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제49회 방송대문학상

그날도 어김없이 고속도로 위였다. “다음에서 나가야 해요!” 내 말에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이 다음이야? 그 다음이야?”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출구는 저만치 멀어졌고, 조용하던 차 안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결국 그는 “운전할 땐 그냥 내버려 둬. 더 헷갈리기만 해”라며 입을 닫게 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담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이 그랬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몇 분 동안, 육십이 넘은 지금도 결혼 초기에나 할 법한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이 사람과 결혼한 게 내 삶의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화가 난 마음에 오래된 기억들이 스쳤고, 그 한켠엔 시어머니가 있었다. 아이 하나 낳고 복직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어머니는 차가운 비수 같은 말을 던졌다. “이제 그만둬라, 여자가 바깥일 하는 게 남 보기에도 안 좋아.” 세 살 남짓한 아들을 두고도 일해야 했던 그때, 그 말은 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내게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학문의 길 대신 내가 스스로 쟁취한 자존감의 증표였다. 고3 담임 선생님이 초등학교 교사를 권유하셨을 때도, 대학 문턱조차 넘볼 수 없는 집안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뻐할 수 없었다. 혹여 선생님이 집을 찾아오실까 두려워 편지까지 써서 만류했고, 대신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규칙적인 생활, 안정적인 수입,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더 높은 직위를 꿈꾸며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열정적인 나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을 돌봐주시던 시어머니가 동생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떠나셨다.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던 나는 육아와 직장을 병행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고, 시어머니의 “직장을 그만두라”라는 말이 이 상황과 맞물리면서 결국 내 손으로 사직서를 쓰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거대한 변화, 그리고 이어지는 이별은 나의 계획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행복한 동시에 아쉬움이 남던 그때, 남편은 연로한 부모님을 평생 모시자며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미국행을 준비하며 시어머니는 내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건넸다. “바느질을 배워두면 미국에 가서도 밥은 굶지 않는다.” 그 말이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손재주가 좋으셨던 시어머니 덕분에 나 역시 자연스레 바느질과 뜨개질을 익혔던 터라, 그 말에 기댈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양재학원에서 처음으로 바느질을 배웠다. 바느질을 할 때면 오직 옷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 옷을 입고 기뻐할 손님을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실을 꿰매고 바늘을 움직였다.
바느질은 늘 내 삶의 좌표를 재설정해주었다.
바늘 끝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실밥으로 나아갈 길을 이어붙이며,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길을 찾았다.
기계를 몰라 길을 헤매던 나, 실수를 반복하며 눈물짓던 나.
그 모든 시간은 어쩌면 나만의 속도로 달려온 인생의 여정이었다.
이제는 안다. 길을 잃는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바느질, 삶의 복잡함을 배우다
하지만 옷을 고쳤는데도 손님이 다시 가져올 때면 좌절감이 밀려왔다. 한 번 수선한 옷을 다시 뜯어 고치는 일은 마치 틀린 시험지를 다시 펼쳐 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손님의 요구대로 짧게 수선해드렸는데, 며칠 뒤 “왜 이렇게 짧게 했느냐”며 되레 서운해하는 손님을 마주했을 때는 사람의 마음이란 옷보다 훨씬 복잡한 바느질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옷 한 벌에서 배우기도 했다.
나는 유독 기계를 무서워했다.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우다 자동차 불빛에 놀라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던 기억, 운전면허 시험에서 거듭 낙방했던 경험, 그리고 재봉틀을 다루는 것조차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학창 시절 가사 시간의 재봉 숙제는 늘 엄마의 몫이었다. 양재학원에 처음 앉아 재봉틀을 마주하던 날, 내 손은 낯선 기계 앞에서 머뭇거렸다. 어둡고 고요한 실습실, 벽에 늘어선 재봉틀들은 마치 위협적인 작은 전투기들 같았다. 실을 꿰는 일조차 쉽지 않았고, 떨리는 손끝에서 바늘귀는 작고 실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가위는 칼날처럼 번뜩였고, 천은 숨죽이며 내 결단을 기다렸다. “자릅니다.” 속으로 되뇌며 천 위에 가위를 댄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두 번 뛰더니 멈춘 듯했다. 자르기 전까지는 천이었지만, 자르고 나면 운명이 되는 것. 그 순간 나는 한 번 내린 결정의 무게를 처음으로 느꼈다. 바늘을 움직이는 동안,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수없이 되뇌면서도 손은 움직였고, 바늘은 실을 꿰며 내 안의 두려움을 조금씩 꿰매주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이 이어질수록, 막연했던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지고 작은 확신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바느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단이다. 한 번 자른 천은 다시 붙일 수 없고, 잘못 자르면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된다. 이는 방송대 기말 과제물을 작성할 때도 뼈저리게 느낀 바다. 지시사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글을 썼더니 아슬아슬하게 과락을 면했다. 열심히 했더라도 처음 길을 잘못 들면 끝까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 경험은 바느질과 공부,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재단이 틀어지면 옷의 형체가 망가지듯, 삶도 첫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결국 모든 시작은 '어디를 어떻게 자를 것인가'에서 결정된다. 천 위에 가위를 대기 전의 긴장감처럼, 삶의 갈림길 앞에서도 우리는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고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게 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신중해야 할 때임을 바느질은 속삭여주었다.
처음 손님을 받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잊을 수 없다. 손님이 답답하다는 듯 몸짓으로 설명하는 “햄 좀 해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먹는 햄?’이라며 어리둥절했다. 옷단을 접어 마무리하는 ‘헴(hem)’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무지에서 오는 당혹감은 그때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배우는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처음 손님을 받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잊을 수 없다.
손님이 답답하다는 듯 몸짓으로 설명하는 “햄 좀 해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먹는 햄?’이라며 어리둥절했다.
옷단을 접어 마무리하는 ‘헴(hem)’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무지에서 오는 당혹감은 그때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배우는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삶의 나침반을 찾아서
남편은 길을 잘 모른다. 인생에서도 늘 길치였다. 나 역시 길치에 기계치였다. 내비게이션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늘 우왕좌왕했다. 남편은 기계를 못 믿겠다며 늘 내게 묻지만, 사실 나도 확신이 없어 늘 불안했다. 결혼 40년이 넘도록 우리는 인생이라는 자동차에서 서로의 불안한 눈과 귀가 되어 길을 읽어주고, 또 길을 헤매고 있었다. 길 위에서 옥신각신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때로는 내가 앞서 길을 알려주려 했고, 때로는 그가 고집스럽게 자신의 방향을 택했다.
친구들은 하나둘 정년을 맞고 연금을 받으며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며 문득  ‘내가 계속 다녔다면 지금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시어머니 때문이야.’ 나는 그분의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오늘,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운전석의 남편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했어도, 핸들을 쥔 건 그 사람이었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표를 낸 것도, 다니지 않기로 한 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었다. 시어머니의 말은 있었지만, 내 손으로 그 문서를 출력했고, 내 발로 구청을 나왔다. 그 선택의 결과를 지금껏 품고 살아온 것도, 남이 아닌 나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 삶의 모든 길은 결국 내가 걷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었음을.
처음 수선을 맡았을 때, 나는 몇 번이나 옷을 뜯었다가 다시 박기를 반복했다. 밤늦게까지 혼자 가게 불을 켜둔 채 미싱 앞에 앉아 있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바느질이 이렇게 고된 일인지 몰랐다. 마음 같아선 “이 일 못 해먹겠다”며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피가 맺히고, 천이 자꾸 비뚤게 박힐 때면 속상해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한 땀 한 땀 다시 도전했고, 결국 옷이 제 모양을 갖춰갈 때의 그 성취감-그건 그 어떤 일보다 벅찬 기쁨이었다. 옷이 완성된 순간, 나는 조용히 손끝으로 매무새를 다듬었다. 실밥 하나하나에 나의 인내와 노력, 그리고 자존심이 실려 있었다. 손님이 옷을 받아들고 “예쁘게 잘 됐네요” 하고 웃어줄 때,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다 녹였다. 그날 나는 알았다. 바느질은 단순히 천을 꿰매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견디고 꿰매는 일이라는 걸. 삶의 실타래를 내 손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내 인생을 바꾼 것은 ‘퇴직’도 ‘결혼’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삶을 온전히 내 삶으로 감싸 안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길을 헤매고, 기계를 어려워하던 내가 바느질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꿰매고, 불안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었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길을 잃는다. 나 역시 그랬다. 퇴직이라는 이정표 앞에서, 이민이라는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그리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새벽의 수선실 안에서. 그때마다 내가 붙잡은 것은 실 한 가닥, 천 한 조각이었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매 순간 내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아주는 나의 굳건한 마음 그 자체였다. 이 마음이야말로 내 삶의 가장 확실한 이정표였다.
바느질은 늘 내 삶의 좌표를 재설정해주었다. 바늘끝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실밥으로 나아갈 길을 이어붙이며,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길을 찾았다. 기계를 몰라 길을 헤매던 나, 실수를 반복하며 눈물짓던 나. 그 모든 시간은 어쩌면 나만의 속도로 달려온 인생의 여정이었다. 이제는 안다. 길을 잃는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돌아서 가면 되는 길도 있고, 잠시 멈추었다 다시 가면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길도 있다는 것을. 바느질처럼, 인생도 결국은 내 손으로 길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내 길을 꿰매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삶을 짓는 방법이었다.

바느질과 글쓰기, 불멸을 짓다
바느질이 이끈 새로운 길은 글쓰기로도 이어졌다. 나는 미싱 앞에 앉아 바늘을 움직이며,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방송대 강의를 듣는다. 실이 바늘귀를 통과하듯, 교수님의 말씀이 내 머릿속을 관통해 지나간다. 다림질하며 윤리를 배우고, 단추를 달며 철학을 듣는다. 어떤 날은 미싱보다 강의가 더 어려워 멍해질 때도 있지만, 그 순간조차 내 삶은 생기롭다. 방송대에 다니며 과제물을 하나씩 써 내려가다 보니, 내 글에도 길이 생겼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매주 글을 쓰며 나는 문장의 뼈대를 세우고, 생각의 옷을 입히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얻은 용기로 문학상에 도전했고, 지금은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있다. 바느질로 옷의 형태를 잡듯, 글쓰기로 내 생각의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친구들 중엔 퇴직 후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연금을 받으며 편히 노는 것이 한때는 부러웠지만, 놀기만 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안다. 노는 것도 결국 지겨워지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눈만 이상 없으면, 죽기 전까지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 나의 큰 시누이는 올해로 여든여덟. 지금도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고, 솜씨 좋다는 입소문에 찾는 이도 많다. 그녀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미국 사람들 중에는 단추 하나도 달 줄 모르는 이가 많다. 그런 이들이 내가 고쳐준 옷을 들고 와 완벽하다며 두 손을 모아 인사할 때면, 내 마음에도 작은 꽃 한 송이가 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내 나이에도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바느질은 내게 여전히 '살아 있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나를 지탱하고,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의 동력이었다.
어쩌면 바느질이 내 손끝의 감각을 깨워주었듯, 방송대 과제는 내 마음속 문장을 일깨워준 지도 모른다. 실을 꿰듯 단어를 꿰고, 옷을 고치듯 기억을 수선하며, 나는 나만의 글을 지어갔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나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크리스는 자주 우리 가게에 들르던 손님이었다. 어느 날, 그는 조심스레 아내의 드레스를 들고 왔다. “아내가 뇌출혈을 겪고 나서 몸이 불편해졌어요. 그런데 이번에 아들 결혼식이 있어서… 예전에 입던 이 드레스를 꼭 다시 입고 싶어 해요.” 드레스는 고운 색깔이었지만, 움직임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단추와 소매가 불편해 보였다. 나는 천을 가늠하고 실을 꿰며 한 땀 한 땀 조심스럽게 고쳐나갔다. 이 옷이 그날, 그녀를 다시 세상 한가운데로 데려다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며칠 뒤, 크리스가 옷을 찾으러 왔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팁 박스 안엔, 그가 몰래 두고 간 넉넉한 감사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날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겼다. 바느질은 천을 고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꿰매고, 존엄을 복원하고, 마음을 이어주는 일이다. 옷 한 벌에 담긴 사연을 통해 나는 인간 존재의 깊이를 헤아렸다.
시어머니는 말했다. “바느질만 잘해도 밥은 굶지 않는다.” 그 말은 당시에는 위로였고, 나중에는 현실이 되었다. 나는 그 말 덕분에 두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도 손끝을 믿고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을 나의 며느리에게 해주었다. “살면서 때로 길을 잃을 수도 있어. 그럴 땐 손에 쥘 수 있는 기술이 네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거야. 바느질이든, 글쓰기든, 너만의 실을 꿰어가면 돼.” 그 말을 건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한 세대의 말이 또 다른 세대의 길이 된다는 것. 바느질로 꿰맨 건 옷자락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삶을 꿰맸고, 지금은 그 삶을 건네고 있었다.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을 나의 며느리에게 해주었다.
“살면서 때로 길을 잃을 수도 있어. 그럴 땐 손에 쥘 수 있는 기술이
네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거야. 바느질이든, 글쓰기든, 너만의 실을 꿰어가면 돼.”
그 말을 건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한 세대의 말이 또 다른 세대의 길이 된다는 것.
바느질로 꿰맨 건 옷자락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삶을 꿰맸고, 지금은 그 삶을 건네고 있었다.

 


삶을 재단하고 수선하다
요즘 나는 방송대 과제물을 붙잡고 또박또박 글을 써 내려간다. 어휘 하나, 문장 하나에 마음을 들이고 나면, 바느질처럼 삶의 조각들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어려운 과제물을 하려면 며칠 밤낮을 고민하듯이, 복잡한 수선을 할 때도 나는 며칠을 붙잡고 생각한다. 어느 방향으로 옷을 뜯고 다시 박아야 손님 몸에 잘 맞을까-요리조리 머리를 굴려야 한다. 마치 과제물에서 A를 받기 위해 애쓰는 것과 똑같다. 문장을 다듬고 손질하는 이 시간은, 수선실에서 손님들의 옷을 수선할 때 느끼던 그 마음과 닮아 있다. 해어진 옷자락을 꿰매듯이, 흐트러진 내 마음과 생각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곧 나의 삶을 재단하고 수선하는 과정이 되었다.
방송대에서 「철학의 이해」 수업을 들으며 플라톤의 『향연』을 읽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깃들며,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구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 구절이 바느질을 할 때마다 떠올랐다. 실밥을 따라 한 땀 한 땀 꿰매는 동안, 나는 손님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과 마음을 꿰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도, 내가 꿰맨 옷을 입고 웃었던 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남는다. 그리고 그 모든 꿰맴은, 내 삶의 불멸이기도 하다. 옷을 통해 맺어진 인연들, 그들의 미소, 그리고 내 손끝의 정성. 이 모든 것이 쌓여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채워주었다.
바느질은 계절마다 다르고, 사람의 삶마다 다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철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고, 나는 바느질의 손길을 바꾼다. 졸업 시즌이 되면 프롬 드레스 수선이 많다. 딸을 데리고 드레스 기장을 줄이러 오는 엄마의 눈빛, 아들의 양복 바지와 재킷 소매를 줄이러 오는 아빠의 말투엔 사랑과 기대가 묻어난다. 아들이 더 자랄 것 같다며 바지 천을 자르지 말아 달라는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프롬이 끝난 후, 드레스를 입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일부러 보여주러 오는 손님도 있다. 마켓에 갔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손님도 있다. 어떤 날은 화려한 드레스 수선이고, 또 어떤 날은 먼 곳에 계신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듣고 검은 정장과 드레스를 고쳐달라며 다급히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 바느질은 그 사람의 시간과 마음을 꿰매는 일이다. 옷 하나하나에 담긴 삶의 흔적을 나는 존중하고 정성껏 다루었다.
새로운 직장 인터뷰를 앞두고 양복을 고치러 오는 이들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그 직장에 잘 적응하시고, 다음엔 더 환하게 웃으며 오시길.”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보이스카우트 유니폼에 여러 개의 패치를 달아달라고 하고, 군인은 계급이 바뀌며 견장을 교체하러 온다. 딸이 모시고 오는 실버 세대 손님은 걸음이 불편한 노모의 바지 기장을 줄여달라고 부탁한다. 바느질에도 유행이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바지통은 좁아야 멋졌고, 요즘은 다시 바지통이 넓어졌다. 유행을 따라 옷이 바뀌면, 내 바느질도 바뀐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건, 누군가의 하루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바로 나를 이끌어온 진정한 내비게이션이었음을, 이제야 온전히 깨닫는다.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삶의 한 땀 한 땀이 곧 나만의 불멸의 길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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