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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DNA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챕터 열었다”
50년 넘게 사랑받는 영화 시리즈 하면, 우선「스타워즈」가 떠오른다. 하지만,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먼 미래를 다룬「혹성탈출」도 있다. 유인원의 지배를 피해 금지된 땅에 도착한 주인공이, 쓰러진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관객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던 1968년 작품이 원작이다. 이후 혹성탈출은 여러 번 변주됐다. 최근에는 도합 16억8천100만 달러의 흥행 기록을 세운 「혹성탈출」 3부작이 있다. 2011년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시작으로, 2014년, 2017년 맷 리브스 감독의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과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나란히 흥행에 성공하며 전례 없는 인기를 얻은 프랜차이즈로 거듭나게 된다. 프랜차이즈의 새로운 시작을 담은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시저의 죽음 이후 진화한 유인원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오아시스에서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유인원 리더 ‘프록시무스’ 군단에 맞서, 한 인간 소녀와 함께 자유를 찾으러 떠나는 유인원 ‘노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시각효과는 「반지의 제왕」부터 「엑스맨」, 「아바타: 물의 길」 등에 참여한 세계적 VFX 스튜디오 W?t? FX가 맡아 보다 생생하고 압도적인 비주얼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이번「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메이즈 러너」시리즈로 성공적인 장편 영화 데뷔를 알린 웨스 볼 감독이 연출을 맡아 이전 3부작과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웨스 볼 감독을 화상으로 만나봤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팬덤이 탄탄한 시리즈의 성공적인 3부작 이후 4편 감독을 맡으셨어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너무 즐거웠다는 말밖에 할 수 없겠네요.「메이즈 러너」 이후 큰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는 작품을 맡게 된 거죠. 스튜디오 시스템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면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시저의 죽음 이후 완전히 무에서 새롭게 시작합니다. 각본 작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무엇이었나요 4편의 존재 이유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저는 그저 이 시리즈의 4편을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라,「혹성탈출」이라는 프랜차이즈에서 완전히 새로운 챕터를 열고 싶었습니다. 영화의 톤으로 보나 모험으로 보나 인물로 보나 완벽하게 새로운 걸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죠.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것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입니다. 권력, 역사, 충심 이 모든 것들이 다 녹아있는 영화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지난 10년간 관객들이 사랑해온 프랜차이즈의 유산이기도 해서 이걸 이어받으면서도 새로운 챕터를 열고 싶었습니다. 전작들과의 차별점이 있다면요 이전 영화들이 워낙 큰 사랑을 받아서 그런 요소를 다 갈아엎고 싶지 않았어요. 오히려 영화에 녹여내서 안고 가고 싶었죠. 이번 영화의 차별점이라면 ‘모험’, ‘새로운 시작’이라는 거에 방점을 찍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7년 전에 시저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영화는 새로운 사가(saga)가 시작됩니다. 유인원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겁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은, 전작 3부작이 워낙 무거운 톤이 있었잖아요?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가벼운 부분, 볼거리가 풍부합니다. 로드무비라는 점에서도 몇 가지 더 플러스된 부분도 있고요. 전작 중에서 영감을 얻은 장면이 있다거나, 재해석해서 넣은 장면이 있을까요? 전작 중에서는 몇 편을 가장 좋아하세요 찰턴 헤스톤의 1968년 오리지널을 보고 자란 세대입니다. 물론 그때 너무 어려서 정확히 영화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 비주얼만큼은 제게 큰 인상을 남겨서 오래 남아있죠. 인간이 풀숲에 숨어 있고, 말을 탄 유인원이 지나가는 장면 역시 이번 영화에서 재현됐습니다. 특히 직전 3부작에서 시저가 남긴 유산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마치 살아있는 느낌이 들 정도죠. 그래서 노아가 변화하는 것처럼요.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전작들의 DNA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이한 건 프리퀄, 시퀄을 합친 영화 같기도 해요. 오리지널 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있고, 시저 3부작의 좋은 점들도 갖고 있고요. 액션도 있고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감명 깊은 성장스토리도 있습니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작품에서 여자 인간에게 노바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번 영화에서 노바는 지난 노바들과 어떻게 다른가요 맞아요. 노바라는 이름은 전작에서도 많이 사용했죠. 오리지널 영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까요? 노바라는 이름은 사실 유인원이 인간에게 주는 이름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 이름을 받는 인간이 있지만, 좀 다른 점이 있어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여기까지만요. 흥미로운 건 영화 시작할 때는 유인원 스토리로 인식합니다. 여정이 계속되면서 인간과 유인원의 스토리라는 걸 알게 되죠. 거기서 이번 영화의 노바는 퍼즐이라고 할까요? 처음에는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미스테리한 인물이죠. 나중에야 비로소 노바의 역할이 드러나면서 유인원 캐릭터와 인간 캐릭터의 세계가 어떻게 펼쳐지게 되는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노아, 프록시무스, 라카 등 주요 캐릭터에게 특별한 점을 담으려 했나요 각 캐릭터들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한 콘셉트나 아이디어들을 표현하고 대표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특히 그렇죠. 한마디로 ‘지식이라는 것은 바로 권력’이라는 부분을 영화 속 여정을 통해 깨달아가죠. 프록시무스는 유인원이지만 가장 인간과 비슷한 캐릭터죠. 역사를 공부하고 그렇게 체득한 지식으로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라카는 시저에 대한 이해가 유인원들 사이에서는 가장 순수하게 남아 있는 캐릭터죠. 노아가 모험을 떠나면서 그 여정에서 아버지상이 되는 여러 어른 캐릭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세계관이 계속 바뀌는 도전을 받게 되죠. 후반부에서는 본인이 생각하고 해석하는 세계관을 정립합니다. 그렇게 청년이었던 유인원이 성인이 되면서 본인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가는 이야기를 캐릭터를 통해 그렸습니다. 시저 3부작의 전설적인 배우 앤디 서키스가 이번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참여해서 화제가 됐죠 앤디에 대해서는 정말 칭찬에 칭찬을 더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입니다. 신사적이고 따뜻한 사람입니다. 연기뿐 아니라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도 어마어마하고요. 저랑은「마우스가드」를 같이 한 인연이 있어요. 이번 영화에 시저가 물리적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의 레거시와 유산, 영혼은 영화 내내 함께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시저가 어떤 캐릭터고, 다음 세대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가장 잘 아는 앤디의 역할은 영화에서 정말 중요했습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콘셉트 아트를 보여주면서 영화 설명을 했는데요, ‘엄지 척’을 주더라고요. 자신감이 생겨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노아 역을 맡은 배우 오웬 티그의 에피소드도 있다고요. 오웬은 퍼포먼스 캡쳐가 처음인 배우여서 궁금한 게 많았어요. 앤디가 좋은 가이드가 됐죠. “믿어라. 다른 작업과 다르지 않다. 진심을 담아서 하면, 눈 속에 담긴 진심을 웨타의 기술자들이 스크린에 고스란이 옮겨줄 것이다”라고 하면서요. 오웬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에게요. 그런데 오웬에게 특별한 이유가 됐던 건, 오웬이 예전에 앤디 서키스가 킹콩 연기한 걸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거든요. 앤디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청년이 본인의 영웅을 영화 현장에서 만난 겁니다. 방금 말씀하셨지만, 웨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VFX 회사입니다. 압도적 CG 중에서도 혹시 마음에 안든 부분이 있었나요? 기술적 부분 말고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모두 웨타 기술진 덕분입니다. 세계 최고 크루들과 3년 반을 함께 경험했는데, 제가 주문한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마법사들이었습니다. 「혹성탈출」은 어마어마한 스펙터클이 중요합니다. 관객이 그걸 보고 즐거워하는 영화죠 그러면서도 눈만 즐거운 게 아니라 연기도 실제와 같아서 그걸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영화의 35% 정도는 100% CG로 만든 장면이에요. 하늘에 날리는 풀잎 하나까지요. 기술적 프로세스에 대해선 이미 전작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룬 상태였으니까요. 다만 이번 영화에서 자랑하고 싶은 부분은 물을 구현한 겁니다. 「아바타: 물의 길」이 없었다면 아마 해낼 수 없었을 장면입니다. 100% CG로 만들어진 장면도 있어요. 특히 유인원에게 물이 뭍어 있는 장면은 전부 CG입니다. 시도 자체가 처음이라 자부심이 큽니다. 말 타는 유인원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세상이 펼쳐지는데, 노아의 모험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기다리는 한국 관객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한국 관객 너무 사랑해요!「메이즈 러너」 시리즈가 정말 인기가 많았던 나라잖아요. 이번 영화「혹성탈출」도 많이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전 세계적으로 50년 이상 인기를 구가해온 작품에는 문화와 국경을 넘는 인류 보편적인 스토리와 감성이 있어요. 관객에게 즐거운 볼거리와 스펙터클을 선사하고 큰 스크린으로 볼 때 느끼는 영화적 체험까지 드릴 겁니다. 여기에 극장을 나서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영화가 되길 바랍니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은 만큼 눈 높은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가 사랑받길 바랍니다.
210호
윤상민
2024-05-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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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한 변태’ 역할 찰떡 같이 소화 … “40대 앞둔 지금, 연기가 재밌어요”
올해 서른아홉인 배우 변요한은 가장 바쁜 30대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다. 주연한 두 편의 작품 「그녀가 죽었다」(감독 김세휘)와 OTT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삼식이 삼촌」(감독 신연식)이 5월 15일에 동시 개봉, 공개된다. 두 작품의 홍보 프로모션이 중에도 이미 다음 영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감독 이종필) 촬영에 돌입했다. 대중이 변요한 배우를 인식한 작품은 드라마 「미생」(2014)일 것이다. ‘현장이 답!’이라고 외치는 파이팅 넘치는 영업사원 ‘한석율’을 보며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후 드라마(「육룡이 나르샤」(2015), 「미스터 선샤인」(2018)를 거쳐 영화계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데뷔작 「소셜포비아」(2015)는 그에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선사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감독 김윤석, 2016), 「자산어보」(감독 이준익, 2021)을 거쳐 이순신 3부작 중 2편인 「한산: 용의 출현」(감독 김한민, 2022)에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으로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변요한 배우는 스스로를 ‘힙합씬’ 출신이라고 소개한다. 영화계에서 힙합씬은 언더그라운드, 그러니까 ‘독립영화계’를 일컫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하고 독립영화만 30여 편에 출연하면서 연기 기초를 탄탄히 다져왔다.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변요한 배우를 만나 영화와 연기 인생에 대해 들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그녀가 죽었다」에서 ‘훔쳐보기’라는 악취미를 가진 ‘변태’ 공인중개사 ‘구정태’를 맡았습니다.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랑 완전히 반대인데요. 선택의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게 저의 또 다른 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웃음) 농답입니다. 「자산어보」 작업을 함께 했던 PD가 대본을 줬어요. 정의롭지 않은데 재밌는 시나리오가 있다면서요. 읽어 보니 정말 재밌더라고요. ‘세상에 내가 맞춰야 하는가, 세상이 내게 맞추게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가 느껴지더라고요. 구정태는 세상에 맞추는 사람이고, 한소라(신혜선)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게 하려는 사람이죠. 그 시작부터 흥미로웠어요. 앉은 자리에서 두 번 읽고 바로 출연하겠다고 전했습니다. 「한산」 이후 바로 참여하게 됐고요. 변태 연기를 정말 잘하신 것 같습니다. (웃음) 음흉한 변태 역에 딱 맞아떨어지게 연기하려는 게 제게 정말 재밌었어요. 대본을 보면 볼수록 범죄자라는 것이 정확하죠. 초반에는 관객에게 남을 관찰하는 취미를 가진 평범한 사람 정도로 인식되게 했는데, 중반부터 관객이 보기에 구정태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했어요. 내레이션이라는 장치가 큰 도움이 됐죠. 제 노력도 있었지만, 디테일에 강한 김세휘 감독님의 디렉팅이 좋았습니다. 김세휘 감독님이 변요한 배우의 ‘찐팬’이라고 하더라고요. 스스로를 ‘성덕’(성공한 덕후)로 소개하기도 했고요. 감독님이 제게 애정이 있어서 캐스팅하신 거 같더라고요. 제가 힙합씬 출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영화계에서 힙합씬이라고 하면 독립영화계를 뜻해요. 저도 독립영화계 출신이고, 김세휘 감독님도 그쪽에서 오래 작업하다가 이번 영화로 상업영화 데뷔를 하는 거고요. 거기서 저에 대한 어떤 이야기들도 들으셨을 테고, 뭔가 에너지를 보신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부분들을 이번 영화에 녹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현장에 아무리 혼란이 와도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배우와 스태프들을 이끌어주셨어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구정태는 SNS로 다른 사람을 스토킹하고, 고객의 집에 몰래 들어가기도 하죠. 그런데 변요한 배우가 연기한 구정태는 밉지 않고 귀엽습니다. 캐릭터 구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처음에 대본을 읽어보니 끝인상이 남는 영화더라고요. 평범하게 시작해서 점점 변태가 됐다가 마지막에는 범죄자로 끝나죠. 대본을 다 읽은 다음에 처음 생각한 건 ‘범죄자로 시작해보자’였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범죄자로 보이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지점인 변태로 해볼까? 했는데 이것도 안 맞았어요. 와, 구정태라는 인물이 정말 까다로운 캐릭터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시작하는 캐릭터를 평범한 사람으로 잡았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스릴러적인 부분은 신혜선 배우에게 다 맡겼어요. 김세휘 감독이 상상한 구정태는 친구가 별로 없었을 거라더라고요. 친구가 없으니 어릴 때도 개미만 관찰했을 거 같다고요. 그래서인지 성인 구정태의 집에는 거대한 개미굴이 있죠. 고객 집에서 빼온 사진들을 보관하는 창고도 있고요. 이런 캐릭터는 처음일 텐데 대본을 받고 기분이 어땠나요? 어항, 수족관이 있는 집은 있는데, 개미집을 벽 하나에 설치한 사람은 저도 처음 봤죠. 조사도 해보고, 개미 키우는 사람들을 보는 등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런데 이런 설정이 추상적으로 의미가 있더라고요. 개미집도 결국은 사회잖아요? 그 안에 규율이 있는 거고요. 죽은 개미가 저라고 생각했기에 독특하게 감정을 몰입할 수 있었어요. 그런 디테일한 장면들을 고안해낸 걸 보면 김세휘 감독님은 정말 천재입니다. ‘휘테일’이에요.(웃음) 구정태는 관음증이 있는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영화 주제가 숨겨져 있는 거 같아요. SNS를 통해 누군가를 지켜보는 시선과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등등이요. 우리 모두는 사회구성원으로 눈치를 보고 살아요. 좋은 눈치, 배려도 있죠. 구정태는 잘못됐죠. 선을 넘었잖아요. 영화에서 SNS로 표현된 부분은 ‘시선’의 문제라고 봤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상이 나를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인가 하는 문제죠. 저는 배우니까 직업적으로 사람들을 관찰해요. 연기할 때도 선배 배우들의 장면을 멀리서 관찰합니다. 이런 건 괜찮아요. 한 작품이 잘되어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팀이니까요. 그런데 너무 남의 시선을 타는 건 줏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대로 너무 시선을 따라오게 하려는 건 나르시시즘일 수도 있죠. 둘은 어쩔 수 없이 공존해요. 너무 무시하면 꼭 사고가 나더라고요. 시선에 대한 관점은 평상시 잘 정리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우 변요한도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요? 배우는 대중의 관심이 중요한 직업이죠. 사랑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작품 선택이 자유롭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눈치는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좀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 정한다거나, 역할 설정에 있어서 지키는 원칙이 있을까요? 어떤 작품이든 감독님들한테 정말 질문을 많이 합니다. 새벽에도 전화하고 아침에 눈 뜨고 전화하고.(웃음) 물론 그전에 허락은 받고요. 저는 시나리오를 쓴 사람도 아니고 연출도 아니니까 작품들의 세계관에 명확하게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감독님들에게 많이 묻는 편이죠. 그렇게 소통해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거고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어떤 역할이든 진심으로 하려고 합니다. 구정태가 죽은 개미를 들고 울 때도 진심으로 했던 것처럼요. 스스로를 관찰해 봤을 때 변요한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직 어떻다 라고 규정하고 싶지도 않고요. 다만, 그냥 집중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집중할 때 편협하지 않은 시선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집중한다는 건, 상대방도 제게 집중한다는 거겠죠? 그럼 둘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지거든요. 연기를 시작한지 10년이 넘었죠. 관찰력도 뛰어나다 보니 기억에 남는 선배 배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배 배우들은 사실 작품을 책임지는 간판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훌륭한 선배들이 많고, 또 무서울 정도로 강한 후배들도 많아요. 저는 「미생」의 한석율처럼 현장이 좋습니다. 아직도 배울 게 많죠. 구체적으로 어떤 선배에게 뭘 배웠다기보다는, 여러 선배들의 연기를 보면서 노하우를 조금씩 관찰했어요. 지금까지는 깊게 파고 들어가고 싶은, 훈련하는 마음으로 연기를 해왔던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 배우고 싶으니 더 깊이 들어가 보려는 마음이 컸거든요. 대충 고민하고 카메라 앞에 서면 절대 깊이 들어갈 수 없고 선배 배우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40을 앞둔 지금의 저는 조금은 차가워지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열정을 가지고 덤비는 게 아니라, 휴식의 시간을 주면서요. 인간 변요한은 언제가 가장 행복한가요? 반려견 하루랑 있을 때죠. 또 제가 편한 사람들이랑 있을 때요. 세상이 정말 빠르게 변해요. 오늘 하루 잘 보냈구나, 내일은 누가 나한테 연락할까? 궁금해하면서 사는 일상이 좋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좋다는 감정도 표현하면서요. 지금이 배우 변요한의 전성기인가요? 단 한 번도 지금이 제 전성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요즘 들어 연기가 더 재밌어요. 재미는 편협되지 않은 시선으로부터 오는 자유에서 느껴집니다. 30대 후반인 저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아 더 배우고 수련해야겠죠. 40대가 되면 진짜 제 모습이 나올 거 같아요. 시선이나 관계 정리도 좀 알고, 옳고 그름을 더 명확하게 아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210호
윤상민
2024-05-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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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나’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 사이에서 자기합리화하는 인간 본성 드러내고 싶었어요”
새로운 스타일의 스릴러 영화 「그녀가 죽었다」(감독 김세휘)가 5월 15일 관객을 만난다. 훔쳐보기라는 악취미를 가진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가 관찰하던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의 죽음을 목격하고, 살인자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한소라 주변을 뒤지며 펼쳐지는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다. 변요한 배우가 기존 필모그래피와 달리 ‘지질한 변태’ 역할을 맡아 찰떡 같이 소화했고, 미스터리하면서도 가식적인 인플루언서로는 신혜선이 분해 소름돋는 연기를 선보인다. 두 배우의 열연도 열연이지만, 이 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한 건 전적으로 김세휘 감독의 공이다. 내레이션의 적절한 사용, 영화의 전반부, 중반후, 후반부를 명쾌하게 나누는 설정 등 이번 영화로 데뷔하는 신인감독답지 않은 노련함이 영화 전반에 묻어난다. 주연을 맡은 변요한, 신혜선 배우 모두 ‘김세휘 감독은 천재’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김세휘 감독은 이번 영화의 기획 의도를 “남들이 모르는 걸 나만 알고 싶다는 나쁜 열망과 타인의 관심을 원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그리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관객의 집을 몰래 훔쳐보는 공인중개사와 남의 관심을 훔쳐 사는 유명 인플루언서라는 독특하고 신선한 설정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스크린 위로 끄집어 내고,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간다. “은밀한 욕망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자신을 투영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김세휘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오랜 연출부 생활 끝에 「그녀가 죽었다」로 데뷔하시네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개봉일을 앞둔 지금은 하루하루 꿈꾸는 거 같긴 해요. 시험을 쳤는데 아직 성적이 나오지 않은 기분이랄까요? 한편으로는 제가 며칠 슬프긴 했어요. 3년 동안 임시보호하던 새끼고양이가 주인을 만나서 떠났거든요, 그동안 입혀주고 먹여주던 새끼고양이가 드디어 주인을 만난 거고, 주인도 이뻐해 줄 텐데, 떠나보내는 마음이 행복하면서도 슬펐어요. 개봉 앞둔 마음이 이런 느낌이랑 비슷한 거 같아요. 「그녀가 죽었다」는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가요? 처음엔 간단한 로그라인부터 시작했어요.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신고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이 문장에서 시작된 거죠. 그 다음은 그렇다면 왜 신고를 못했을까? 이런 식으로 점점 이야기를 쌓아나가면서 만들었습니다. 시나리오 쓸 당시 『거짓말의 진화』라는 심리학 서적을 읽었어요. 자기를 정당화하는 사람의 본성이 뭔지 흥미롭더라고요. 저 역시 매일매일 합리화, 정당화하는 인간으로서, 외면하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이라 이야기에 녹이면 재밌을 거 같았습니다. 구정태와 한소라가 투톱입니다. 그런데 결국 두 사람 다 관객이 응원할 수 없는 캐릭터죠. 신인 감독으로서 주인공 모두를 비호감으로 설정하는 데 용기가 필요했을 거 같아요. 주변에서 우려도 많았을 것 같고요. 굉장히 많았죠.(웃음) 관객이 주인공 중 누구 한 명에게는 이입하고 가야 상업적으로 풀릴 수 있다는 우려였어요. 최대한 방어하기 위해 구정태는 나쁜 인물이지만, 자기 딴에는 선을 절대 넘지 않는 인물로 만들자고 설정했습니다. 이걸 엄격하게 지켰어요. 관객이 볼 때도 ‘그래’라고 할 정도로요. 극장을 나오면서는 범죄자라고 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요. 드라마에서는 바른 인물들이 나와야 극을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화에서는 주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면 부정한 인물이 나와도 충분히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구정태는 사실 범죄 행위를 일상처럼 하면서도 밉게 보이지 않습니다. 캐릭터 구축을 위해서 변요한 배우랑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설명해주세요. 시나리오에 그런 부분들이 표현돼 있다 보니, 변요한 배우도 준비를 많이 해왔어요. 리딩 때부터 톤을 어떻게 잡을지 논의해서,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고친 적이 없어요. 가이드라인 안에서 조금 자유롭게 연기한 정도랄까요? 조금 더 발랄한 버전으로 가면서 지금의 지질하면서도 귀여운 변태 구정태 캐릭터가 탄생한 거죠. 변요한 배우의 ‘찐팬’이시라고요.(웃음) 저는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변요한 배우의 전작들을 다 봤어요. 특히 단편영화 데뷔작 「토요근무」가 좋았어요. 어린 여자애가 혼자 있는 집에 케이블인지 TV인지를 설치하러 가는 기사 역할이었어요. 부모님도 안 계시는 집에 어린 여자애 혼자 있는데, 성인 남자가 혼자 간 거죠. 그럴 때 하나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 믿을을 주는 얼굴, 연기였어요. 사실 구정태에게 필요한 이미지가 그거였거든요. 변요한 배우라면 그런 믿음을 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물론 팬이었기도 했지만요. 한소라가 카페에서 남의 명품백으로 사진을 찍는 장면이나, 구정태 집의 개미집, 사진 창고 같은 디테일한 에피소드가 인상깊더라고요. 혹시 경험이 있으신 건가요?(웃음) 절대 아니고요.(웃음) 이 영화에서 저는 ‘쪽팔림’이 중요했어요. 한소라가 구정태를 처음 인식하는 순간은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이 아니에요. 남의 명품백으로 사진을 찍고 그것이 자신의 것인양 SNS에 올리는 모습을 구정태가 봤을 때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비웃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 한소라의 분노가 시작된 거죠. 에피소드들은 어디서 찾으셨나요? 혼자 생각했어요. 구정태와 한소라는 결국 제가 만들어내는 캐릭터고, 저의 성격에서 따와야 하는 거잖아요. 제가 아직 독립을 못했거든요. 혼자 살게 되면, 어떤 집이 좋을까? 하면서 ‘직방’ 같은 앱에서 집구경을 많이 해요. 좋은 의도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쁜 의도로 보기도 할 테고요. 구정태를 상상하면 어릴 때 친구가 없었을 거 같아요. 그럼 개미 잡고 놀았을 텐데, 개미가 땅 속 집으로 들어가면 볼 수 없으니 궁금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른이 돼서 집에 개미집을 만들지 않았을까 이렇게 하나씩 쌓아간 거죠. 또 자기는 선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필름카메라가 아니라 한 장밖에 없는 원본을 불태우면 사라지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쓸 거다, 또 남의 집에서 없어져도 상관 없는, 쓸데 없는 물건 가져온다, 그 댓가로 집을 수리해주는 거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자기합리화 하는 에피소드들을 만들어간 거죠. 내레이션을 활용한 연출이 눈에 띄더라고요. 이는 관객이 영화를 보는 방식도 관음적인 시선으로 변화시키는 거 같아요. 이점에 대해서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제가 좀 관음증적 성향이라는 게 아니라요.(웃음) 제가 보고 싶은 모습들을 시나리오에 적다 보니 좀 자연스럽게 나온 거 같아요. 캐릭터가 이상하지만 저는 애정 갖고 써야 하니까 계속해서 말을 하게끔 만든 거 같고요. 관객들도 그렇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식적인 인플루언서 한소라 역에 신혜선 배우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성격 좋고 연기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영화사 대표님 추천을 받고 필모그래피를 다 봤죠. 인플루언서니까 사랑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KBS 드라마「아이가 다섯」에서 연두 역할을 했던 걸 보니 너무 사랑스러운 거에요. 영화 「결백」(감독 박상현, 2020)에서는 스릴러적인 얼굴도 보여주고 입술 떨림도 잘 했어요. 캐스팅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물론 한소라의 ‘도라이’적인 면모까지 이렇게 잘 표현해주실 줄 몰랐어요. 그래서 소름이 돋았고요. 사실 자기연민하는 자력구제형 인간, 그러니까 스스로를 가장 불쌍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가장 자신을 사랑하거든요. 그런 인간이 타인에게 얼마나 잔혹하고 무감각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바로 한소라인 거죠. 구정태는 전사가 없는데, 한소라는 과거를 보여줍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한소라도 처음에는 뺄 생각이었어요. 영화를 여는 화자가 구정태니까 따로 전사를 안 넣어도 관객이 충분히 이입해서 따라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후반부에 화자가 한소라로 바뀌는 순간관객이 새 인물에게 이입해야 하는데, 전사가 없이 들어가닌 너무 이입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한소라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길래 이렇게 뒤틀린 인간이 된 건지를 알려줘야 했어요. 그래서 전사가 필요했습니다. 변요한, 신혜선 두 배우 연기에 대한 만족도는 얼마인가요? 하늘에 맹세코 ‘내 생각보다 더 잘하는데?’였습니다.(웃음) 구정태라는 인물이 결코 쉬운 캐릭터가 아니에요. 어느 정도까지를 표현해야 할지 선을 고민해야 하는데, 변요한 배우는 정말 많이 고민해왔어요. 변요한 배우가 해온 걸 보고 감탄하면서 ‘저는 이 정도 선이요’라고 선택만 하면 됐죠. 신혜선 배우는 정말, 마지막에 모든 걸 내려놓는 얼굴 장면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요. 제가 후반작업 하면서 영화를 1천 번은 본 거 같은데요.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이 영화로 데뷔하신 건데요. 전혀 신인감독 같지 않아요. 구조의 신선함, 내레이션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화자를 바꾸는 것까지 놀랍습니다. 뭘 몰랐던 거 같아요.(웃음). 사실 영화사 대표님이 걱정을 많이 했어요. 시나리오 3고를 쓰고야 캐스팅에 들어갔거든요. 대표님이 1고를 보시고는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하셔서 주변 의견을 구해서 2고를 썼어요. 근데 제가 봐도 재미가 없더라고요. 특색도 없고요. 그래서 제 버전으로 훨씬 재밌게 써보자 해서 3고가 나왔어요. 대표님은 여전히 모르겠다 하셨는데, 주변 매니지먼트 관계자들에게 보여주니 반응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먹힐 수 있겠구나 했죠. 2고 때는 훨씬 구정태 중심적인 구조였어요. 고모도 나오고 그랬죠.(웃음) 원래부터 영화 감독을 꿈꿨던 건가요? 원래는 글 쓰는 사람이 꿈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KBS 단막극 공모전에 원고를 냈어요. 너무 좋더라고요. 고등학생 때는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부산청소년연극제에 극본을 써서 상도 받았고요. 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아, 내가 좀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전공은 경제학이더라고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예술대학을 선택할지 고민이 많았죠. 만약 영화 관련 학과를 가면 너무 특화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여긴 승자독식의 세계니까요. 그래서 플랜B로 취업이 잘 되는 경제학과를 선택했습니다. 동국대에 영화 강의가 많으니 청강을 하면서요. 졸업할 즈음에는 다른 직업을 갖지 말고 영화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런데 경력이 없으니 아무 현장에서도 불러주지 않더라고요. 지원해도 떨어지고요. 저예산부터 시작했죠. 시나리오 회의에도 참가시켜주고 저를 믿어주는 곳으로요. 제가 일을 좀 잘하거든요.(웃음) 선배들이 감독들을 소개해줘서 점점 더 큰 작품으로 갔어요. 한 작품 하고 모은 돈으로 생활하고, 시나리오 쓰다 돈 떨어지면 다시 연출부 생활을 하고요. 두 배우가 김세휘 감독은 천재라고 입을 모으던데요. 제가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일했거든요. 그러니까 편집에서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웃음) 테이크는 몇 번 안 가더라도, 정확한 연기의 오케이컷이 넘쳐난다면, 편집에서 리듬감은 충분히 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들 말한 것 같아요. 언론시사회 이후 리뷰 기사들은 좀 보셨어요? 다 스크랩했습니다.(웃음) 너무 좋아서요. 솔직히 제 작품에 단점 없어서 그리 써주시는 건 아닐 텐데요. 응원의 마음으로 좋게 써주신 기사들이 너무 고맙더라고요. 지금까지는 내 새끼고양이여서 저는 재밌지만 남들은 어찌 볼지 전혀 감을 못 잡았는데, 정말 기대도 못했던 좋은 기사를 많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좋은 평도 다 보고 스크랩해요. 물론 좋은 기사를 위쪽에다 배치하고요.(웃음)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제일 좋아하는 건 공포물, 스릴러에요. 그런데 인생영화는 「타이타닉」(감독 제임스 카메론, 1998)입니다.(웃음) 100번 넘게 봤는데 100번 다 재밌더라고요. 차기작은요? 쓰고 있는 건 시리즈물이에요. 판타지 사극 액션!(웃음) 언제 세상의 빛을 볼지 모르지만.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저에게는 로맨스 감각이 너무 없어요.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쓸 때마다 멜로 감성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 거 같아요. 「라라랜드」(감독 데이미언 셔젤, 2016)를 엄청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거랑 잘 할 수 있는 거랑 다를 수 있는 거죠. 「그녀가 죽었다」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인간 본성입니다. 누구나 자기를 합리화하는 본성을 갖고 있어요. 누구나 자기 행동의 이유와 변명이 있고요. 그런 걸 이야기하기에는 일반적인 사람보다 뭔가 좀 다른 사람들로 캐릭터를 만든 거죠. 그들도 자기 이유가 있다고 하면 그 본성이 더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SNS가 그런 본성을 만들었다가 아니라 그런 본성이 발현되도록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절대 알 일이 없던 사람을 SNS로 가깝게 지내게 된 거잖아요? 평생 말 안 섞을 사람도 소통하게 되면서 꾸미고 싶다는 본성이 나타났고요. ‘내가 아는 나’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 사이에 간극이 생기는 거죠. 사람들은 자기합리화와 정당화로 그 틈을 메우고 있는 거고요. 그런 본성의 발현을 아예 극단에 있는 사람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뷔작 「그녀가 죽었다」가 관객에게 어떤 평을 받으면 좋을까요? 영화 끝나고 친구 손 잡고 ‘야, 이거 재밌는데?’라고 말하면 좋겠어요.
210호
윤상민
2024-05-1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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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단순히 꽃 심는 곳 아닌 치유와 소통의 장”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서울 아산병원, 경춘선 숲길,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 전당, 오설록 티 뮤지엄, 성수 디올을 하나로 관통하는 키워드는?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 정영선 조경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1973년 처음 설립된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 졸업생이자 최초의 여성 기술사다.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우리 전통 미학에 뿌리를 두고, 공간이 간직한 특성과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 고려하는 작품관으로 ‘땅에 시를 쓰듯’ 아름다운 공간들을 만들어왔다. 202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조경계 최고 영예상인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했다. 「땅에 쓰는 시」는 건축 다큐멘터리스트 정다운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정체성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온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의 삶을 담은 「이타미 준의 바다」, 출판인들의 꿈과 건축인들의 이상을 실현시킨 문화생태 유토피아 ‘파주출판도시’의 탄생을 그린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를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서 정 감독은 수직과 수평으로 패닝하는 카메라로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공간을 지나가는 사계절을 서정적으로 담아냈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 전당 같은 내 인생의 수많은 중요한 공간들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번 영화는 내게 운명적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하는 정 감독을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건축’을 주제로 한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 ‘조경’에 집중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영화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건축으로 대학원을 갔어요. 그 후 두 편의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었죠. 세 번째 주제로 조경을 선택한 이유는 자연과 공간의 관계성 안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전달하기 위한 조경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영선 조경가와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2018년에 당시 70대 후반이었던 선생님을 처음 뵀어요.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늘 최고,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셨던 분인데 유머러스하고 호방한 스타일에 반했죠. 저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교동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강남으로 이사왔어요.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 양재천이 절 지켜줬습니다. 과연 영화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에는 예술의 전당에 가서 살았고요. 그 외에도 선유도공원이나 올림픽공원 등 제가 위로를 받았던 모든 공간을 정영선 선생님께서 만드셨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번 작업은 그야말로 운명이란 느낌을 받았죠. 대가들 중에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리는 분들이 많아요. 올 초에 「어른 김장하」를 연출한 PD와 기자를 인터뷰했는데, 역시나 섭외가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정영선 조경가는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처음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죠. 당신이 기자 출신이기도 해서 그런지 언론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세요. 인터뷰도 잘 안 하셔서 자료도 별로 없었죠. 매번 도망을 다니셨지만, 제게는 무기가 있었어요. 이 영화는 선생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조경의 미래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선생님의 철학을 전달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담은 영화라고 설득했죠. 사계절을 담은 영화 구성이 독특합니다 조경가는 삶 속에서 자연의 요소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연의 계절적 변화’라는 기본 특질을 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처음부터 구상했던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이 싹트는 봄부터 녹음으로 가득 찬 여름, 무르익은 색채 너머 휴식을 기다리는 가을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을 준비하는 겨울까지, 영화에서는 정영선 선생님의 앞마당부터 남녀노소가 즐기는 대규모 공원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개인 정원 등의 고유한 경치를 계절에 따라 온전히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영화를 보면 조경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정영선 조경가의 작업은 화려하지 않아요 8cm로 규격화된 꽃이나 나무를 심는 공공기관의 조경과는 완전히 다르죠. 건축과 공간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면서 자연의 요소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조경’이라는 분야가 얼마나 강력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저 역시 영화 작업하는 5년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정영선 조경가의 조경 철학을 공유해주신다면요 조경은 특정한 순간이 아닌 거시적 관점이 미래를 바라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 가치 있고 매력적이죠. 정영선 선생님은 조경가의 역할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것을 더욱 아름답게 번영시켜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정원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꽃을 심고 나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장이자 자연을 보살피고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란 이야기죠. “바다는 바다대로,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 아름답다”, “생동하는 녹색일 때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겨울의 자연도 봄의 자연도 모두 아름답다. 자연에는 한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다”라고도 말씀하세요. 우리 땅을 매만지는 선생님의 사랑의 손길이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같은 작품으로 태어났고, 그것이 바로 선생님의 조경 철학인 ‘땅에 쓰는 시’입니다. 정영선 조경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조경은 정원 안에 다양한 식물을 심는 것이 아니다. 주변 경관과 맞아야 하는데, 담 너머 흐르는 물이나 산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느끼고, 시를 읊고, 생각할 수 있는 옛날 선비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고유의 경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우리는 우리의 좋은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커요. 종종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분들이 서양 스타일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하던 시절이 꽤 길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경관의 아름다움을 개발 논리로 무시했던 부분도 있고요. 저는 우리의 것을 기본에 두고 그 위에서 더 나아가는 아름다움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영선 선생님의 철학과 뜻이 미래세대에 잘 전달되도록요.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제 영화는 ‘미래 세대에 대한 연서’이거든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번 영화를 보시고 우리 경관과 조경의 소중함을 느끼시면 좋겠어요. 한국 경관이라는 것, 우리의 자연적 요소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지를 정영선 선생님의 시선과 목소리로 잘 느껴지길 바랍니다.
209호
윤상민
2024-05-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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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는 관객이 세상을 움직이길 원하는가?
[영나물 리뷰] 영나물은 ‘영화가 나에게 물었다’의 줄임말로 최근 개봉한 영화에 대한 리뷰로 꾸민다. 한 편의 영화에는 하나의 세상이 담겨있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나물 리뷰’는 영화가 던지는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정답은 없다. 백 명의 관객에게서 백 개의 영화평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기에. 세상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면서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씨네마 레터!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일본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46세)이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돌아왔다. 국내에서는 3월 27일 개봉 후 예술 영화로는 드물게 개봉 한 달 만에 4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4월 25일 기준).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이번 신작은 전작들과 많이 달라졌다. 그 변화를 해석하기에 앞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사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도쿄예술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큐어」(2022)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그의 스승이다. 기요시 감독과「스파이의 아내」(2021) 각본을 공동집필하면서 이미 타고난 이야기꾼의 면모를 선보였다.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건 제68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해피 아워」(2015) 주인공 4명 모두에게 공동 여우주연상을 수여하면서다(국내 개봉은 2021년). 러닝타임은 무려 5시간 28분. 4개의 챕터로 구성된「해피 아워」는 연극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4편을 이어 모은 TV 시리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척이나 긴 러닝타임 내내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대사들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은데, 각 챕터들은 다른 듯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종국에는 이 모든 대사들을 지나온 관객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희망을 선사한다. 그것이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장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을 국내에 처음 알렸던 영화이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됐던「아사코」(2019)에서도 변주됐다(봉준호 감독 역시 이 영화를 보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입덕’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거장 반열에 오른 때는 의심의 여지 없이 2021년이다. 이 해에 그는 두 편의 영화,「드라이브 마이 카」로 제74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우연과 상상」으로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드라이브 마이 카」는 제94회 아카데미영화상에서 4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고,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일본 영화 중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처음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역시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대사의 향연이 펼쳐지는 그의 영화를 몇 줄 시놉시스로 설명하기는 늘 어렵지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연출가 겸 배우인 남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작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부부다. 남편은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지만, 그 이유를 채 묻기도 전에 아내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여기까지가 40분 분량의 오프닝 시퀀스다!). 2년이 지났지만, 가후쿠는 여전히 아내가 녹음한 대사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며 연습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히로시마연극제에 연출로 초청받으면서 그의 완벽했던 루틴에 균열이 생긴다. 규정상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자신의 차를 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사키에게도 아픔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슬픔이 그의 전작들처럼 끊임없는 대사에서 표출되고 펼쳐지면서 영화는 치유와 화해의 장으로 달려간다. 이 과정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장기인 ‘연극 차용’이 십분 활용된다. 그는 안톤 체홉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영화 속으로 가져왔는데, 배우들의 나이 설정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을 기용해 언어의 장벽마저 초월하는 파격적 시도를 한다. 개인적으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는「우연과 상상」역시 여러 이야기가 따로인 듯 하나인 듯 이어진다.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서 압박감마저 들만한 대사들로 가득 채워진 이야기들은 분절됐으면서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우연히 이어진 장면들은 관객을 인생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 소통과 성장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영화적 순간을 선사하던 감독의 달라진 질문 그렇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들에서 끊이지 않는 대사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때론 마법처럼 때론 기적처럼 넘어서면서 아름다운 영화적 순간을 선사해 왔다. 이제「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들여다보자. 도쿄 인근의 한 시골 마을에 한 회사가 글램핑장 건설을 추진한다. 회사는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연다. 프레젠테이션 주체는 자금난에 시달리는 연예기획사다. 화려한 언변에 PPT 몇 장으로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고 보수만 챙기면 되는 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주민들 반응이 냉랭하다. ‘글램핑장이 들어서면 야생 사슴은 어디로 갈까?’, ‘산 상류에서 발생한 오수는 하류에 사는 주민의 삶에 피해를 끼친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라면서. 연예기획사 직원 둘은 주민들 사이에서 ‘심부름꾼’으로 불리는, 그러니까 마을 주민을 설득할 키를 쥐고 있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타쿠미가 산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연의 숭고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는 자신들의 인생과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어진다. 화해의 장이 열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타쿠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가 실종되면서 영화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렇다면 신작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뭐가 달라진 걸까? 우선 러닝타임이 확 줄어들었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5시간짜리 영화를 찍었는데,「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러닝타임은 106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전달이 약하다거나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둘째로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전작에서는 카메라를 픽스(fix, 고정된 상태로 촬영하는 기법)한 상태로 대부분을 촬영했다. 카메라가 고정된 상황에서 배우들이 움직이고, 컷이 전환됐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4~5분간 카메라가 움직인다. 영화 곳곳에서 패닝(panning, 카메라를 고정한 채 좌우로 돌리는 기법), 트래킹(레일을 깔고 카메라를 이동하는 기법)을 사용하며 적극적으로 영화에 개입하는 카메라가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달라진 부분은 ‘영나물 리뷰’에 걸맞게 던진 거대한 질문이다. 그는 전작들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사회 구조와 정교하게 직조했다. 복잡하게 얽힌 개인과 사회를 특유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종국에는 기적적인 화해의 순간을 선사했다. 그랬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악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큰 질문을 던진다. 실제 글램핑장을 개발하려는 회사의 사장은 개발을 통해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연예기획사 직원 역시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주민들은 환경 오염이 우려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악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가장 일본적이라는 정토진종을 창시한 13세기 승려 신란의 ‘악인정기설’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원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취약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과연 악인은 없는 것일까? 악인이 되게 만드는 상황만 있을 뿐일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자연에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가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이런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영화의 결말 부분에 다다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총에 맞은 새끼 사슴과 그 곁을 지키는 어미 사슴. 둘을 바라보는 하나. 그런 하나를 바라보는 타쿠미와 직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스크린을 뚫고 고막에 꽂히는 총소리. 마치 자연의 등가교환 법칙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관객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일까. 미국 영화 매체 <데드라인(Deadline)>은 “답을 내리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질문을 던진다”라고 평했다. 결말부의 질문으로 그의 영화 세계는 한 차원 확장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관객 각자가 답을 찾아가도록,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움직이길 원하는가? 칸·베니스·베를린·아카데미 석권한 젊은 거장 한 예술가가 평생 창조해 낼 수 있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걸작을 연이어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칸, 베니스, 베를린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모두 수상한, 이른바 ‘그랜드 슬램’ 감독에 등극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 이어 두 번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그랜드 슬램 달성이 여든을 넘어서였으니, 올해 46세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다음 작품들을 기다릴 수 있는 동시대에 사는 우리는 축복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208호
윤상민
2024-04-2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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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시네필이 열광한 영화 12편, 필름으로 본다!
한국영상자료원(원장 김홍준, 이하 영상자료원)은 5월 14일(화)부터 5월 24일(금)까지 시네마테크KOFA(서울 상암동 소재)에서 1990년대 시네마테크의 대표작 12편을 90년대 개봉 당시 필름으로 상영하는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기획전을 개최한다. 김홍준 원장은 “이번 기획전은 상영작 전편을 1990년대 당시의 35mm 프린트로 상영한다는 점에서, 그 당시 우리말 번역 자막이 그대로 포함돼 있어 외화 자막 번역의 중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라고 밝혔다. 봉준호, 박찬욱, 류승완 감독을 비롯해 한국 영화 산업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1990년대 시네마테크와 시네필 문화를 돌아보는 강연과 대담을 통해 영화계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해 보는 부대행사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 1990년대 시네마테크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2000년대는, ‘문화학교서울’의 단골 회원이었던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로 시작하여 시네마테크의 효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를 거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 ‘노란문’과 ‘영화공간1895’를 경험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으로 그 문을 연다. 이들을 비롯해 현재 한국 영화산업을 견인하는 수많은 영화인을 배출한 1990년대 한국의 시네마테크는 영화공간1895, 문화학교서울, 씨앙씨에, 영화사랑과 같은 사설 비디오테크부터 대구의 영화언덕, 제7예술, 아메닉 및 대전의 컬트, 부산 1/24, 청주 씨네오딧세이,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 전주 온고을 영화터, 제주 영화만세, 평택 씨네마 드리밍, 부천 영화열망 등 지역성을 띈 영화 단체, 그리고 동숭시네마테크와 같은 예술영화관까지 다양한 지형을 포함한다. 이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공통점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영화 읽기’에 몰두하였다는 것이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여서, 수입 자체가 금지되어서, 재생 장치가 없어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지 못하던 이들에게 시네마테크는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 ‘시네마테크 운동’이었다.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기획전은 이처럼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으로서의 90년대 시네마테크와 시네필 문화가 갖는 의의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기획전은 당시 시네마테크 문화를 이끌었던 90년대 시네필과 현재 영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젊은 90년대생 시네필 간의 대담과 강연을 통해 영화계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보는 부대행사 또한 진행 예정이다. 1990년대 시네마테크의 전설이 된 12편 전편 필름 상영 이번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기획전은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 「천국보다 낯선」(짐 자무쉬, 1984) 등 12편의 상영작을 모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존해 온 1990년대 당시 35mm 필름으로 상영한다. 상영일정은 영상자료원 홈페이지(http://koreafilm.or.kr/cinema/program.asp)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모든 상영은 무료다. 그 중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문제작 「감각의 제국」은 최근 해외 학계를 중심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미복원판(Unrestored Version) 필름으로, 넷플릭스에 공개된 감독판 내 모자이크 처리 장면들과 비교하여 90년대 당시 검열 지점을 살펴볼 수 있게끔 할 것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과 「커피와 씨가렛」 또한 1995년 동숭시네마테크 개관 당시 35mm 필름으로 영사 예정이며 90년대 예술영화 수입을 주도했던 영화사 백두대간의 로고가 박혀있는 역사적 사료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 상영작인 1991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라스 폰 트리에의 주요 초기작 「유로파」(1991), 컬트 돌풍을 일으켰던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1977), 형식 실험주의자로서 영화적 관습을 파괴하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1982),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에게 제4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선사한 「안개 속의 풍경」(1988), 1970년대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등 12편 전편이 35mm 필름으로 상영된다. 이들은 모두 90년대 당시 거듭 복사되어 열악한 화질의 비디오로 탐구되던 영화들인 동시에, 이후 예술영화관과 영화제에서 정식 필름 상영되면서 다시금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작품들이다. 90년대 시네마테크 ’문화학교서울‘에서 활동했던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은 “이번 기획전은 그 시절 시네마테크에서 열화된 화질의 비디오로 시력테스트 하듯 겨우 영화를 봤던 수많은 시네필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며 “특히 전 작품을 필름으로 상영한다는 점에서, 당시 절대 필름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영화들을 필름으로 만나는 감동이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밝혔다.
208호
윤상민
2024-04-30 0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