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일기예보를 정말 좋아합니다. 다양한 일기예보를 보는 것도 좋고, 스스로 날씨를 예측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긴다면 기상예보사 시험을 쳐보고 싶은 생각까지 합니다.
계기는 빨래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집에 있는 시간이 긴 제가 세탁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쌓여 있는 세탁물을 어느 타이밍에 세탁하는 것이 최적인지, 매일 일기예보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결국 집 가까운 곳의 일기도와 하늘을 보면 향후 24시간 정도의 날씨는 정확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기후변화 탓으로 계절 기후 패턴이 예년과 달라졌고, 프로 기상예보사들도 때때로 틀리긴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곳에 한해서는 저의 예보 쪽이 정확합니다. 밤의 가두에서 ‘내일의 날씨, 점칩니다’라고 노점을 낼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매상은 못 맞출 것 같습니다만.

예측하며 생활하는 것은, 항상 머리를 움직이는 일이므로,
뇌는 활성화돼 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1초 후에 방문할 현재를
보다 더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현재가 소중하기 때문에라도 1초 앞을 예측한다는,
그 순서를 잊고 예측에만 집중한다면,

현재를 잃게 됩니다.


 

 

전야제형과 후야제형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것은 세탁의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저의 성격 탓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전야제 형’과 ‘후야제형’으로 나눌 수 있다면, 저는 명백한 전야제형입니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저런 공상을 하면서 신이 나는 타입이죠. 사전에 기대가 너무 커서 막상 축제가 시작되면 이미 소진돼 피로를 느끼기도 합니다. 후야제형은 거꾸로, 축제가 시작되기까지 관심이 없다가, 축제가 시작되면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타입입니다. 
‘전야제형’은 예측하기를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저는 날씨뿐 아니라,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연속적으로 예측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번화가의 교차로, 시부야의 스크럼블 교차로를 아십니까? 보행자 신호가 푸른색이 되면, 사방팔방에서 일제히 수많은 사람이 랜덤한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앞에서 걸어오는 많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순간적으로 예측하고, 제가 가야 할 길을 갑니다. 그때의 저는 럭비 선수입니다. 계속해서 태클을 걸어오는 적을 부드럽게 따돌리고 갑자기 왼쪽으로 진로를 바꾸거나 하면서 부딪히지 않을 만한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러시아워 시간대의 역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한국 지하철에서, 내릴 사람과 타는 사람은 동시에 움직이지, 문은 금방 닫히지, 머뭇머뭇하다가 못 내리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측쟁이로서의 능력을 시험당하는 일 같아서 가슴이 두근두근하기도 했습니다. 도로를 걸어도, 건너편에서 부딪혀오고, 심지어 부딪힌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부딪혔다 싶어서 서둘러 ‘제송하무니다’라고 말해도 상대방은 ‘뭐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아아, 부딪힌 것도 모르는구나. 여기서는 부딪혀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구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부딪히지 않도록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예측해 걷는 이 연습은, 지금 풋살(5인제 축구)에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약 30년, 저는 매주 풋살을 계속하는데, 이제 60세, 환갑을 맞고부터는, 더 이상 풋살을 할 수 없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고 각오를 다지곤 합니다. 달리는 속도도, ‘스탑 앤 고’의 순발력도 쇠퇴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누적돼 온, 예측의 습관 덕분에 스피드나 필적할 성과는 떨어지더라도 20대, 30대의 상대를 따돌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됐죠.


최근 ‘디스토피아 소설’을 쓰지 않은 이유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체격이라든가, 목소리의 크기라든가, 존재감의 크기, 자기주장의 강도, 그런 모든 면에서 저는 아이 때부터 약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전근이 잦아서, 자주 전학을 다녔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정도라면 몰라도, 폭력의 대상이 될 염려는 항상 있었고, 그 리스크를 피하려고, 언제부터인가 예측을 계속했던 것 같습니다. 약하고 겁이 많아서 살아남는 지혜를 몸에 익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죠.
제가 쓰는 소설에도 그런 경향이 현저해서 ‘근미래 이야기’라든가 ‘디스토피아 소설’이라 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 사회가 이대로 간다면 도착하게 될, 최악의 선택지를 상상해서 쓴 소설이 많으니까요. 그 이유는 물론, 세상이 최악의 선택지를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쪽으로 가면 이런 악몽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최근 5년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이미 디스토피아가 됐으니, 그걸 써봤자 의미도 없을테니까요. 오히려 지금은 어느 쪽으로 가면 나아질 것인가를 쓰는 편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자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세상은 불안정해질 뿐이므로 예측하면서 나날을 보내는 제 방식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삶의 방식이 점점 필요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몸을 지키는 이 방법은, 보수적으로 아무 일 없이 사는 방식과 정반대 편에 있습니다. 어떤 위험이 어느 곳에 도사리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너무 떨지 않고도 도전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측하며 사는 것에 지친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 사회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예측하며 살도록 개개인에게 강요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타인에게 메이와쿠(민폐)가 되는 일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니 사전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고 서로 예방합니다.

‘현재’에 몰입한다는 것의 의미
저는 멕시코와 서울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어느 쪽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일본 사회처럼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신경질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전에 재빨리 준비하고, 실수가 일어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후야제형’입니다. 제가 항상 예상하고, 말하자면 1초 앞의 세계를 사는 데 반해, 후야제형의 세상은 ‘현재’를 살고 있죠.
예측을 계속하며 1초 앞의 세계에 영원히 갇혀버린 저는, 이따금 앞일도 과거의 일도 잊고 현재에만 매몰되어 살고 싶습니다.
지금은 한국 사회도, 전처럼 현재에만 살 수는 없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태어나자마자, 장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쫓기며 삽니다. 1초 앞은커녕, 미래조차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현재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측하며 생활하는 것은, 항상 머리를 움직이는 일이므로, 뇌는 활성화돼 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1초 후에 방문할 현재를 보다 더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현재가 소중하기 때문에라도 1초 앞을 예측한다는, 그 순서를 잊고 예측에만 집중한다면, 현재를 잃게 됩니다. 때로는 제가 동물이나 식물이 됐다고 생각하고 시간을 잊고 현재에 몰입해 보려고 합니다. 

 

■ 번역 김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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