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인·세계와의 화해 방법, 그 지혜는?”   동양철학에서 ‘어질다는 것’과 ‘지혜로운 것’은 동격 지혜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서 벗어나는 것   방송대 학우님들 모두 중간과제물을 제출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깊어 가는 가을, 위클리는 동양철학의 세계로 학우들을 초대합니다. AI 시대에 공자 말씀, 맹자 말씀이라니 너무 시대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끼는 학우님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동양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동양철학에서 어떤 지혜를 배워야 할지에 대해 문화교양학과 진보성 교수님을 만나 그 의미를 들어봤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같이 들어보실까요?   고서정 기자 human84@knou.ac.kr 과제물에서 주로 공자의 인, 군자에 관한 내용을 강조하셨습니다 공자는 평생을 인간다움, 인(仁)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힘쓴 사람입니다. 인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인간의 알맹이, 씨앗입니다. 군자는 그 가치를 실천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죠. 인간의 본성, 즉 근원을 공자가 말했고 근원을 밝히는 자가 군자이니 둘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의 바람직한 ‘시민’의 상에 ‘군자’의 면모를 투영하고 싶습니다. 시대의 차이는 있으나 삶에서 인간다움을 찾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타인과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람 냄새나는 삶을 지향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문화교양학과 교과목인「고전 함께 읽기」에서『논어』를 읽고,「동양철학산책」에서 두 개의 장에 걸쳐 공자의 철학을 개괄하는 이유는 옛것을 알아서 지금 새롭게 다시 새기자는 의미죠.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뭘까요 인이라고 하는 게 ‘사람 인[人]’과 ‘둘 이[二]’가 합쳐진 것으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말하죠. 인간다움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소통 능력이죠. 남의 고통을 봤을 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경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고 말했잖아요. 공자가 얘기하는 인을 직접 말한 거죠.   인류에게 동양철학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라는 과제를 내셨는데요 철학이 현실 문제에 개입해서 설명하지 못하면 큰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을 해야 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끌어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전쟁이 터지는 세계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과제로 제출했죠.   인간성의 상실, 물질 만능주의, 기후위기 등 인류가 직면한 과제들이 많은데요 철학은 답을 주기는 어렵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핵심을 환기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경계하거나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절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대와 인물에 따라 학술적 근거는 다양하지만, 무한한 욕망에서 해방돼야 ‘유한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관점은 일치하거든요. 특히 동양철학에서는 개별 인간의 존재를 얘기하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동양철학은 이른바 관계론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서양철학이 계속 실패했던 나와 타인, 나와 세계 간의 화해 방법을 동양철학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죠.   동양철학 하면 주역과 연결해 생각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동양의『주역』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사고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주역』은 읽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주역』은 인간 삶의 굴곡진 여러 경우의 수를 64개의 패턴으로 나눠 펼쳐 놓은 책으로 가장 높은 지점의 괘와 가장 낮은 지점의 괘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장 높으니 좋은 괘이며 가장 낮으니 나쁜 괘라고 규정할 수는 없죠. 왜냐하면, 가장 높은 경우가 나왔을 때는 ‘앞으로는 계속 나빠질 것’을 암시하며 가장 낮은 경우가 나왔을 때는 ‘앞으로는 계속 좋아질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옛 철인(哲人)들은『주역』을 통해 자기 삶의 굴곡진 편차를 최대한 줄이려는 삶을 지향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리거나 튀는 것을 막는 반성적 사고지요. 철학적 사고는 해석이 중요합니다. 해석은 태도입니다.   동양철학은 수양을 통한 덕을 중시해 지혜로운 자보다 어진 사람을 높이는 걸로 보입니다. 어질게만 살다가는 이용만 당하는 건 아닐까요 수양은 현실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입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참는 것, 이기적인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트는 것도 수양입니다. 우리는 성인(聖人)을 가장 높은 인간형으로 봅니다. ‘聖’자는 귀가 큰 사람을 형상한 글자입니다. 자기 얘기를 떠들기보다 남의 얘기를 많이 듣는 사람은 타인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현대 정보전쟁에서 지식은 남을 이기는 재능이며 무기입니다. 지혜는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어질다는 것’과 ‘지혜로운 것’은 동일한 언어입니다.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성인의 어진 삶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습니다. 타인을 대할 때도 성인의 태도를 닮아야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타인)과 홀로 싸우는 전사가 아닙니다. 지혜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동양철학은 사람들에게 싸움에서 벗어나라고 권유합니다.   철학의 멋과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창한 개념들이 아니라, 삶의 작은 문제들, 혹은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마음속에 하나의 화두처럼 지니며 살아가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시인이나 소설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상에 대한 작은 문제의식이 어느 순간에는 현실의 큰 문제들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풍요로운 철학의 세계가 열리고 다양하고 열린 생각이 시작됩니다. 여러 잡념이 회로 안에서 엉켜 과부하를 일으키는 것과는 다른 경지입니다. 처음부터 큰 것을 보지 않는다면 누구나 가능하고요. 여기에 동서양 철학의 고전을 읽으면 자기 생각이 정립되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형성됩니다. 자기 삶에서 철학의 영역이 개척되는 것이죠.   어떤 고전을 추천하시나요 『맹자』와『장자』를 추천합니다.『맹자』는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책으로, 왕이라도 올바르지 않으면 물러나야 하는 역성혁명론을 주장했죠. 잘못된 정치가 횡행할 때『맹자』를 읽으면 시대를 바르게 읽는 데 도움이 됩니다.『장자』의 핵심은 ‘모든 건 변화한다’라는 것이죠.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사회에서 그런 것들에 의해서 억압되고 종속되는 것, 주종 관계를 거부해요. 예를 들면 비정규직들이 계속 늘어나고 자본에 종속되는 것들에 대해 거부하고 떨쳐내라고 이야기하죠.   교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동양철학자와 서양철학자는 누구인가요 가장 관심 있는 철학자는 왕양명입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학습하지 않아도 타고난 앎이 있다고 말했는데요. 삶의 난관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성인이 될 자질은 내 마음 안에 있음’을 깨달은 그는 지행합일을 주장합니다. 앎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고 모호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왕양명이 추구한 학술의 온전한 모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동서양 고전의 이해』에 등장하는 철학자 베르그송도 관심이 많은데요. 과학이 대두하던 시기에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지적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 서서 인간 생명의 본질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신선한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동양철학 연구에도 참고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는 창조적 진화를 말했는데, 인간 생명의 본질이 인간 안에 있다는 점에서 인(仁)과 통한다고 봅니다.   커버스토리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위의 문구는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이 한 명대사입니다. 물난리로 집이 잠겨버린 상황에서, 아들 기우(최우식)에게 건낸 말입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물난리로 체육관에서 밤을 지새우게 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상황을 미리 계획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 사회도 이와 비슷합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복잡한 기술들이 빠른 속도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고,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친구들과 모임을 갖기 어려워지고, 여행에 제약이 생길 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기후 위기는 기업 경영 환경뿐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빠른 변화와 예상치 못했던 위기로 인해 과거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을 우리는 빈번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경영자들에게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경영학 교육의 주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기생충」의 기택이 말한 것처럼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무계획으로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저 역시 목표를 세우고 철저히 준비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일이 틀어졌을 때 ‘될 대로 되라’ 식으로 포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계획은 정말 소용이 없던 것일까요? 돌이켜보면, 계획이 있었기에 예상에서 벗어난 상황을 빠르게 감지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를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계획은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며, 많은 분들이 이 점에 동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기업은 더욱 철저하게 변화에 대응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계획을 통해 미래에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에 대비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예상치 못한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어떻게 예측과 대응을 체계화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철저한 계획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해 주며, 방향을 잃었을 때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나침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저는 경영자들에게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경영학 교육의 주요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무계획’이 아니라 근본적인 계획(아들 기우가 영화 마지막에서 언급했던 것처럼)을 세워 불확실성 속에서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다양한 경영학 성공 사례와 전통적 이론이 주는 교훈을 통해, 기업들이 미래에 대비하는 힘, 즉 계획을 세우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경영학과 신임 교원으로서 현대 사회의 변화를 날카롭게 주시하겠습니다. 또한 변화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겠습니다. 경영 환경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며, 경영자들이 근본적인 계획을 세워 미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방송대에 합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리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도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개인적으로도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연구와 교육, 봉사라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KNOU광장
“방송대 명품강의를 K-MOOC에서!” 국립원격대학 방송대(총장 고성환)의 우수한 강좌들이 지난 1학기에 이어 2학기에도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이하 K-MOOC)에 탑재됐다.   고등교육에 대한 평생교육 수요 확대에 부응하고, 대학의 교수-학습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대학의 우수 강좌를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K-MOOC 2024학년도 2학기 과정’에 방송대에서 제공하는 강좌는 모두 7개다.   먼저 이경수 교수(일본학과)의「이경수 교수와 함께하는 관광일본어」에서는 일본과 관광을 주제로 일본어 표현과 일본 문화를 학습한다. 이성민 교수(미디어영상학과)의「K-콘텐츠 시대를 여는 영상콘텐츠 산업의 이해」에서는 영상콘텐츠 산업의 특징과 변화 양상을 배울 수 있다.   김철원 교수(관광학과)가 진행하는「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서비스 인문학’ 특강」에서는 서비스의 핵심개념과 경영학적 해석 능력을 배양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재화 교수(컴퓨터과학과)의「컴퓨터로 여는 미래사회」에서는 오늘날 필요한 정보기반 기술들의 기본 원리와 소양을 학습한다. 정영일 교수(보건환경학과)가 진행하는「노인보건」강좌는 건강한 노년기를 준비하기 위해 노인 건강증진의 통합적인 시각을 갖추도록 돕는다.   묶음강좌인「게임이론으로 이해하는 사회현상」은 이남형 교수(경제학과)와 정세윤 교수(첨단공학부)가 공동 진행한다. 게임이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수학의 핵심 개념과 이론, 모형 구현 등을 학습한다.   전략 기획강좌인「베이비부머를 위한 진로설계」역시 이로미 교수(교육학과)와 박상현 교수(생활체육지도과)가 공동 진행한다. ‘신노년층 진로 설계’를 목표로 △노인 교육 △신노년 지원 정책 △노인 의료 △재무 관리 △스포츠 상담 등을 배울 수 있다.   K-MOOC 강좌는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K-MOOC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하고 모든 강좌를 무료로 볼 수 있다. 학습 가능 기간은 12월 31일까지다.   박종성 DMC 원장은 “K-MOOC 강의는 새롭고 특별한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어 어디에 내어놓아도 자랑할 만한 수준을 담보한다. DMC는 지속적으로 방송대 교육 콘텐츠의 높은 수준을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 열린 교육의 참된 가치를 일궈 내는 길의 선두에 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상민기자 cinemonde@knou.ac.kr 뉴스
“‘예수의 얼굴’을 찾아 나선 신학자들의 사상과 행적” 경로: 통일의 집 → 한신대학교 대학원 → 향린교회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45년 기쁨의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는 이내 곧 분단의 대립을 맞이했다.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가리켜 ‘분단체제’라고 부르는데, 이는 분단이 분단을 재생산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주류 역사는 분단체제의 노선에 맞춰 왔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미국을 따라 자유의 가치를 강조했고, 반공정신을 강조한 군부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이와 전혀 다른 노선 역시 신앙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 흐름의 근원이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1901~1987)로부터 파생된 신학과 그 인물들을 살펴보려 한다. 특히 김 목사의 신학 사상이 짙게 스며들어 있는 한신대를 비롯해 한신대가 배출한 문익환, 안병무, 홍근수 등을 조명하며, 한국을 뒤흔들었던 그들의 행적을 서울 곳곳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통일의 집에서 마주한 문익환의 생애 수유동에 위치한 통일의 집은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의 생가를 리모델링해 만든 소박한 박물관이다. 통일의 집은 문 목사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평범한 주택으로 좁은 골목길, 주택가 사이에 있다. 지하철 가오리역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통일의 집이 위치한 좁은 골목길에 도착한다. 골목길 저 멀리서부터 ‘통일의 집’이라는 하얀 현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1994년 문익환의 아내인 박용길 장로(1919~2011)가 써 붙인 것이다. 통일의 집에 들어서면 먼저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방으로 이동한다. 문 목사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의 애끓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상이다. 영화「1987」의 엔딩에서 고(故)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짖던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영상 관람을 마치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면 박 장로가 입었던 교도소 수의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1944년 문 목사와 혼인한 박용길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76년 문 목사가 작성했던「3·1 민주구국선언문」을 붓글씨로 직접 기록한 이도 박 장로였으며, 1989년 문목사가 평양을 방문하게끔 옆에서 북돋아 준 이도 박용길 장로였다. 박용길의 수의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문 목사가 평양에서 맺은 「4·2 남북공동성명서」가 진열돼 있다. 문 목사의 행적 중 파급력이 가장 컸던 것은 단연 ‘무단 방북 사건’이었을 것이다. 언론에서도 문 목사의 방북 사건을 연일 특집으로 다뤘는데, 당시 신문 기사들은 통일의 집에 잘 보관돼 있다. 문 목사는 처음 사회운동에 가담했던 1976년 이래, 총 11년 3개월의 형량을 살았다. 199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18년의 기간 중 절반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 내에서는 문 목사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컸다. 심지어 그에게는 목사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다며 ‘문익환 씨’라 부르는 일도 다반사였다. 과연 무엇이 문익환을 다른 목사들과 구분 짓게 만들었을까? 안병무는 교회를 가리켜 ‘예수의 얼굴을 그리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선 시민들의 모습이 예수의 부활로 보였다.     새로운 신학의 시작, 한신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통일의 집 인근에 있다. 시내버스로 정거장 세 개만 지나면 된다. 문 목사는 청년 시절부터 우리말로 우리 민족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가 한신대학교(당시 조선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드디어 왔다”라는 기분까지도 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를 보면 비록 넓지는 않지만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건물에는 김재준 목사를 의미하는 장공기념관, 송창근 목사를 의미하는 만우기념관 식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비록 문익환을 가리키는 ‘늦봄기념관’이란 건물은 없지만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캠퍼스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캠퍼스 중앙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늦봄의 시비가 건립돼 있으며, 학교 건물 곳곳에는 월간지〈문익환〉도 비치돼 있다. 장공기념관 1층에 위치한 ‘장공기념전시실’은 김재준 목사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장 안쪽에는 김 목사의 신학 사상을 설명하는 배너가 세워져 있다. 그중 ‘신학 교육과 성경 해석과 복음의 자유’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가 생각했던 신학 교육의 개념을 알 수 있다. 그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곧 신학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장로교 내 근본주의를 표방했던 목사들은 그의 생각에 심한 반감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결국 장로교는 분열됐고, 김 목사와 그를 따르는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설립됐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실, 향린교회 한신대 교수로 재직했던 심원 안병무(1922~1996)는 대표적인 민중신학자로 꼽힌다. 1952년 그는 적산가옥을 인수해 ‘향린원’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향린교회의 시초다. 포털사이트에서 향린교회를 검색하면 그 위치가 광화문역 인근으로 나오지만, 원래 교회가 있던 위치는 지하철 을지로3가역 인근의 명동이었다. 이곳을 찾으려면 ‘명동13길 27-5’로 검색해야 한다. 명동 향린교회는 4층짜리 평범한 상가 건물이었고 교회의 첨탑도 없는 형태였다. 만약 교회 건물 외벽에 사회 정의 구호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마저 걸리지 않았다면 이 건물을 교회로 알아차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87년 1월 홍근수 목사(1937~2013)가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 후 향린교회는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향린교회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명동성당이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그간 명동성당에서 많은 활약을 했기에 신군부는 언제나 이곳을 감시했다. 그때 향린교회는 말 그대로 ‘등잔 밑’이 되어 민주화운동에 힘을 더했다. 1987년 5월 향린교회 3층 예배실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발기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향린교회는 2021년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전했다. 명동에 있던 장소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고, 성도들의 고령화 추세로 인해 승강기 없이 네 개의 층을 오르내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향린교회는 다섯 개 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명동 때와 마찬가지로 옥상에 십자가 첨탑을 세우지 않았다. 그 대신 건물 외벽에 향린교회라는 간판을 크게 붙여 명동 때와 다른 모습이다. 건물 3층에는 안병무도서관이 마련돼 있다. 안병무의 사상과 관련된 많은 서적들이 비치돼 있고, 그의 생애와 업적도 벽면에 잘 정리돼 있다. 흥미롭게도 도서관의 벽면 일부를 유리로 만들어서 2층의 예배당을 내려다볼 수 있다. 마치 3층 도서관에서 안병무의 신학 사상을 공부하고, 곧바로 2층을 바라보며 그의 사상이 예배당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확인하라는 듯하다. 그는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사회의 움직임을 통해 예수의 현존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것이 향린교회가 그려 내는 예수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지하철 종로5가역에서 잠시 걸으면 한국기독교회관을 볼 수 있다. 1969년에 완공된 10층짜리 건물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각종 기독교 관련 조직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1970~80년대 독재체제에 대항하던 목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였다. 군부독재 시절의 생생한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곳이 바로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NCCK는 유신 체제 반대 운동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신정권은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대학생들을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규정해 1천24명을 검거하고 이 가운데 180명을 구속했다. 이에 NCCK는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전달하고 학생들의 선처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현재 NCCK 사무실에는 지난 수십 년간의 자료가 빼곡히 보관돼 있다. 자료의 양이 그 역사만큼이나 매우 방대해 이를 효과적으로 보관하고 효율적으로 찾기 위해 NCCK는 온라인 아카이브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건물의 정문을 나서면 두 개의 현판을 볼 수가 있다. 하나는 건물 기둥에 붙어 있는 것으로, NCCK가 인권위원회 창립 30주년을 맞이해 만든 것이다. 현판에는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 통치 시대에도 인권, 민주화, 평화 운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불타올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건물 앞 길바닥에는 인권서울이 제작한 원형 현판이 박혀 있으며 “이곳은 독재시대에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자 기둥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길바닥은 스물한 살 젊은 생명의 씨앗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사태를 알리고자 서강대 무역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 (1959~1980)가 이곳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감리교청년회 소속이었던 그도 광주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광주를 탈출해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 회관에서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거리에 뿌린 후 옥상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그가 배포했던 유인물「동포에게 드리는 글」에는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오늘, 여전히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선택의 문제가 놓여 있다. 분단체제에 편승해 공포와 불안의 역사를 이어 갈 것인가, 분단체제에 항거해 자유와 평화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이처럼 한국교회에는 민중의 곁을 지켜 온 역사가 깃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예수의 발자취를 온전히 따른다면 분단체제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탈분단과 평화의 길을 창출해 낼 것이다. 교양
“벌써 두 번째 학과 편입한 베트남에서 온 그녀들!” 10대부터 90대까지 다니는 온 국민의 대학, 방송대! 그런데 출석수업에서 눈에 띄는 학우들이 있다. 다름 아닌 외국에서 한국으로 와 방송대를 찾은 학우들이다.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한국에 온 것일까? 또 어떻게 방송대를 알게 됐을까? 방송대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가 새로 론칭하는 기획 [이색 신·편입생]에서 이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태어난 나라를 떠나 이역만리 한국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열공’하는 학우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부 자극 팡팡! 애교심은 쑥쑥! 첫 회에서는 경기도 시흥시에서 일하면서 방송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온 정은지·나수정 학우의 사연을 소개한다. 주변의 외국인(현 국적은 한국이어도 무관) 방송대생을 에 알리고 싶다면 jebo@knou.ac.kr 로 제보하면 된다. 시흥=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경기도 시흥시 외국인복지센터에서 만난 정은지(행정3), 나수정(사복4) 학우는 오랜만의 만남에 연신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을 터트렸다. 두 학우 모두 베트남에서는 조부모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나 학우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 ‘경기도 다낭시’라 불리는 다낭에서 30분 거리의 중부지방 도기 ‘꽝 응 아이’ 출신이고, 정 학우는 베트남 성 중 가장 넓은 ‘응에 안’에서 태어나 ‘하이 풍’에서 컸다.   정 학우는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 식당 일과 아버지 사업을 거들며 학비를 벌어 전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나 학우 역시 부모님 일을 거들며 전문대에서 비즈니스사업을 공부했다. 형제자매가 많아 질풍노도의 사춘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의사가 꿈이었던 나 학우는 “동생도 많고, 의대 학비도 비싼데 시집 가면 끝인 딸한테 무슨 공부냐”는 분위기에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K-드라마·가요 보며 한국행 꿈 키워 전문대 졸업 후 정 학우는 공장에서 일하다, 아버지 지인의 추천으로 회사에 경리로 입사했다. 나 학우는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두 학우의 눈길을 끈 건 다름 아닌 한국 드라마와 가요였다. 한류 1세대 대표 드라마로 불리는「대장금」부터 베트남은 한국 드라마와 가요에 열광했다. 나 학우는 그중에서도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가을이 너무 예뻤다. 베트남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단풍으로 물든 산들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커져만 갔다.   공장과 회사를 오가던 정 학우 역시 한국 아이돌 가수의 화려한 무대를 보며 언젠가는 한국에 가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베트남 대졸자의 벌이보다, 한국에서 일하는 베트남인들의 급여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도 한국행에 대한 열망을 높였다.   한국은 나 학우가 먼저 왔다. 한국에는 이미 한국인과 결혼한 외사촌 언니 가족이 살고 있었다. 언니에게 소개받은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한국에 정착했다. 남이섬은 아직이지만, 보고 싶던 단풍은 인천대공원에서 실컷 구경했다. 예쁜 딸도 둘을 낳았는데, 벌써 중학생이 됐다. 정 학우 역시 이웃이 소개해준 한국인을 운명적으로 만나 2011년 한국에 왔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도란도란 살고 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두 학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어 배우기였다. 정 학우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여성인력센터를 통해 한국어를 익혔다. 나 학우는 2015년부터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했다. 고된 공장에서 2년을 일하다 사무직으로 옮겨야겠다 결심했고, 컴퓨터자격증 등을 따서 2017년 무역회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정 학우 역시 화장품·건강식품 장사부터 공장일, 식당일을 거쳐 현재는 외국인노동자 용역사무소에서 일한다. 운명처럼 만난 동문의 편입 권유 한국어 배우랴, 아이 키우랴, 회사 다니랴…. 여느 한국 여성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던 두 학우를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다. 바로 방송대 동문들이었다! 주 2회 가정방문 해 컴퓨터를 알려주던 선생님은 정 학우에게 자신이 졸업한 방송대 무역학과에 편입하라고 권했다. 방송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직장 상사 역시 나 학우에게 대학 입학을 적극 추천했다. 두 학우는 2021년 3월 나란히 무역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결과는? “대만족!”이라고 두 학우는 입을 모은다. 정 학우는 황희중 교수의「글로벌 스타트업 마케팅」을, 나 학우는 김진환 교수의「무역법규」,「무역결제론」을 베스트 강의로 꼽았다. 두 학우는 “한국 회사들이 베트남에 많이 투자하는 상황에서 무역은 필수가 됐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회사 일에 적용해보기도 하고요, 나중에 장사,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2년 만에 졸업장을 딴 두 학우 중 나 학우는 바로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노령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복지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역학과에서 학점 4.4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노력한 덕분에 한 번에 편입에 성공했다.   나 학우는 “사회복지사 2급을 따면 요양원에서 일하거나, 인력센터도 운영할 수 있고, 1급을 따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며 웃었다. 유범상 교수의 강의를 가장 좋아한다. 농담도 많지만 도움 되는 이야기가 더 많아서다.   졸업 후 1년간 쉬던 정 학우는 나 학우의 끈질긴 권유로 올해 행정학과에 편입했다. 전국연합MT에서 만난 강문희 교수의 “행정은 넓다. 모든 영역이 다 행정과 관련 있다”라는 말을 지침으로 삼아 학점 4.4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문병기 교수의 특강 대면수업「현대정치와 행정」에서 와인의 역사와 마시는 방법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방송대 졸업하며 자녀에게 멋진 엄마 돼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동영상 강의를 수없이 돌려 보고, 모르는 게 생기면 학교에 전화하고, 멘토 선생님께 과제물 작성 방법을 문의하고, 그래도 안 풀리면 주말에 둘이 머리를 맞대며 의지하면서 보낸 시간이 벌써 3~4년. 여전히 주말에는 센터를 찾아 고급 한국어 과정 수강도 병행하고 있다.   정 학우는 행정학과를 졸업하면 방송대의 다른 학과에 또 편입해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끈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이렇게 공부를 하고 나면 성장하는 게 느껴지고, 훗날 취직에든 창업에든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 학우도 마찬가지다. “들어가긴 쉽지만 졸업하기는 힘들다”는 남편의 말에 ‘그래? 내가 한 번 보여줄게!’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가 벌써 두 번째 학과다. 공부하다 보니 자존감도 높아졌고, 두 딸에게 ‘엄마는 외국 출신이지만, 한국에서도 대학 졸업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줬다는 자부심도 크다.   마지막으로 두 학우가 입을 모았다. “시작이 반이에요. 방송대에 무조건 오세요. 혼자 하면 힘들지만, 같이 하면 힘이 생기잖아요. 방송대에 오니 손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든든해요. 고민하지 말고 지원하세요. 방송대 선생님들 믿고 따라가면 다 됩니다!” 학습
“주류적 흐름에 ‘다른 목소리’ 내는 ‘불편한 존재’ 되길” 마침내 모국어로 된 노벨문학상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지난 10월 10일 노벨상위원회는 한국의 작가 한강을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KNOU위클리〉가 2019년 3월 창간과 함께 구상했던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현대명저 106선’ 한국문학편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선정된 바 있다(해당 작품 해제는 위클리 제24호「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과 고통의 글쓰기」편을 참고할 수 있다. https://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40). 과연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작가회의 정책위원장, 평론분과 위원장을 지낸 오창은 문학평론가의 글을 통해 그 의미를 짚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21세기 한국 신(新)문예부흥’의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한국 사회는 문화적 콤플렉스 없이,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활약 속에, 주류적 관점을 전복하고 대안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문학, 인문학을 왜 해야 하는지 의심받는 시대입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 같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그간 한국문학에서 문단 내 성폭행, 표절 같은 나쁜 일이 많았어요. 나쁜 사건들은 실제보다 더 크게 증폭되잖아요. 한국문학은 대중들에게 안 좋은 인상으로 덧칠됐어요.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문학에 대하는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대도 없고, 국민적 관심도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놀라운 깜짝 수상이었어요. 한국에서 독서문화가 활짝 피어나는 놀랄 만한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10월 21일 월요일, 국어국문학과 4학년 전공과목「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수업 시간에 조촐한 자축 행사를 진행했다.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한 학생은 “한강 작가님의 ‘찐팬’인데, 마치 내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라고 했고, 다른 학생은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엄마랑 마구 소리 지르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라고 했다. 국문학과 학생다운 논평도 있었다. 한 학생은 “한글날 다음 날의 수상 발표라 더 뜻깊었다”라고 했고, 또 한 학생은 “한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여서 기쁨 두배”였다고도 했다. 학생들의 이야기 중에서, “국문학 전공자로서 그간 알게 모르게 위축돼 있었는데, 조금은 자신감 있게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짠한 마음이 내면에서 일렁이기도 했다. ‘그간 국문학과 학생들이 위축되어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고, 한강 작가의 수상이 ‘국문과 학생들에게도 큰 응원이 되고 있구나’라는 훈훈한 기분도 들었다. 콤플렉스를 제거한 한국문학 처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한 때가 10월 10일 목요일 저녁 8시 12분쯤이었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속보] 소설가 한강, 한(韓)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 전송돼 왔다. 그 소식은 소설가·시인·평론가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부터 전해졌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세상이 정지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온몸의 감각이 “나는 아직 이토록 충격적인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라며 부르짖는 듯했다. 단톡방의 작가들도 “아 정말?” “와! 대단” “신기해요”라며 기쁨에 겨워했다. 이제는 조금 더 차분하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에 대해 따져 볼 때다. 과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사회와 문학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첫째, 드디어 한국문학은 콤플렉스 없이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게 됐다. 콤플렉스는 실상을 왜곡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없는 한국문학’이라는 말은 한국문학 관계자들을 위축시키고 주눅이 들게 했다. 이웃 일본은 두 명의 일본 국적 수상자(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를 배출했고, 중국에서도 한 명의 중국 국적 수상자(모옌)가 나왔다. 이러한 비교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배출은 한국문학의 숙원 사업인 것처럼 이야기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학진흥정책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설정하곤 했다. 매년 10월이 되면 ‘올해도 역시 한국은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구나’라고 한탄이 터져 나오곤 했다.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야만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한국문학을 왜곡시키는 ‘노벨문학상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콤플렉스 없는 문학, 국가와 국적을 따지지 않고 문학적 상상력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감수성으로 무장한 세대를 위한 길트기 둘째,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이 문학적 힘을 얻게 됐다. 지금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한국문학의 동시대적 전통은 1970~1990년대에 형성됐다. 문학제도와 미학적 세계관도 그 시대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 이전에는 황순원, 김동리, 박경리, 최인훈, 이호철 등의 작품이 해외에 번역 소개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거론되곤 했다. 한국에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서도 월북작가인 이기영의『두만강』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한 일이 있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작가로는 고은, 황석영, 김혜순 등이 유력 후보인 것처럼 이야기되곤 했다. 하지만, 1970년대생인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중심축이 확연히 젊은 세대로 이동하게 됐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한강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불편한 존재, 주류적 관점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한반도 평화 위기에 대해 발언할 것이고, 소수자의 위치에서 주류사회가 당연시하는 것에 대해 문학적으로 계속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한강의 미학적 기반은 ‘여린 생명에 대한 연민’, ‘죽은 자들을 그림으로써 산 자들의 취약성 드러내기’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은 문학적 상징권력을 가진 존재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한강의 작품과 발언과 활동은 한국 사회가 당연시하는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적 생명 착취 시스템’과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한강이라는 미학적 존재가 문학으로, 예민한 생명의 감수성으로 제기하는 ‘근본적 문제제기’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의 주류사회에게는 위기일 수 있으나, 소수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에게 한강은 ‘대안적 세계’를 위한 훌륭한 후견인일 수 있다. 21세기 신문예부흥을 상상하며 노벨문학상은 1901년 프랑스 시인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이 첫 수상자가 된 이후 유럽문학계의 권위 있는 상이 됐다.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권위를 넓혀 나갔다. 유럽 중심의 세계문학은 개혁의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여성 작가 한강의 수상은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여전히 유럽적 세계관이 영향력을 행사하겠지만, 문학 영역에서 유럽적 미학은 낡아져가고 있다. 한반도에서 노벨문학상에 관한 첫 보도는〈동아일보〉1920년 8월 16일자였다. 그해의 수상자로 노르웨이 시인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이 선정됐다는 기사였다. 그 후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소식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어 관습적으로 전해졌다. 이제 그 모든 이야기가 과거 속 기록이 됐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근대문학 110여 년에서도 일대 사건이다. 문학이 한국 사회 전체 구성원들에게 이토록 기쁨을 준 적이 과거에는 없었다. 한국문학이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이토록 끌어들인 적도 과거에는 없었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1917)은 그 시대 젊은이들을 열광시켰으나, 우리 문학 초창기의 중요한 성과일 뿐이다.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1919)를 김동인·주요한·전영택·김환·최승만이 출판했을 때, 조선문학은 비로소 하나의 근대적 실체가 되어 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은 100여 년 동안 한국인에게 깊은 서정을 선물해 주었다.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는 한강으로 인해 하나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21세기 한국 신(新)문예부흥’의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한국 사회는 문화적 콤플렉스 없이,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활약 속에, 주류적 관점을 전복하고 대안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깊이 읽는 인문학적 독서문화운동이 활발해져야 한다. 한강의 작품이 100만 부 팔리는 것 못지않게 작가 100명의 책이 1만 부씩 팔리고, 이 책들을 독자들이 즐겁게 읽는 세계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상상해 본다. 미래의 역사에 ‘21세기 신문예부흥’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기록되는 대목을 읽는 나를 상상해보면, 저절로 얼굴에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듯하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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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한마디

555*** 추 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 요즘 평일에는 회사에서 잔업에 대학원 과정 및 학교 편입해서 또 공부도 하고 학점은행제도 하고, 주말에는 바쁘게 사느라 직접 얼굴 뵙기가 쉽지 않네요~ 9월 29일 키워주신 저희 할아버지께서 소천하셨을 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건강 잘 챙기시고 가정 돌보시며 재미있는 학생회 생활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배주윤 올림-
s00*** 당선되신 분들 정말.. 고생많으셨고 앞으로의 집필 길에 응원드릴게요. 다들 인생을 참 부지런히 살고 계시네요. ^^
ala*** 타과생이 과제하려니 막막했는데... 조목조목 설명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022*** 안녕하세요
308*** 대단하십니다~ 지난해 11월에 중어중문학과에서 중국 시안에 함께 갔을 때 의 두분 모습이 생각납니다. 항상 서로 의지하고 챙겨주시던 모습과 늘 환하게 웃으시던 이해수님~두분 존경합니다~
890*** 대단하십니다. 존경드려요. 두 분의 모습에 저도 용기를 더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새요.
505***
le2*** 오! 놀랍습니다. 강의에서만 뵙던 교수님께서 직접 순회까지 하신다니 정말 놀랍고요 기대됩니다. 저는 제주 지역대 4학년 학생이라 제주에 오시는 날, 꼭 갈 예정입니다. 일본학과는 아니지만, 2학년 1학기부터 2과목씩 일본어 어학을 끌어와서 4학년 1학기 고급 일본어 활용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문화 3,4 다 구매해서 읽었습니다.
600*** 감사했고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40대 후반에 사고를 크게 당해서 일 년 내 거의 고열과 통증으로 지내고 있으면서 비관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동희.이해수 부부님의 글을 접하고는 참으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고통중에 방송대 행정학과를 조기졸업하고 지금은 사회복지학과 4학년에 학생회장으로 열심히 삶을 끌어나가고 있습니다만, 좀 더 희망 속에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을 님들은 주셨습니다. 혹시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을. 고승민 : 010-7491-4789
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