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울을 걷다, 모던 서울

경로: 통일의 집 → 한신대학교 대학원 → 향린교회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45년 기쁨의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는 이내 곧 분단의 대립을 맞이했다.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가리켜 ‘분단체제’라고 부르는데, 이는 분단이 분단을 재생산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주류 역사는 분단체제의 노선에 맞춰 왔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미국을 따라 자유의 가치를 강조했고, 반공정신을 강조한 군부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이와 전혀 다른 노선 역시 신앙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 흐름의 근원이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1901~1987)로부터 파생된 신학과 그 인물들을 살펴보려 한다. 특히 김 목사의 신학 사상이 짙게 스며들어 있는 한신대를 비롯해 한신대가 배출한 문익환, 안병무, 홍근수 등을 조명하며, 한국을 뒤흔들었던 그들의 행적을 서울 곳곳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통일의 집에서 마주한 문익환의 생애
수유동에 위치한 통일의 집은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의 생가를 리모델링해 만든 소박한 박물관이다. 통일의 집은 문 목사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평범한 주택으로 좁은 골목길, 주택가 사이에 있다.
지하철 가오리역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통일의 집이 위치한 좁은 골목길에 도착한다. 골목길 저 멀리서부터 ‘통일의 집’이라는 하얀 현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1994년 문익환의 아내인 박용길 장로(1919~2011)가 써 붙인 것이다.
통일의 집에 들어서면 먼저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방으로 이동한다. 문 목사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의 애끓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상이다. 영화「1987」의 엔딩에서 고(故)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짖던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영상 관람을 마치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면 박 장로가 입었던 교도소 수의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1944년 문 목사와 혼인한 박용길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76년 문 목사가 작성했던「3·1 민주구국선언문」을 붓글씨로 직접 기록한 이도 박 장로였으며, 1989년 문목사가 평양을 방문하게끔 옆에서 북돋아 준 이도 박용길 장로였다.
박용길의 수의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문 목사가 평양에서 맺은 「4·2 남북공동성명서」가 진열돼 있다. 문 목사의 행적 중 파급력이 가장 컸던 것은 단연 ‘무단 방북 사건’이었을 것이다. 언론에서도 문 목사의 방북 사건을 연일 특집으로 다뤘는데, 당시 신문 기사들은 통일의 집에 잘 보관돼 있다.
문 목사는 처음 사회운동에 가담했던 1976년 이래, 총 11년 3개월의 형량을 살았다. 199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18년의 기간 중 절반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 내에서는 문 목사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컸다. 심지어 그에게는 목사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다며 ‘문익환 씨’라 부르는 일도 다반사였다. 과연 무엇이 문익환을 다른 목사들과 구분 짓게 만들었을까?

안병무는 교회를 가리켜
‘예수의 얼굴을 그리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선 시민들의 모습이
예수의 부활로 보였다.

 

 

새로운 신학의 시작, 한신대학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통일의 집 인근에 있다. 시내버스로 정거장 세 개만 지나면 된다. 문 목사는 청년 시절부터 우리말로 우리 민족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가 한신대학교(당시 조선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드디어 왔다”라는 기분까지도 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를 보면 비록 넓지는 않지만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건물에는 김재준 목사를 의미하는 장공기념관, 송창근 목사를 의미하는 만우기념관 식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비록 문익환을 가리키는 ‘늦봄기념관’이란 건물은 없지만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캠퍼스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캠퍼스 중앙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늦봄의 시비가 건립돼 있으며, 학교 건물 곳곳에는 월간지〈문익환〉도 비치돼 있다.
장공기념관 1층에 위치한 ‘장공기념전시실’은 김재준 목사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장 안쪽에는 김 목사의 신학 사상을 설명하는 배너가 세워져 있다. 그중 ‘신학 교육과 성경 해석과 복음의 자유’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가 생각했던 신학 교육의 개념을 알 수 있다. 그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곧 신학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장로교 내 근본주의를 표방했던 목사들은 그의 생각에 심한 반감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결국 장로교는 분열됐고, 김 목사와 그를 따르는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설립됐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실, 향린교회
한신대 교수로 재직했던 심원 안병무(1922~1996)는 대표적인 민중신학자로 꼽힌다. 1952년 그는 적산가옥을 인수해 ‘향린원’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향린교회의 시초다.
포털사이트에서 향린교회를 검색하면 그 위치가 광화문역 인근으로 나오지만, 원래 교회가 있던 위치는 지하철 을지로3가역 인근의 명동이었다. 이곳을 찾으려면 ‘명동13길 27-5’로 검색해야 한다. 명동 향린교회는 4층짜리 평범한 상가 건물이었고 교회의 첨탑도 없는 형태였다. 만약 교회 건물 외벽에 사회 정의 구호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마저 걸리지 않았다면 이 건물을 교회로 알아차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87년 1월 홍근수 목사(1937~2013)가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 후 향린교회는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향린교회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명동성당이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그간 명동성당에서 많은 활약을 했기에 신군부는 언제나 이곳을 감시했다. 그때 향린교회는 말 그대로 ‘등잔 밑’이 되어 민주화운동에 힘을 더했다. 1987년 5월 향린교회 3층 예배실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발기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향린교회는 2021년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전했다. 명동에 있던 장소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고, 성도들의 고령화 추세로 인해 승강기 없이 네 개의 층을 오르내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향린교회는 다섯 개 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명동 때와 마찬가지로 옥상에 십자가 첨탑을 세우지 않았다. 그 대신 건물 외벽에 향린교회라는 간판을 크게 붙여 명동 때와 다른 모습이다.
건물 3층에는 안병무도서관이 마련돼 있다. 안병무의 사상과 관련된 많은 서적들이 비치돼 있고, 그의 생애와 업적도 벽면에 잘 정리돼 있다. 흥미롭게도 도서관의 벽면 일부를 유리로 만들어서 2층의 예배당을 내려다볼 수 있다. 마치 3층 도서관에서 안병무의 신학 사상을 공부하고, 곧바로 2층을 바라보며 그의 사상이 예배당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확인하라는 듯하다.
그는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사회의 움직임을 통해 예수의 현존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것이 향린교회가 그려 내는 예수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지하철 종로5가역에서 잠시 걸으면 한국기독교회관을 볼 수 있다. 1969년에 완공된 10층짜리 건물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각종 기독교 관련 조직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1970~80년대 독재체제에 대항하던 목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무대였다. 군부독재 시절의 생생한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곳이 바로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NCCK는 유신 체제 반대 운동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신정권은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대학생들을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규정해 1천24명을 검거하고 이 가운데 180명을 구속했다. 이에 NCCK는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전달하고 학생들의 선처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현재 NCCK 사무실에는 지난 수십 년간의 자료가 빼곡히 보관돼 있다. 자료의 양이 그 역사만큼이나 매우 방대해 이를 효과적으로 보관하고 효율적으로 찾기 위해 NCCK는 온라인 아카이브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건물의 정문을 나서면 두 개의 현판을 볼 수가 있다. 하나는 건물 기둥에 붙어 있는 것으로, NCCK가 인권위원회 창립 30주년을 맞이해 만든 것이다. 현판에는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 통치 시대에도 인권, 민주화, 평화 운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불타올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건물 앞 길바닥에는 인권서울이 제작한 원형 현판이 박혀 있으며 “이곳은 독재시대에 민주화 운동의 발판이자 기둥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길바닥은 스물한 살 젊은 생명의 씨앗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사태를 알리고자 서강대 무역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 (1959~1980)가 이곳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감리교청년회 소속이었던 그도 광주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광주를 탈출해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 회관에서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거리에 뿌린 후 옥상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그가 배포했던 유인물「동포에게 드리는 글」에는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오늘, 여전히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선택의 문제가 놓여 있다. 분단체제에 편승해 공포와 불안의 역사를 이어 갈 것인가, 분단체제에 항거해 자유와 평화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이처럼 한국교회에는 민중의 곁을 지켜 온 역사가 깃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예수의 발자취를 온전히 따른다면 분단체제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탈분단과 평화의 길을 창출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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