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Weekly 시네마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서울 아산병원, 경춘선 숲길,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 전당, 오설록 티 뮤지엄, 성수 디올을 하나로 관통하는 키워드는?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 정영선 조경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1973년 처음 설립된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 졸업생이자 최초의 여성 기술사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우리 전통 미학에 뿌리를 두고, 공간이 간직한 특성과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 고려하는 작품관으로 ‘땅에 시를 쓰듯’ 아름다운 공간들을 만들어왔다. 202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조경계 최고 영예상인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했다.

 

「땅에 쓰는 시」는 건축 다큐멘터리스트 정다운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정체성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온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의 삶을 담은 「이타미 준의 바다」, 출판인들의 꿈과 건축인들의 이상을 실현시킨 문화생태 유토피아 ‘파주출판도시’의 탄생을 그린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를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서 정 감독은 수직과 수평으로 패닝하는 카메라로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공간을 지나가는 사계절을 서정적으로 담아냈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 전당 같은 내 인생의 수많은 중요한 공간들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번 영화는 내게 운명적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하는 정 감독을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건축’을 주제로 한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 ‘조경’에 집중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영화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건축으로 대학원을 갔어요. 그 후 두 편의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었죠. 세 번째 주제로 조경을 선택한 이유는 자연과 공간의 관계성 안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전달하기 위한 조경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영선 조경가와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2018년에 당시 70대 후반이었던 선생님을 처음 뵀어요.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늘 최고,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셨던 분인데 유머러스하고 호방한 스타일에 반했죠. 저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교동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강남으로 이사왔어요.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 양재천이 절 지켜줬습니다. 과연 영화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에는 예술의 전당에 가서 살았고요. 그 외에도 선유도공원이나 올림픽공원 등 제가 위로를 받았던 모든 공간을 정영선 선생님께서 만드셨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번 작업은 그야말로 운명이란 느낌을 받았죠.

 

대가들 중에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리는 분들이 많아요. 올 초에 「어른 김장하」를 연출한 PD와 기자를 인터뷰했는데, 역시나 섭외가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정영선 조경가는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처음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죠. 당신이 기자 출신이기도 해서 그런지 언론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세요. 인터뷰도 잘 안 하셔서 자료도 별로 없었죠. 매번 도망을 다니셨지만, 제게는 무기가 있었어요. 이 영화는 선생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조경의 미래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선생님의 철학을 전달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담은 영화라고 설득했죠.

 

사계절을 담은 영화 구성이 독특합니다
조경가는 삶 속에서 자연의 요소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연의 계절적 변화’라는 기본 특질을 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처음부터 구상했던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이 싹트는 봄부터 녹음으로 가득 찬 여름, 무르익은 색채 너머 휴식을 기다리는 가을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을 준비하는 겨울까지, 영화에서는 정영선 선생님의 앞마당부터 남녀노소가 즐기는 대규모 공원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개인 정원 등의 고유한 경치를 계절에 따라 온전히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영화를 보면 조경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정영선 조경가의 작업은 화려하지 않아요
8cm로 규격화된 꽃이나 나무를 심는 공공기관의 조경과는 완전히 다르죠. 건축과 공간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면서 자연의 요소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조경’이라는 분야가 얼마나 강력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저 역시 영화 작업하는 5년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정영선 조경가의 조경 철학을 공유해주신다면요
조경은 특정한 순간이 아닌 거시적 관점이 미래를 바라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 가치 있고 매력적이죠. 정영선 선생님은 조경가의 역할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것을 더욱 아름답게 번영시켜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정원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꽃을 심고 나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장이자 자연을 보살피고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란 이야기죠.

 

“바다는 바다대로,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 아름답다”, “생동하는 녹색일 때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겨울의 자연도 봄의 자연도 모두 아름답다. 자연에는 한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다”라고도 말씀하세요. 우리 땅을 매만지는 선생님의 사랑의 손길이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같은 작품으로 태어났고, 그것이 바로 선생님의 조경 철학인 ‘땅에 쓰는 시’입니다.

정영선 조경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조경은 정원 안에 다양한 식물을 심는 것이 아니다. 주변 경관과 맞아야 하는데, 담 너머 흐르는 물이나 산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느끼고, 시를 읊고, 생각할 수 있는 옛날 선비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고유의 경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우리는 우리의 좋은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커요. 종종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분들이 서양 스타일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하던 시절이 꽤 길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경관의 아름다움을 개발 논리로 무시했던 부분도 있고요. 저는 우리의 것을 기본에 두고 그 위에서 더 나아가는 아름다움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영선 선생님의 철학과 뜻이 미래세대에 잘 전달되도록요.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제 영화는 ‘미래 세대에 대한 연서’이거든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번 영화를 보시고 우리 경관과 조경의 소중함을 느끼시면 좋겠어요. 한국 경관이라는 것, 우리의 자연적 요소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지를 정영선 선생님의 시선과 목소리로 잘 느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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