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질병과 세계사」 11회(19세기 유럽의 콜레라 유행: 근대적 공중위생과 역학의 탄생)에서 다뤘듯이, 유럽의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근대적 공중위생과 역학이 탄생했다. 이후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에 의해 석탄산을 이용한 소독법이 개발(1867)되고 ‘세균학의 아버지’ 코흐(Robert Koch, 1843∼1910)에 의해 콜레라균이 재발견(1883)되면서 더 효과적으로 콜레라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콜레라의 침공 이후 한 세기도 되지 않아 콜레라의 치명적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발전한 위생과 방역 체계를 식민지 확장에 동원하기도 했다. 비서구 국가 중 유일하게 이 대열에 합류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822년 처음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858년 제2차 유행이 일어나자 당시 에도(江戶) 막부의 요청으로 나가사키(長崎)에서 서양 근대의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네덜란드 해군 군의(軍醫) 폼퍼(Johannes Lijdius Catharinus Pompe van Meerdervoort, 1829∼1908)의 제안에 따라 신선식품 식용 금지 등의 시책이 마련되고 의학자들도 콜레라 대책을 궁리하며 여러 의서를 출판하는 등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1868년에 성립한 메이지(明治) 신정부는 1877년의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감염병 방역을 제도화해 검역, 격리, 소독 등을 철저히 실시하고 상하수도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콜레라의 유행을 상당 수준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1907년 한국의 의사(醫事) 행정을 장악하고
콜레라 유행을 빌미로 방역주권을 침탈함으로써

국권의 완전한 탈취에 3년 앞서 ‘보건의료의 한일병탄’을
완성했다. 이를 직접 지시한 것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주역으로서

보건의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밀어붙인 ‘보건의료의 한일병탄’
그런데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히 추진된 일본의 근대화에는 ‘정한론(征韓論)’이 내재해 있었다. 실제 일본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를 발판으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했고,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1904)와 을사늑약(1905)을 차례로 체결하며 한반도 침탈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과정에서 무엇보다 신속하게 추진된 것은 보건의료 분야의 장악이었다.
위생이 ‘문명’의 잣대라는 인식 아래 그것은 한반도 식민지화와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에 불가결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부산에 한반도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이 설립된 것을 필두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이 속속 생겨났고, 일본인 의사는 근대 서양 의술을 선보이며 조선 의료 근대화의 주역이라 자부했다. 그러나 그들이 운영하는 병원은 일본인을 위한 시설이자 조선 식민지화를 위한 발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적극적으로 보건의료 근대화를 추진했다. 1885년에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했고, 국책 사업으로서 우두(牛痘)와 해관(海關)을 통한 해항 검역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886년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검역지침 「현의불허온역진항잠설장정(現議不許瘟疫進港暫設章程, 줄여서 ‘온역장정’)」을 제정했다. 1894년에는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검역규칙」과 「호열랄(콜레라)병예방규칙」을 비롯한 근대적 위생 제도를 마련했다.
1897년에 성립한 대한제국 정부도 광제원(廣濟院, 1899), 의학교(1899), 대한적십자병원(1905) 등을 세우며 보건의료 개혁을 이어갔다. 하지만 한반도 침탈을 노리는 일본은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한국의 행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통감부(統監府)는 1907년 ‘보건의료의 한일병탄’을 단행한다. 보건의료의 효율적인 장악을 위해 광제원, 의학교, 대한적십자병원을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축소·통폐합함과 동시에, 콜레라 유행을 빌미로 강압적인 방역 체계를 급조한 것이다.
1907년 여름, 청(淸) 남부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해 상해(上海), 천진(天津), 안동현(安東縣) 방면으로 유행이 번졌고, 7월 24일 상해에서 출발한 기선(汽船)을 통해 일본 전역으로 확산했다. 한반도에 인접한 중국 안동현과 해상 교통으로 긴밀히 연결된 일본 모지(門司) 지역이 유행지였기 때문에 콜레라의 한국 침입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9월 초 안동현으로부터 신의주, 의주, 용암포 등지에 콜레라가 유입됐고, 한성(경성)에도 모지를 거쳐서 온 일본인을 통해 9월 16일 이후 콜레라가 퍼지게 됐다.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군의부장 육군 군의감 후지타 쓰구아키라(藤田嗣章, 1854∼1941)가 통감부에 콜레라 박멸 건의서를 제출했고, 경시총감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1856∼1911)는 한국 정부의 비용으로 경성의 첫 콜레라 환자가 나온 죽동(竹洞, 현 을지로 2∼3가 일대) 부근 중심의 임시 방역 활동을 지시했다. 순사가 동원돼 발병 여부 조사가 이뤄지고 환자가 나오면 소독 및 격리와 더불어 그 부근에 교통 차단 조치가 단행됐다.
죽동 부근의 유행은 잦아들었지만, 일본인 거주지는 오히려 “만연 및 창궐의 기세가 오르고” 있었다. 9월 28일에는 인천에 환자가 발생했고, 그즈음 부산에도 유행의 조짐이 보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한 악몽
도쿄에 체류하다 10월 3일에 경성에 도착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에게 이런 상황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자신이 추진한 일본 황태자(요시히토(嘉仁) 친왕, 훗날 다이쇼(大正) 천황)의 방한 시기가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 통치 구상의 실현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벤트였다.
군의부장 후지타가 “무제한의 비용과 독재권을 허락해 주시기만 하면 2주일을 기해 박멸할 수 있다”라고 하자 이토는 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 이후 3·1운동 당시 조선 총독)를 통해 즉각적인 방역 조치의 실행을 명했다. 제13사단장 육군 중장 오카자키 세이조(岡崎生三, 1851∼1910)를 총장,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佐藤進, 1845∼1921)를 고문, 후지타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 1866∼1945)를 부총장으로 하는 임시방역본부가 설치되고 임시방역규정 등이 마련돼 10월 5일부터 본격적인 방역 활동이 개시됐다.
이는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기 전에 콜레라를 종식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무력으로써 강제할” 방침의 ‘군대식’ 방역이자 철저한 육군 통제 하의 체계였다. 일본과 한국 정부로부터 신속하게 예산을 확보한 임시방역본부는 하루아침에 총인원 2천154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으로 변모했다.
방역 활동은 오물과 쓰레기 처리, 환가(患家) 부근의 소독, 교통 차단, 우물 폐쇄와 급수, 강제 이주, 음식물 단속, 검병적(檢病的) 호구 조사, 선박 및 기차 검역 등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급조된 조직이 제대로 기능할 리 없었다. 방역 업무의 핵심 중 하나인 석회의 살포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적지 않았”고, 비용을 부당하게 청구하는 경우가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으며, 평양에서는 방역본부의 전보를 잘못 이해한 평양 여단장 육군 소장 오노데라 미노루(小野寺實)가 돌연 계엄령을 내려 시내의 과반이 봉쇄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집에 들이닥친 순사에게 양쪽 뺨을 맞은 부인과 하룻밤에 목욕을 다섯 차례나 강요당한 이들이 대변하듯 대민 방역 활동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집행됐다. 또 일반인의 행동을 통제하기만 할 뿐, 피해에 대한 구제는 요원했으며, 대책 없는 규제로 집집마다 오물이 넘쳐 오히려 위생적으로 열악해지는 상황도 연출됐다.

군사적 색채 드리워진 ‘방역 시스템’
그런데도 일본 황태자가 방문할 경성과 인천 지역에서는 임시방역본부의 활동이 시작된 10월 5일 이후 공식적으로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본부가 꾸려지자마자 유행이 멈추다니? 물론 전국적 방역의 효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결과론적으로 경인 지역의 방역 ‘소동’은 ‘뒷북’이었다. 10월 16일, 일본 황태자는 예정대로 인천에 상륙해 경성에 머문 뒤 20일에 한국을 떠났다. 방역의 ‘목적’이 달성된 이튿날에 평양과 부산 지역을 제외한 방역 사무는 많이 축소됐고, 23일에는 모든 사무가 육군 군의부로 이관됐다.
그해 콜레라는 평양 지역의 유행을 끝으로 11월 21일에 종식됐다. 육군이 주도한 1907년 임시방역본부의 군사적 성격은 1909년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다시 설치된 임시방역본부에 계승됐고, 헌병대의 역할은 더 증대됐다. 다른 한편으로, ‘평시’ 위생 상태의 개선을 위해 1907년 12월에 발족한 한성위생회(漢城衛生會)에도 군사적 색채가 짙게 드리워졌다. 일본 육군 주도의 무단적 식민지 방역 체계가 한일병탄에 앞서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1907년 한국의 의사(醫事) 행정을 장악하고 콜레라 유행을 빌미로 방역 주권을 침탈함으로써 국권의 완전한 탈취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의료사』등을 쓰고,『정의의 아이디어』『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을 옮겼다.에 3년 앞서 ‘보건의료의 한일병탄’을 완성했다. 이를 직접 지시한 것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주역으로서 보건의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레라의 위협 속에서 자국 황태자의 안위보다도 자신의 정치 생명과 식민 통치의 기틀 마련에 중점을 둔 그의 ‘혜안’은 이후 약 38년간 빛을 발했다. 아니, 제국주의의 망령과 함께 악질적인 ‘역사수정주의’가 횡행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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