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이 우리에게 심어준 장밋빛 환상 중 하나는 그것이 지식을 ‘민주화’할 것이라는 기대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덕분에『걸리버 여행기』를 읽기 위해 오프라인 도서관에 갈 필요가 없다. 위키피디아에 접속하면 두껍고 비싼 참고 서적을 구매하지 않고도 그리스-로마 신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인물들에 대해 배울 수 있다. MOOC 덕분에 하버드대학교 컴퓨터 과학자에게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위해 합격 통지서가 필요하지도 않게 됐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집적체인 스마트폰 등이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 바로 이런 디지털 기술이 ‘인지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스크롤과 짧은 동영상이 장문 읽기를 대체하고, 알림과 탭이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그 결과 ‘심층적 문해력’을 통한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 능력이 사치품이 되어 가고 있다. 시간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만이 의식적이고 단호하게 고도의 문해력을 우선순위에 두고 양질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다. 명품 자동차, 시계, 가방, 목걸이 등과 같이 생각이 최신의 사치재(the newest luxury good)로 변모하고 있다는 말이다. 비교적 소수의 사람이 집중력과 장문 추론 능력을 유지하고 의도적으로 그 능력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근원은 생각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생각의 결과라는 말이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소달구지의 수레바퀴가
소를 따라오듯이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일반 대중이 사실상 문해력을 상실하고 있다. 족보(族譜)를 족발 보쌈 세트로 알거나, 사건의 시발점(始發點)이란 말에 ‘선생님 왜 욕해요’라고 하더라는 엉뚱한 상황이 연출된다. 체험학습 일정에 ‘중식’이 적힌 것을 보고 오늘 자장면 먹느냐고 했다는 요즘 초등학생 학부모의 문해력에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하긴 국어사전의 중식(中食)은 점심에 끼니로 먹는 밥과 중국식 음식을 의미하지만, 문맥을 생각하면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내비게이션이 길 찾는 능력을 지운 것처럼 책을 요약 정리해 주는 인공지능은 독서와 사색의 기능을 약화하고, 검색과 구매 데이터 기반의 추천 시스템은 사고와 소비 취향을 제한한다. 구글맵이 없던 시절, 길을 잃어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우연히 맛집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런 것들이다. ‘뜻밖에 우연히’라는 말은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스물여덟에 본(Bonn) 대학교 철학과 석좌 교수에 오른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생각이란 무엇인가』(열린책들, 2021)란 책에서 우리의 생각이 시각, 청각, 촉각, 미각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감각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색깔은 시각으로, 소리는 청각으로 접근하듯 생각은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감각, 곧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감각이다. 즉 생각하기는 우리와 실재 사이의 인터페이스다. 우리는 생각하면서 모종의 실재를 더듬는데, 그 실재는 궁극적으로 오직 생각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우리의 생각이라는 감각은 진화의 산물이며, 우리의 개념은 역사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은 디지털 기술로 대체될 수 없다고 본다.
인공지능은 논리 법칙에 기초하는 알고리즘으로 인간 지능의 일부 특성을 모형화한 제작물일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입력한 데이터와 정보를 기반으로 무조건(!) 답을 만들어 제시한다. 세종대왕의 어머니는 누군지 알아맞히지만, 원경왕후의 아들이 세종이라는 건 모르고 엉뚱한 왕을 거론하는 ‘역전 저주(reverse curse)’ 현상을 드러낸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추론 능력 수준에 도달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른다.
퀴즈다. “방망이와 공을 합친 가격은 1만 5천 원이다. 방망이의 가격이 공의 가격보다 1만 원 더 비싸다. 그렇다면 공의 가격은 얼마인가?” 직관적으로 5천 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의 가격이 5천 원이면 공+방망이 가격=2만 원이 된다. 따라서 정답은 2천5백 원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그럴듯한 대답이 즉시 떠오르지만, 애써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적 나태를 극복하려면 더 지적으로 적극적이어서 피상적인 대답에 만족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직관을 자주 의심할 때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능이 높다고 편향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 아니다. 여기에 합리성이 개입해야 한다. 피상적이고 게으른 사고는 반성적 마음의 결함이자 합리성의 실패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근원은 생각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생각의 결과라는 말이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소달구지의 수레바퀴가 소를 따라오듯이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굳어버린 생각은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것에 자기 색깔을 입힌 채 나와 다른 사람을 점차 배제한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고귀한 진리까지 왜곡시킨다. 습관적인 생각은 달팽이가 언제나 지고 다니는 껍데기와 비슷하다. 삶의 진로를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적인 생각과 싸워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영국의 ‘철의 여인’, 대처 총리에게 그의 아버지가 늘 했던 말이다. 명품 속 최신의 사치재인 생각을 제대로 하면서 살라는 경고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