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방송대를 처음 만나 머릿속에 각인된 날이기에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교편을 잡고 계신 아버지께서는 새벽이면 낡은 라디오를 켜시고 항상 낯선 한시들을 읊조리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당신의 필요에서인지, 배움의 목마름 때문인지 새벽녘이면 소반 위에 한자가 뒤섞인 어떤 책들이 놓이고,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매일 잠결 귓가에 들려왔다.
그날도 새벽녘…. ‘아 큰일 났구나, 세상이 바뀌겠구나’ 하는 아버님의 음성에 눈을 비비고 배시시 일어났다. 이제껏 무관심했던 소반 위의 책들을 보고 비로소 평소 보시던 책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게 방송대 교재였음을 알았다. 그게 필자와 방송대의 첫 인연이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필자의 어릴 적 꿈은 ‘교사’였다. 하지만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로서 손에 쥔 시험 점수로는 원하는 사범대 진학이 어려웠다. 이듬해 바로 바뀐 입시제도에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보고 군대 영장을 받았다. 입대하는 날 아버지께서 속으로 우시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하셨던 60대 중반의 아버지께서는 “막내를 대학 졸업시키지 못하고 군에 보내게 돼 마음이 몹시 슬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필자는 “제대 후 꼭 대학 졸업장을 아버지 손에 안겨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드렸다.
이후 군 복무 동기의 권유로 유공(현 SK지오센트릭)에 공채로 입사할 수 있었다. 입사하던 첫해, 미래의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와 미래의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해 바로 방송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7년 만의 졸업과 3년의 대학원 공부 끝에 어렵게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보수적인 아버지께서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방송대 졸업식에 비행기까지 타고 참석해 축하해주셨다. 부모님께 처음으로 효도를 한 것 같았고, 방송대와 인연을 맺은 이래 가장 감격스러웠던 때로 기억한다.
1994년 입학 때부터 학생회 임원을 지냈고, 졸업과 동시에 영문학과 동문회장(울산)으로 그리고 울산총동문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또 여러 동호회 회장 등을 도맡았다. 필자의 우선순위는 늘 방송대였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필자의 다이어리 여백의 대부분은 당시부터 맺었던 방송대 선후배, 동료들과의 인연으로 빼곡하다. 각별한 능력으로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우수한 동문과 만나면서 필자도 동반 성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울산총동문회는 오랜 침체기가 있었고 많은 분들의 희생과 협력으로 이제 터널을 벗어나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다. 동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책임을 의식하면 어깨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도는 간단하다. 비록 거창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꿈꾸는 그런 동문회를 그려본다. 기존 학과 동문회 활성화와 새로 생겨나는 학과 동문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지원군이 되기를 자처하고자 한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과 여러 속사정으로 몇 년간 하지 못했던 총동문회 주관의 대통합 화합 한마당 행사 등을 계획해 다시 한 번 울산총동문회가 비상할 수 있는 초석이 되는 원년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해보고자 한다.
얼마 전 전국 최초로 울산에 구축된 AI데이터센터처럼 전국총동문회 및 각 지역 동문회와 진일보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스마트하고 중추적인 지역 동문회로 도약하는 그날을 꿈꿔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