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아이히만’에 관한 해석학적 연구


지난 달 20일(토) 고려대 문과대학 서관 132호에서 열린 한국해석학회(현대유럽철학연구)의 ‘제127차 한국해석학회 춘계 학술대회’는 작고 조용하게 진행된 학술 행사였지만, 그럼에도 기억할 만한 자리였다고 평가해야할 것 같다. 윤은주 숭실대 초빙교수가 발표한 논문 「아이히만,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의 사이」가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나 아렌트’의 목소리와 주장을 연상시킨 윤 교수의 논문은 4·16 세월호 참사와 5·18민주화운동이 현대사의 시간축에 새겨진 한국사회에 음미할 여지를 던져주고 있다.
리처드 J. 번스타인이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에서 지적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의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에서 인간의 조건을 파괴하고 변형시키는 몸서리처지는 계획적 시도가 초래된다는 주장에 적극 공감한 윤 교수는 아이히만의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 사이에 걸쳐 있는 자기 생각의 부재에 천착, 정치적으로 말하기와 정신의 확장이 어째서 중요한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음은 윤 교수가 발표한 논문 가운데, ‘생각함의 불편부당함과 정신의 확장’ 부분을 간추린 내용이다.


생각함의 불편부당함과 정신의 확장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서, 현실에서의 삶은 활동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활동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지 않는 행동은 공허하며 행동하지 않는 생각은 무의미하다. 아렌트는 미완성 저작인 ‘정신의 삶에서’ 정신적 활동을 사유, 판단, 의지로 구분하고, 현실 삶에서 인간의 자기표현인 활동적 삶만큼이 나 정신적 활동 역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활동적 삶에 있어서 인간다움은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사유의 정신적 활동과 그것을 실천적 영역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판단의 정신적 활동을 요구한다.
생각함의 무능력은 행위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 전체주의가 자유롭게 생각함을 억압했던 것은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정권에 대한 저항과 논박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함이다. “생각 자체도 오직 명령을 내리거나 수행함으로써만 있을 수 있다”는 히틀러의 말은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명령에 의해 모든 것이 만들어지며 제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면하는 사건들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이 전제되지 않는 한 인간의 활동은 노예적 삶일 뿐이다.
공적 영역에서 한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취하는 것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의견을 표현하는 정치적 대화의 실현 여부에 있다.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자유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노예로서의 삶은 공적 영역에의 참여 자체가 불가하다. 자유의 실현으로서의 정치는 공적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공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삶이며, 그 실현의 방법은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 대화에 있다. 아렌트에게 있어 정치적 대화는 정치 공동체의 정책이나 행정에 국한된 업무적 차원의 정치가 아니라 사적 안정을 기반으로 공적 영역에 진출한 사람들 의 공적 관심에 바탕을 둔다. 정치적 행위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대화는 개별 시민들이 특별한 의제나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생각을 교환하고,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을 공유하며, 정치적 세계를 공동으로 해석하여, 공적 사안들에 대한 의견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생각을 토대로 말하기와 쓰기로 구성되는 언어활동이다. 이 가운데 말하기는 원리나 이론에 입각해 문제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풀어놓는 것이다.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무능력함은 바로 이 말하기에 있어 그가 사용한 문구들에서 드러난다. 상투어와 관청 용어로 가득한 그의 말하기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생각함과 그에 따른 말하기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생각함이 없었기에 경험한 것을 풀어놓기보다는 보고서에 적시된 내용을 그대로 읊어대는 녹음기에 불과했다. 아이히만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토대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한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었다.


‘정치적 말하기’의 의미

공적 무대에서 아렌트가 선택한 대화의 방식은 이야기하기(story-telling)다. 이야기하기는 절대적 진리나 통치 이념에 의해 조작되거나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 즉 사실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적 진리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연관된 사건들이나 상황들과의 관계다. 그것은 목격자들에 의해 성립되며 증인의 진술에 의존한다. 또한 사실적 진리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이야기돼야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본질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으로 말하기, 혹은 이야기하기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의사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자유롭고 공평하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게 되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다양한 의견들 가운데 보다 나은 것을 취할 수도 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눔에 있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을 불편부당함(impartiality)이라 한다. 불편부당함은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켜서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 고려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확장(enlargement of the mind)’이 요구된다. 마주하는 사안에 대해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생각함의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
정신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에 끌어들여 비판하고 받아들이는 데 쓰인다. 또한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을 적절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거리두기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심연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바로 이해를 토대로 한 이야기하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함의 과정에서 그 내용을 이미지화해야 하는데, 상상력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정신의 확장’에는 비판적 사고도 요구된다. 비판적 사고는 개인의 고독한 사유 작업이지만, 그 사유 안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끌어들이고 개인의 생각을 공적 영역으로 이끈다. 즉 확장된 정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다른 곳을 방문하러 가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과 같다.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내 자신의 입장에 적합한 편견을 그들의 편견으로 대체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생각함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우선적으로 사유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 다양한 의견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진 자세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의 확 장’은 생각함을 방해하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사유의 일반화에 도달하게 되어 불편부당함을 얻게 된다.
사적 관심과의 거리두기는 공적 삶의 전제다. 어떤 사태나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결부시키지 않고 공정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을 통해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위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다.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민의 조건을 현재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사적 안정을 통한 공적 행위의 불편부당함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사적 삶에 종속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집중하는 인간은 공적 삶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설령 그 일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집착하게 될 것이다. 아이히만의 무능력함은 이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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