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일은 각자가 지닌 고유한 것을

상호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도록 해주는 통로이며,

꺼내놓은 것으로 서로를 위해

마법의 식탁을 차려내는 일이다.

내가 상대로부터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그가 말한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서 깜짝 놀라는 경우들이 있다. 그가 전달한 내용 자체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한 그 나름의 의견과 태도가 내 인식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많은 부분이 망실되고, 내 인식에 들어온 것마저 어쩐지 적잖이 뒤틀려 버린 것이다. 그나마 이런 자각은 내가 뒤늦게 깨닫게 된 몇몇의 경우를 통해서일 뿐, 모르고 지나친 수많은 경우들은 어쩔 것인가.   


‘더 잘 듣는 5가지 방법’이라는 테드(TED) 강연에서 줄리언 트레저(Julian Treasure)는 우리가 대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듣는 데 할애하지만 듣기 능력은 보잘 것 없어서 평균적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그중에서 25% 정도라고 한다.


이것이 ‘겨우’인지 아니면 ‘그만큼이나’인지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이 정도면 우리 모두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일정 부분 안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야말로 상호간의 지속적인 대화가 그만큼 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트레저는 오늘날의 세태에서 점점 더 대화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방송이 될 정도로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줄면서 듣기 자체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진단은 우리 사회가 기반을 둬야 할 상호간의 이해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런 한편, 아무리 상대가 귀를 기울이고자 해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인터넷이나 TV 등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거나 상식적인 내용이며 그마저도 하위 버전일 뿐이라면, 상대가 내 말에 귀 기울이는 노력을 도덕적 의무처럼 지속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역시 일찍이 19세기에 신문에서 읽었거나 이웃에게서 들은 게 아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거의 만나기 어렵다고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소로의 취지는 상대에게서 들을 만한 이야기가 없으니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을 접자는 게 아니라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각자가 자기 자신의 내용을 자신의 말로 꺼내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단순히 주워들은 이야기를 넘어서 각자가 겨우겨우 힘겹게라도 자신의 것을 꺼내놓을 때까지 기다리며 들어주는 일이다.


따라서 듣는 일은 각자가 지닌 고유한 것을 상호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도록 해주는 통로이며, 꺼내놓은 것으로 서로를 위해 마법의 식탁을 차려내는 일인 셈이다.


물론 그런 마법이 금세 이뤄질 수는 없다. 당장 우리 가까이에, 다른 이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무척 중요한, 나 자신의 어떤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우리 앞의 상대에게 귀 기울여주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있을까.


열심히 알아들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못 알아듣고 놓쳐버린 것은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끼어영어영문학과 교수들 순간을 기다리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상대의 말을 전체적으로 다 듣기도 전에 그중 어떤 부분에 반박할 내용을 생각하느라, 그저 맥락에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고르느라, 사실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주제넘게 나서서 아는 척 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놓쳐버린 그 말들은 어쩔 것인가.


하여, 오늘도 다짐해보는 나의 듣기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