중독 전문인 카프성모병원 설립 초기 치료팀장으로 합류했다. 이때 중독을 의사 관점에서 병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심리, 사회복지 등 다방면으로 접근해 치료팀을 꾸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였던 만큼 전 원장은 중독심리 분야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중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들 대부분의 인생 목표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중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쁜 결과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인간 기본 욕구상의 고통 회피·즐거움 추구와는 구별된다. 중독이란 개인이 해로운 결과를 인식함에도, 특정 물질(알코올, 약물)이나 행동(성행동, 게임, 도박)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상태로, 통제력 상실과 강박적 사용, 부정적 결과의 지속이 특징인 만성적이고 재발 가능성이 높은 뇌 질환으로 정의된다. 단기적으로는 그 어느 것보다 기능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어느 것보다 역기능적이다. 전 원장은 “도박은 중독되는데, 복권은 왜 중독이 안 될까? 사고 나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해서다”라며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기 조절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겼다.
의미 있는 고통
중독은 만성 재발 장애에 해당한다. 중독을 끊으면 ‘치료’됐다고 볼 순 있으나, 끊은 것을 유지함과 동시에 대인관계가 좋아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등 생활 자체가 바뀌기까지 했다면 ‘회복’ 단계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중독이 재발했다고 ‘실패’로 낙인찍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독 치료 과정에서 언제든 중독이 재발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도박 중독도 3년을 보고 치료한다. 만약 재발하더라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치료 과정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독 내담자를 다시 치료 과정으로 이끄는 것이 중독심리상담자와 가족의 역할이다.
또한 중독 치료 시 수반되는 ‘고통’을 피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중독 치료의 주요 전략이다. 중독자 본인이 인생을 바닥까지 쳐야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게 중독 치료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청소년 도박 문제에서 부모가 자녀의 ‘도박 빚을 갚아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 원장은 짚었다.
“학교에서 도박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을 징계한다. 그때 학부모는 아이가 자퇴까지 할까 봐 도박 빚을 갚아준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가 한 행동의 고통을 겪지 않고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한 행동의 문제점을 몸으로 느낄 기회가 없다. 상담실에 오더라도, 돈을 갚아준 아이는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로 온다. 근데 엄마는 옆에서 울면서 얘기한다. 이게 현실이다. 또 성인이 돼 도박을 하게 되면 판돈도 커지고 대출하는 규모도 커진다. 가족들이 빚을 갚아주면 은행 신용도 높아져서 더 큰 돈을 빌릴 수 있게 된다. 중독자 가족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어중간하게 돕지 말고 오히려 좀 놔야 할 때가 있다. 나도 상담할 때 사채업자가 치료해줄 거라고 얘기해준다.”
또한 전 원장은 주식과 코인도 투자가 아닌 도박스럽게 한다면 분명 중독이라는 점도 꼬집었다. 일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활이 무너져버리며 가족 관계도 안 좋아지는 점이 중독의 증거란 것이다.
동맹관계이면서 때론 지휘자처럼
중독 심리 특강 2회차에선 중독심리에 관한 다양한 상담기법 이론들이 소개됐다. 기본적으로 치료 과정 틀이 짜여진 인지행동치료가 보편적으로 쓰이나, 요즘은 내담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전 원장은 설명했다. 무엇보다 중독 내담자를 마주하는 상담자는 우호적인 치료 동맹관계를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중시하는 상담기법 중 하나가 ‘동기강화상담’이다. 내담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조금씩 다가가(라포 형성), 치료해야 하는 동기를 은연중 심어주는 방법이다. ‘너 왜 아직도 상태가 그래?’가 아니라 ‘그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겠네’라고 말하며 치료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야 내담자가 상담사를 믿고 따르도록 힘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상담사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 내담자를 긍정적인 변화로 이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전 원장은 당부했다. 내담자에게 변화가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빠르게 알아채고, 변화로 이끌 수 있는 단서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자녀 교육에도 적용된다고 그는 귀띔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을 다 변화시킬 수 없다. 다른 건강한 변화를 겪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학원만 보내려 하는데, 노는 것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자녀나 내담자나 자꾸 바깥에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도전하게 만드는 것. 이게 상담사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