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대 할포드 맥킨더 지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대니 돌링(Danny Dorling, 1968~ )의 책 『슬로다운』이 예일대에서 처음 출판된 것은 2020년 4월이다. 방송대출판문화원 ‘지식의 날개’에서 JTBC 보도국 김필규 기자의 번역으로 우리말판을 낸 것이 지난 9월이었으니 이 논쟁적인 책의 국내 소개는 빠른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소개에 앞서 저자가 소속된 옥스퍼드대 할포드 맥킨더 지리학 교수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려져 있듯, 옥스퍼드대는 2020년 기준 모두 39개의 칼리지(college)로 구성돼 있다. 할포드 맥킨더(Halford Mackinder) 지리학 교수는 39개 칼리지의 하나인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에 1971년 설치됐는데, 영국 초기 지리학의 중요한 인물인 할포드 맥킨더(Halford Mackinder) 경의 이름을 딴 교수직이다. 거쳐 간 학자는 존 하우스(1974~1984), 데이비드 하비(1987~1995), 고든 L. 클락(1995~2013) 등이 있다. 1984~1986년에는 이 교수직을 운영하지 않았다. 대니 돌링은 2013년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두 지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학자다.
우리 나이로 53세인 대니 돌링은 인구와 주거, 보건, 고용, 빈곤 등을 두루 연구한 학자로, 인구학, 통계학, 역학(疫學), 수학 분야에 눈이 밝다. 지은 책에는『불평등과 1%』,『평등 효과』 등이 있다.
방송대출판문화원 교양출판팀의 박혜원 편집자는 “2019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이 책의 원서 정보를 처음 접했다. 당시 원서도 출간 전이라 초고를 입수해 검토했는데 제법 흥미로웠다. 과거의 급격한 성장과 근래의 저성장 기조 모두 우리나라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번역 작업이 다소 지연돼 계획보다 한국어판 출간이 늦어졌는데, 오히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시국에 걸맞은 도서라는 평을 받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내일을 대비해 학업에 매진하는 방송대 학우들도 미래에 대한 거시적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의 의미를 매겼다.
65개의 시간선 그래프로 ‘감속’ 진단
『슬로다운』은 ‘대가속 시대의 종말, 더 좋은 미래의 시작’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산업혁명 이후 지속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이 둔화 즉, ‘감속’에 접어들고 있음을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멀게는 2000년 전까지, 가깝게는 20년 전까지 넘나들면서 부채, 데이터, 기후, 인구, 출산율 등의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슬로다운’ 현상을 추적했다. 시간에 따른 슬로다운 정도를 보여주는 65개의 시간선 그래프를 적절하게 활용해 가독성과 이해도를 높인 것도 흥미롭다.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전염병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을 파괴할 것이다.
- 대니 돌링
저자가 말하는 슬로다운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1890년대에 처음 등장했던 ‘슬로다운(slow down)’을 과감하게 소환, “앞으로 계속 나아가긴 하지만 전보다 더 천천히 가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하면서, “슬로다운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누려 왔던 변화와 혁신, 그리고 새로운 발견 등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잠깐. 이 책의 의미 맥락을 다시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 책을 소개한 기사들 대부분이 ‘저자의 낙관적 전망’을 강조했는데, 이와 함께 컨텍스트적 의미를 함께 읽어내야만 저자가 말하고자 한 핵심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컨대 저자가 ‘성장의 둔화는 안정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기세가 꺾이고 불평등이 해소돼 전쟁이나 갈등도 줄어들 것’이라고 단순히 낙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니 돌링 교수는 책의 초판을 내기 전 영국 유력지 <가디언>지 2020년 3월 31일자 책소식 면에「코로나 바이러스 는 비극이다―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경종일 수 있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이 책보다는 좀더 선명하다. 이 글에서 그는 전반적인 경기침체가 유리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인식하려면 변화, 혁신 및 발견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순수한 이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방점이 찍히는 대목은 다음이다. “우리는 경기침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새로운 큰 변화가 바로 모퉁이에 놓여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걱정해야 한다. 변화의 속도가 느려지는 동안 상황이 지금과 거의 같게 유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제대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특히 “슬로다운에 대한 대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전염병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쓴 대목은『슬로다운』에서도 거듭 반복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또 그런 변화에 완전히 적응하는 데는 두 세대 정도, 50년 이상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도 그런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우리 자신을 꾸준히 적응시키고,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라는 저자의 주장도 생뚱맞지는 않을 것이다. 5장과 6장에서 슬로다운의 예외적 현상으로 기후와 온도를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단순히 ‘낙관적 전망’을 강조한 게 아니라 속도를 늦추면서 적응과 변화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을 문맥에 녹였음을 눈치챌 수 있다.

‘느린 성장’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저자는 인구, 경제성장, 과학기술, 정보기술, 교육 등 곳곳에서 슬로다운을 찾아내 기술적·경제적
진보가 침체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이후의 문제를 고민하자고 역설한다. “슬로다운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을 바꿀 시간이 되기도 한다. 슬로다운은 우리에게 시간 자체를 주기도 한다.” “슬로다운은 걷잡을 수 없던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시장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이 계속 커지기만 할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영원할 수 없다. 이는 왜곡된 부의 집중을 가져오면서 민주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뿐이다.”(한국어판 특별부록으로 실린 「팬데믹 이후의 한국, 그리고 세계」에서 저자는 번역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극단적인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책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읽힌다.)
‘느린 성장이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은 무소불위의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경제지에서 발끈할 만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2020년 4월 9일자는「둔화 및 완전 성장―느린 성장이 나쁜 것이 아닌 이유」라는 기사를 통해『슬로다운』을 완곡하게 비판했다. “매력적인 아이디어이고 사실일 수도 있지만, 저자의 책만으로는 알 수 없다. 감속(슬로다운)은 새로운 위키피디아 기사의 수, 미국의 모든 자동차 대출 가치 및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책을 포함해 사례를 입증하기 위해 다소 특이한 데이터 세트에 의존한다. 저자가 다른 지표 세트를 선택했거나 다른 방법론적 선택을 했다면 반대의 경우를 만들 수 있다.”
“슬로다운은 이제 우리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라고 저자는 말했다. 전체 568쪽 분량이라 두껍긴 하지만, 가능하면 원서를 곁에 두고 천천히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1, 2장을 먼저 읽고, 11, 12장을 펼치는 것도 유연한 독법이겠다. 3장부터 10장까지는 동원된 데이터와 설명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렵거나 하지는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