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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에서 기른 뚝심 … “화순을 제2의 국가정원으로 만들겠다”
양복을 입었지만,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키는 180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것 같았다. 회의실에는 잘 키운 한국 춘란을 비롯해 다양한 난초가 놓여 있었다. 광주에 있는 숭의실업고등학교 3학년 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그길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세에 시작한 공무원 생활은 54세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천직으로 생각한 농사를 짓다가 전남 도의원을 거쳐 화순군수가 됐다. 1983년 방송대 농학과 전문과정에 학사 1기로 입학해 6년 만에 졸업한 구복규 동문이다. ‘아동·여성·고령 3대 친화도시’를 만들어 가는 구복규 동문을 4월 2일 오후 2시 화순군청에서 만났다. “아동·여성·고령 3대 친화도시는 군민과 함께하는 보편복지의 시작입니다”라고 강조하는 그는 과연 화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을까.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화순 시내에 접어들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순으로 봄소풍 가자 2024 화순 고인돌 봄꽃축제(4.18~4.29)’라고 적힌 플래카드였다. 활짝 핀 벚꽃 아래 ‘화순 고인돌 봄꽃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마치 꽃잎처럼 반짝거렸다. 구복규 동문이 방송대를 만난 때는 1983년이다. 당시 화순군청 직원 11명과 함께 방송대에 지원해 공부를 시작했다. 화순에서 광주 전남대를 오가면서 출석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구 동문만이 끝까지 완주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중간에 포기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후배분들은 방송대를 선택한 이상, 처음의 그 결심 그대로 포기하지 말고 완주해 주셨으면 해요. 방송대에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확신하시면 좋겠어요. ‘농학과 학사 1기 졸업생’이란 자긍심 “사실 공부가 많이 어려웠어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공부 제대로 안 하면 학점을 받을 수가 없었거든요. 5년 과정을 6년 걸려 졸업한 건, 3학점짜리 한 과목 때문인데요. 그거 때문에 방송대 생활을 더 한 거죠.” 구 동문은 최근 화순에서 열린 광주·전남지역대학 농학과 기원제 및 MT에도 초대돼 자신이 농학과 학사 1기 졸업생임을 강조하면서 후배들에게 ‘방송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공부해달라’는 덕담도 건넸다. 그는 ‘방송대 농학과 학사 1기’라는 걸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긍심도 가득 엿보였다, 어디를 가도 자신이 방송대 농학과 학사 1기라는 걸 강조하고, 그 시절 많이 배웠노라고 말한다고 했다. 당시 최종학력이 ‘고졸’이었기에 대학교를 꼭 졸업하고 싶었다. 고교 때도 농업에 관심이 많았고, 농업 기반인 화순군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방송대 농학과 진학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1980년대 중반 방송대에서 공부한다는 건 ‘고난의 순례길’을 가는 행위였다. 그와 함께 입학했던 동료들이 모두 포기한 것을 봐도 그렇다. 그 역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이 했죠. 아무래도 일하면서 하다 보니 공부를 많이 못 하니까 학점을 잘 받을 수 없었어요. 겨우 C, B 학점 정도였죠. 5년제 과정인데 1~2년 차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죠. 그런데 3년째 다니다 보니, 그동안 했던 공부가 아까운 거예요. 겨우 1~2년 고생했다고 중간에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졸업해야지 하는 오기도 생기고, 수업 내용도 쏙쏙 들어오고, 좀더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죠. 물론 학점도 A가 늘었어요.(웃음) 그때 계속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뚝심도 기르고 공부한 게 제 삶을 바꾼 동력이 된 거죠.” ‘화순을 새롭게, 군민을 행복하게’ 구복규 동문은 2022년 7월 민선 8기로 제48대 화순군수에 취임했다. ‘화순을 새롭게, 군민을 행복하게’라는 슬로건도 직접 만들었다. 1974년 5월 화순군 지방공무원 공채에 합격한 뒤로 줄곧 화순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누구보다 화순 발전을 이끌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길이었다. “지방자치 역사가 30년이 다 돼가도록 우리 군은 특유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서 지역발전에 있어서 답보상태를 거듭해 왔어요. 화순의 특성을 반영한 변화와 혁신으로 문화, 관광, 농업, 백신산업 등의 지역경쟁력을 키우면 화순도 얼마든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봐요.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이 모두 이런 인식과 판단 위에서 정립됐죠.” 구 동문이 가장 역점을 두고 펼치는 사업은 ‘관광객 500만 시대를 여는 매력 넘치는 관광도시 조성’이다. 15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린 광주광역시가 근처에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관광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수익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다. 실제 요즘은 ‘담양’보다는 ‘화순’으로 광주시민들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화순을 화순읍 권역, 동부 권역, 서부 권역으로 나눠 각각이 지닌 역사문화·지리적 특성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화순천 꽃강길 조성, 개미산 전망대 조성, 화순 적벽 국가명소화, 사평역 등 임대정 주변 관광지 조성, 고인돌 축제 개최, 능주 역사문화도시 조성, 조광조 유배지 확대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우리 화순은 정말 다양한 역사문화적 서사를 가지고 있어요. 화순 고인돌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제가 담당 과장으로 유네스코에 가서 작업했거든요. 그런 경험을 가지고 화순군 문화광관재단을 본격적으로 가동해 화순만의 차별화된 관광정책을 개발해 관업산업 활성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화순 홍수조절지의 87홀 파크골프장과 아름다운 수변공간은 전국의 파크골프 인구를 끌어들이는 효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구 동문의 화순 발전 계획에는 ‘부자 농촌 만들기’도 포함돼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인데, 그의 계획이 흥미롭게 들렸다. △능주면 남정리에 농산물 수출단지와 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조성해 농산물 수출과 유통의 거점 단지로 육성 △5대 지역 특화작목과 신소득 작목(한국 춘란)을 육성하고, 청년과 은퇴자가 안정적으로 영농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책 확대 △2023년 매출 16억 원을 올린 화순군 농특산물 온라인 쇼핑몰 ‘화순팜’의 운영체계를 군 직영으로 변경, 품목을 확대해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 구축 등이 솔깃했다. 특히 ‘난 산업’은 40년 동안 난을 키워온 구 동문의 경험치가 투영된 사업으로 역발상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축하 인사 등에 보통 ‘서양란’을 선물하고 있는데, 이 난초 시장 규모가 거의 1조 원대에 달한다. 문제는 사용되고 있는 난이 대부분 ‘서양란’이라는 것. 구 동문이 ‘한국 춘란’에 주목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춘란은 추운 북쪽에서는 나지 않아요. 화순도 합천 못지않게 춘란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죠. 실제 벼농사 등 다른 농업보다 단위면적 당 소득을 더 많이 올릴 수 있는 수익성 높은 작물이 바로 춘란입니다. 투입 대비 산출이 높고, 고령인 분들도, 농사에 서툰 분들도 접근하기 수월하거든요.” 그의 부자 화순 만들기는 지역경제 활성화와도 직결된다. 2023년, 118년 역사의 화순탄광이 문을 닫았는데, ‘폐광지역 경제진흥개발사업’을 반드시 통과시켜 광부들의 땀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할 예정이다. 농업 분야에서는 ‘난 산업’ 육성으로 신성장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또한 바이오산업 인력 양성 교육을 곧 시범 운영할 예정이며, 지난 2월에는 전라남도와 함께 ‘국가 첨단 전략산업 바이오 특화단지’ 유치 신청에 나섰다. 눈길 끄는 만원 임대주택과 천원 보육 화순군에서 진행한 정책 가운데는 다른 곳에서도 벤치마킹을 해간 사례들이 있다. 전국 최초로 청년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만원 임대주택 지원사업을 추진해 호평을 받고 있다. 2023년부터 2026년까지 매년 100호씩, 총 400호 공급할 예정이다. 작년에 100호 물량을 상반기 50호, 하반기 50호 나눠서 공급했는데, 올해는 100호 물량을 상반기 중에 전부 공급하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오니까 울음소리가 나고, 경제적 효과가 있다는 판단이다. ‘전국 최초’는 또 하나 있다. ‘다문화 가족 자국민 전담팀’을 신설해, 다문화 시대를 대비한 인구정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 필리핀 등 현지에서 화순에 정착한 다문화 가족 주부를 임기제 공무원으로 발탁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책이다. 이들이 다문화 가정을 방문해 통역도 해주고, 아이들 교육도 도와주고 은행 업무나 민원까지 해결해 주고 하다 보니 가정도 화목해지고 안정되고 있다. 또한 전남 최초로 ‘화순형 24시 어린이집’ 두 곳을 지정해 보육환경 개선에도 선도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 시간에 1천 원을 내고 보육 돌봄을 받는 ‘천원의 보육’인데, ‘만원 임대주택 보급’과 함께 젊은 군민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방송대 완주하길” 화순을 제2의 국가 정원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구 동문은 ‘재임 기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군수로 화순의 안정된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남은 열정을 쏟겠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대가 좀더 다양한 융합전공들을 만들어 변화를 선도해 줬으면 한다. “요즘 정보 해킹 등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디지털 보안 관련 분야를 만들거나, 제가 나온 농학과의 경우, 대단위 영농과 관련된 교과목을 제공해 주면 좋겠어요. 농학과를 지원한 분들이 농업 현장에서 새로운 혁신을 꾀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지금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후배분들은 방송대를 선택한 이상, 처음의 그 결심 그대로 포기하지 말고 완주해 주셨으면 해요. 방송대에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확신하시면 좋겠습니다.”
206호
최익현
2024-04-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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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는 지식과 지혜의 아크로폴리스 … 꿈 포기하지 말자!
경남 거창 사람인 강신면 동문은 서울 농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환경보건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1997년에 행정고시(41회)에 합격하고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조달청 기획조정관실 행정관리담당관으로 있다가 외교통상부 주중화인민공화국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다시 조달청 기획조정관실 기획재정담당관으로 돌아왔다. 이후 2021년 서울지방조달청장을 거쳐 2023년 7월 10일 인천지방조달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00세가 돼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은 아주 젊게 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방송대를 찾은 분들도 꿈이 있기에 도전하셨을 거라고 봐요. 그 꿈을 잃지 말고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육체적 힘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힘, 어려운 상황도 버텨낼 수 있는 내공이 필요해요. 취임 이후 인천조달청 역대 최고 실적 원래 강 동문의 꿈은 ‘유전공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작물학, 식물학에 관심. 그런데 막상 대학원에서 실험하고 논문 써야 했는데, 그게 재미없어서 부친에게 ‘행시에 도전하겠다’고 밝히고 진로를 변경했다. 그는 몸 담고 있는 조달청과 관련 업무가 자신의 적성에 100프로 잘 맞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조달청 동기 5명은 모두 다른 부서로 갔지만, 그는 아직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행시에 합격해 밥 먹을 수 있는 직장을 구한 것에 감사하면서, 위민(爲民)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걸 보람으로 여기면서 열심히 일해 왔다. 공무원으로서 맡은 업무와 관련해 ‘전문가 레벨’로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걸 중시했다. 또한, 국민 세금으로 활동하니, 국민에게 꾸지람 듣지 않아야 하고, 그러려면 책임감 있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국민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 한다고 철칙처럼 여기며 지냈다. 2023년 7월 인천지방조달청장에 취임한 후 강 동문은 인천 경제인과 기업들을 만나면서 현장을 발빠르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미 서울지방조달청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했던 터라, 인천에서도 막힐 게 없었다. 그의 강점은 현장을 통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실제 취임 직후 곧바로 인천·경기남부 중기중앙회·분야별 협회 등 단체 방문(15회), 혁신기업 제조공장 방문(16회) 등 폭넓은 행보를 보였다. 관내 기업들이 겪고 있는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규제 개선 노력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산하 경기조달지원센터를 통해 기업들이 희망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1:1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연간 200개 사)함으로써, 기업들이 조달청 혁신·우수제품, 벤처나라 등록 등 223건의 공공조달시장 진출 성과를 창출하기도 했다. 2023년 인천지방조달청의 조달실적은 전년 대비 1천224억 원이 증가한 6조6천32억 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관내 기업의 조달시장 진출 지원을 위한 설명회, 컨설팅 등이 가져온 성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 동문은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향후 새로운 업무추진 방향도 명확히 세웠다. 먼저, 조달요청 기관인 각 수요기관에 대한 조달서비스 품질을 한 단계 더 높이고, 공공조달시장을 통한 중소기업 성장지원을 위해 기업에도 ‘한걸음 더’ 다가갈 예정이다. 인천테크노파크 및 인천벤처기업협회 등 관내 6개 단체와 구체적인 기업지원방안을 협의해 4월내에 MOU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기업지원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내부직원의 혁신역량을 강화하고 ‘한걸음 더’ 조직문화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격식 없는 내부 자유토론의 장을 수시로 마련하고, 세대간 브라운백미팅, 동호회 지원을 통한 문화체육활동 등 내부 소통·공감을 위한 노력도 계속할 계획이다. 특히 그의 향후 구상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청소년에게 조달정책을 널리 알리겠다는 부분이다. 미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달정책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관내 대학생 대상 조달사업 홍보 설명회, 인근 초·중·고 학생들의 진로학습과 연계한 인천조달청 및 인천비축기지 견학 등도 밝혔다. “너무 바빠서 F학점 받기도” 그가 방송대와 인연을 맺은 건 2000년, 32세 때다. 법률적 이해와 실무 역량이 필요해 방송대 법학과에 진학해 2003년 2월 졸업했다. 흥미로운 건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경영학과에 다시 진학했다는 것. 2005년 2월 졸업하고 이듬해 조달청 구매사업국 종합쇼핑몰과장으로 조달업무의 핵심 보직을 시작했다. “방송대 공부를 시작했지만, 직장에서 주요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 계획 짜고 하느라 바빴어요. 기말시험이 6~7월, 12월에 걸렸는데, 이 시기가 공교롭게도 가장 바쁜 때인지라 고생도 많았죠. 한 과목은 아예 F학점을 받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법학 공부를 마치니 평소 공부하고 싶었던 경영 쪽에도 관심이 깊어져 경영학과에 바로 진학했죠.” 그의 방송대 진학에는 우연 반, 계획 반이 작용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방송대 입학할 사람은 지원하라는 공지가 떴다. 정부 지원도 해주겠다, 틈나는 대로 공부하면 되고, 교재도 요약이 잘 돼 있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우연의 모습으로 찾아온 기회였지만, 이것으로 그의 방송대 진학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마음속에는 이미 ‘모종의 계획’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달청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강 동문은 책상 앞에 인생 계획을 잘 보이게 써서 붙여뒀다. 거기에는 방송대에서 학위 2개를 하겠다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강 동문은 그때의 인생 계획표를 아직도 저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방송대 사람이 됐다. 그는 최근 변화에 대응하고 있는 방송대를 위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국민에게 좀 더 다가가는 학교로 거듭나자는 제안인데, 솔깃한 아이디어는 ‘토론 프로그램’이다. “방송대 학우들은 대부분 생업을 겸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1년에 4회, 쿼터나 피리어드로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열어주자는 것이다. 예컨대 농학과는 스마트팜에 대해 농진청에서 어떻게 하는지, 농축산업계는 빅데이터를 어떻게 스마트팜에 적용하고 있는지, 이런 주제로 좋은 강사를 섭외해 30분 강연하고, 햄버거 먹어가면서 토론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5060세대와 2030세대가 같이 모여서 지식과 경험, 지혜를 나누면 좋겠다. 인생 선배, 학과 선배들이 해주는 이야기는 2030세대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그만둘까?’ 포기할까도 했지만… 서울대 나오고 행시도 패스한 그였지만 방송대 공부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만 둘까?’하는 생각도 가졌다고 귀띔했다. 어려움을 피하기보다 정면 돌파하는 방식으로 맞섰다. “몸이 너무 피곤하니, 내가 지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러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법학이란 게 알지 못하면 답을 적을 수 없는 공부잖아요. 암기할 것도 많아서 스트레스도 제법 받았지만, 잘 견뎌낸 것 같아요.(웃음) 300쪽짜리 법학 교재를 30대 초반인 지금 젊었을 때나 200~250쪽까지 독파할 수 있지 언제 또 할 수 있겠냐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그때 안 했다면 지금은 할 수 없었을 거 같아요.” 마침 중간평가를 앞둔 시점이라 후배들에게 도움 될 공부 팁을 물었더니 자신의 노하우를 들려줬다. 일단 꿀팁은 없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으니까. 모두 어른이 돼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방송대를 찾았으니, 이미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기본여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직장 다니랴, 아이들 키우랴, 충분히 공부할 시간이 없을 수 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을 체크하고 교재를 찾아보면 된다. 문제를 먼저 빨리 풀어보는 것도 좋다. 어떤 유형의 문제가 출제됐는지 풀어보면 익숙해진다. 평소 예습은 못하더라도 복습만큼은 꼭 하고, 그런 뒤에 요점 정리를 보고, 기출문제까지 확인하면 경험상으로는 B+까지는 가능하다. 정년 후에는 재능기부·여행 작가 꿈꿔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쯤, 그는 생일이 방송대 개교기념일과 같은 날(3월 9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방송대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00세가 돼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은 아주 젊게 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방송대를 찾은 분들도 꿈이 있기에 도전하셨을 거라고 봐요. 그 꿈을 잃지 말고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육체적 힘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힘, 어려운 상황도 버텨낼 수 있는 내공이 필요해요. 그러려면 인문학적 공부가 선행돼야 하고요. 사람에 대한 공부, 역사에 대한 공부 등이죠. 주관을 또렷이 세울 수 있는 가치관을 가졌을 때, 꿈과도 잘 연결될 수 있고, 끝까지 그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년 후에는 경험을 축적해 왔던 조달 업무, 인문학, 경영학 지식을 담아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강신면 동문. 그의 인생 후반 꿈은 ‘여행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의 토대는 음미체(음악, 미술, 체육활동)’라는 지론을 펴는 그는 ‘음미체’를 전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게 바로 여행이라며, 이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변화된 것을 글로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나에게 방송대는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아크로폴리스였다”라고 말하는 그의 새로운 꿈이 광장을 넘어 활짝 펼쳐지길 기대한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205호
최익현
2024-03-2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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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농장 ‘열네 살 소녀’, 50년만에 꿈을 이뤘다
“2021년 2월, 코로나 시기라 졸업식을 저녁에 유튜브 방송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공부하는 내내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가족과 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받는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던 나인지라 이런 졸업식이 너무 아쉽고 속상하기만 했다. (…) 유튜브로 졸업식을 시청하는 와중에 2014년부터 오늘까지 내 삶에 일어난 수많은 다이나믹한 변화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지 중학교 졸업장만이라도 갖는 게 소원이었던 나에게 이 짧은 세월에 대학 졸업장까지 손에 쥘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 많은 변화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은 채 잘 견디어 내었다. 앞으로도 나를 더욱 사랑하며 힘차게 살아가리라.”(손혜선 지음,『일기장의 기적』, 프로방스, 2023.12., 193~194쪽) 작가가 되겠다는 두 번째 꿈 성취했다. 방송대에서 배우는 즐거움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수레바퀴 역할을 충분히 해줬기에 치유가 일어나는 기적도 경험했다. 56세에 중졸 검정고시에 도전 1973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4세 때부터 친척 집과 버섯 농장을 오가며 일을 시작했다. 22세에 서울로 와서 살며 일하다가 목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의 주폭과 가정폭력이 그의 등을 후려쳤다. 2015년 56세의 나이로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이듬해에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2016년 57세에 방송대 청소년교육과에 입학해 2021년 2월 61세에 드디어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지금도 스포츠센터에서 하루 4시간 일하며 손녀를 돌보고 있는 손혜선 동문의 삶은 숫자로는 결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절박하고 처절한 삶의 흔적은 2015년 1월 26일 EBS 프로그램 ‘달라졌어요’에 방영된「눈물로 얼룩진 모정의 세월」편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를 계기로 손 동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중학교 졸업장을 갖겠다는 꿈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방송대 공부를 통해 제2의 꿈을 꿨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359번지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단출한 그의 출판기념회에는 방송대와 회사 동료, 교회 성도들, 독서모임 지인들 30여 명이 함께했다. 손혜선 동문의『일기장의 기적』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그의 두 번째 꿈 성취를 응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치유를 가져다준’이라는 책의 부제가 눈길을 끌었다. “제가 출판한 책은 일기장의 기록을 통해 오랜 아픔인 트라우마가 해결돼 치유가 있기까지의 여정을 정리한 것입니다. 어려서도 일기를 썼고, 육아와 바쁜 세상일로 중단했다가 어른이 되어 살만해질 무렵인 50대 이후부터 다시 일기를 썼어요. 그 기록이 과거를 자세히 볼 수 있게 정확한 타임머신 역할을 해준 덕분에 저의 오랜 과제가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기장 속에는 방송대에서의 힘들고 즐거웠던 생활도 기록돼 있어요. 방송대에서 배우는 즐거움이 제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수레바퀴 역할을 충분히 해줬기에 치유가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죠.” 분홍색 스웨터 상의에 머플러를 한 손 동문이 지인들에게 사인해 줄 책을 쌓아놓고 앉아 있었다.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나와 기억과 추억을 전했다. 무작정 찾아가 글쓰기를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던 손 동문의 ‘글쓰기 스승’ 천원석 박사(경기대), ‘달라졌어요’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EBS 진원찬 피디, 안산문인협회장 김영숙 시인, 그의 막냇동생 손상진 씨 등이 마음을 담아 축하를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빛나는 삶으로 변화해 온 삶의 모습 손 동문의 책 출판에 큰 힘이 돼 준 천원석 박사는 “누군가에게 생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손혜선 작가가 찾아와 글쓰기를 가르쳐달라고 매달리더군요. 그 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빛나는 삶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죠. 그를 만난 것은 저에게 큰 축복입니다”라고 말했다. 손 동문은 사실 책을 내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도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왜 내야 하나? 책을 내도 될까?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에 누가 관심을 가질까?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을 출판한 뒤 주변에서 보인 반응을 보면서 ‘책 내기를 참 잘했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힘들게 살고 있는 분들이 자신의 책을 읽고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도 갖게 됐다. “방송대 청소년교육과를 다닐 때도 컴퓨터 문외한이라 정말 고생했어요. 독수리타법이라고 하죠?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긴 글을 써가다 보니 나중에는 익숙해지더군요. 그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이 놀랍더라고요. 꿈인지 생시인지…. 출판사에 보내고 수정본을 받으니 비로소 실감이 나더라고요. 진짜 책이네, 내가 책을 썼구나, 스스로 감동했죠. 제 책이 주변에 퍼져나가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슴이 벅찼어요. 두렵기도 했고요.”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한 지인은 “손 작가님의 책을 처음에는 가볍게 읽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책을 다 읽고 내려놓을 때는 정말 무겁게 내려놓았죠.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이뤘던 것 같아요. 가슴이 먹먹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는데,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라고 고백했다. 손 동문은 방송대 생활 가운데 출석수업에 참석하던 일과, 방송대 한마음체육대회를 특별하게 기억했다. 방송대생이라는 실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혼자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했다. 스터디는 주로 시험 때 활용했다. 받았던 도움 나눠주고 싶어 그 자신이 어려운 가시밭길을 헤쳐오느라 덕지덕지 상처를 입었지만, 일기장의 기록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던 터라 후배들을 위한 덕담도 빠뜨리지 않았다. “직장 일만도 힘든데 방송대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먼저 겪어서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 시기 또한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때문에 대학 공부가 힘들긴 하겠지만, 거기서 얻어가는 지식과 경험들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후배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 될 거라고 믿어요.” 오랜 일기 쓰기를 통해 꿈꾸던 작가가 된 손혜선 동문. 자신의 책이 세상에 선을 보였고, 많은 독자의 반응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향후 어떤 방향으로 글을 써갈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는 치유 모임이나 작은 독서모임 등에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힘든 삶에도 무너지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냈다”라고 그를 지켜본 막냇동생 손상진 씨의 말처럼, 슬픔도 감동으로 만들어 내면서 보석처럼 빛나는 자신의 스토리를 들려준 손혜선 동문의 다음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203호
최익현
2024-03-0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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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일 바다로 출근합니다”
해녀는 물질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분수껏 물질하되 경쟁도 금지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줄 이는 동료밖에 없다. 동료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해녀 문화의 정수다. “안녕하세요! 오전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고, 오후에는 식당 ‘해녀고기’에서 맛있게 고기를 구워드리는 해녀 이유정입니다. 저는 현재 어릴 적 꿈이었던 해녀가 됐고, 고깃집 사장님도 됐으니 두 개의 꿈은 벌써 이뤘네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꿈이 많아요. 방송대도 졸업해야 하고, 그림도 배우려 제주대 미술학과도 편입했거든요. 물질도 더 잘하고 싶고, 수중 정화활동도 알리고, 책도 쓰고 있어요. 저 사람처럼 살면 어떨까 하는 매력이 느껴지면서 ‘모범’이 되는 해녀가 되고 싶습니다!” 고교 관악부에서 튜바 불며 폐활량 늘어 매일 제주 바다로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 올해로 해녀 5년차에 접어든 이유정 학우(관광 4)다. 큰 눈망울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도레미파솔에서 ‘솔’ 높이의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이 학우를 제주지역대학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넘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기자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고연봉 회사원으로 살던 이 학우가 해녀가 된 건 서른한 살 때였다. 하지만 돌고 돌아 어릴 적 꿈이었던 해녀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 여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친구들과 노는 게 그저 좋았던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시절, 악기를 너무 배우고 싶어 관악부에 들어갔다. 키도 크고 통통한(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강한’) 체격이었던 그에게 선배들은 가장 큰 관악기 튜바를 추천했다. 악보를 못 외워 지적받기도 했지만, 타고난 폐활량이 더 늘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바이올린, 클라리넷을 전공한다는 소릴 들었지만, 고가의 악기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연주자의 꿈을 접었다. 긍정적이고 사교성도 높은 그녀는 그후 중국어로 관심을 돌렸다. 13억 중국인이 친구가 된다는 생각으로. 고3 때 악기를 사달라는 말 대신 중국어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말했다. 한라대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는데 고깃집에서 일하면 원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성적도 잘 받아 중국 연태로 연수도 다녀왔다. 그는 “호돌이가 마스코트였던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태어난 아이가 20년이 지나서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열린 중국으로 갔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졸업 후 공부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제주의 여느 청춘들처럼 육지에 대한 동경이 더 컸다. 그래서 상경을 결심했다. 오전에는 학원으로 출근하고, 오후에는 전단지를 돌리고, 밤에는 좌판에서 악세사리를 팔며 밤낮없이 일했다. LG전자 공장에서는 배터리 조립 2교대 근무도 했다. 1일 5식 하며 하루 3시간만 자고 일하는 날이 반복됐다. 그때 든 생각이다. “세상 직업에 귀천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일은 단순노동인데 월급도 많이 주기도 하고요. 어떤 게 나에게 맞는 일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고된 육지 생활이 재미는 있었지만, 과연 인생에 어떤 의미일지 고민됐다. 어부 아버지, 농부 어머니가 당신처럼 살지 말라고 곱게 키운 장녀였다. 4년 만에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그렇게 제주도로 돌아갔다. “엄마, 아빠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님 앞에서 펑펑 울었다.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제주도로 중국인 입도가 늘면서 전공을 살려 외국인을 담당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부모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더운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사무실이었다. 게다가 고연봉!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고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인가? 이렇게 살기 위해 고향으로 온 것일까? 이 직장이 내게 맞는 평생 직업일까? 바다로 산책을 나갔다. 서울에서 돌아와 바라보는 바다는 너무 좋았다. 윤슬 사이로 둥둥 떠 있는 주황색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해녀 삼촌(성별 구분 없이 웃어른을 일컫는 제주말)들이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광채가 났어요. 테왁(해녀가 가슴을 얹고 헤엄칠 때 쓰는 부표의 일종)을 메고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맞다. 내가 해녀가 된다면? 이란 생각이 든 순간이에요.” 해녀는 특별한 기계장치 없이 내 호흡으로 넉넉한 바다가 내어주는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또한 물질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분수껏 물질하되 경쟁도 금지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줄 이는 동료밖에 없다. 동료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해녀 문화의 정수다.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가진 ‘제주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잠수할 수 있는 수심, 어획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구분한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해녀 될 수 없어 해녀가 되는 길은 녹록지 않다. 해녀학교 졸업 후 인턴과정을 거쳐야 한다. 1년간 물질 60회 또는 120만 원의 위탁판매 실적이 있어야 한다. 해녀회, 어촌계, 수협 조합원 가입도 필수다. 특히 해녀회 가입은 모든 해녀의 만장일치로 결정된다. 한 명의 해녀라도 반대하면 아무리 실력이 좋더라도 해녀가 될 수 없다. 해녀학교를 졸업하고도 짧게는 2년, 길게는 9년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외지인일 경우 ‘지켜보겠다’는 기존 해녀들도 많다. 예상처럼 큰 벽은 부모님이었다. 평생 바다에서 일하면서도 딸은 절대 배에 태우지 않았던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위험한 바다에 나간 남편 생각에 평생을 가슴 졸였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결국 부모님이 졌다. 아버지 손을 잡고 해녀회장, 어촌계장을 만났다. 2019년 4월, 한수풀해녀학교에 등록했다. 3개월 해녀학교 수업은 입문반(취미반) 토요일 하루, 양성반(취업반)은 토, 일 이틀 수업으로 진행된다. 무턱대고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 일과 병행했다. 어릴 때부터 바다 수영이 익숙했기에, 물질도 빠르게 습득했다. “‘저는 취업반으로 들어왔지만, 가장 잘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제가 좀 ‘요망지게’(‘야무지게’의 제주말) 잘 했어요.”(웃음) 국내에 프리다이빙 대가인 노명호 선생에게 숨참는 방법도 배웠다. 바다를 누비며 실제 물 속도 탐험했다. 해군해난구조대 SSU 선배들께 인명구조를 배우며 자격증도 취득했다. 배운 아이가 왜 해녀가 되려냐는 해녀삼촌의 물음에는 “제가 삼촌들 보디가드 해드릴게요! 망사리(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그물)도 다 들어드릴 거예요!”라며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결과는? 90세 삼촌까지 만장일치! 2020년, 31세에 마침내 해녀가 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수영하는 기분! 해녀는 겨울에도 물질을 나간다.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뿔소라가 철이다. 상군해녀들은 40kg씩 잡지만, 절반인 20kg 정도 잡는다. 매일 물질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는 ‘무료로 헬스장, 수영장 다니는 기분’이란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 바다에서 물질할때면 대단한 일 하는 사람임을 새삼 느낀다고 했다. “바깥기온은 영하지만, 제주 바다는 10℃ 안팎이에요. 바닷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지죠. 마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수영하는 기분이라니까요?” 매일이 위험한 바다지만, 하루는 갑자기 바뀐 조류 때문에 오리발을 차고도 휩쓸려갔다 옆 동네 해변까지 떠내려 가면서 원래 나오던 자리로 못 돌아갔는데, 마침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에 이어 바다로 나간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해녀청년분과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새로 들어오는 해녀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봉사다. 주변에서는 MZ세대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테왁에 나이키 로고를, 신발에 샤넬 로고를 매직으로 그리고 다닌다. 2021년 12월 2일부터 2023년 10월까지 해양수산부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귀어귀촌센터의 귀어귀촌 홍보모델로도 활약했다. 화사하게 웃는 그의 사진은 제주공항에 걸리기도 했다. 사진을 본 해녀삼촌들이 “유정이 사진이 왜 저깄노? 출세했네”라고 말한다며 웃었다. 바다 정화 활동도 매일 한다. 직장이 바다인 그는 반려견 두 마리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씩 쓰레기를 줍는다. “직장 평수가 워낙 넓어서 청소가 힘들어요!”(웃음) 이 학우는 힘 닿는 한까지 해녀로 일하고 싶다. 하지만 요즘 상황이 많이 아쉽다. 1970년 1만 4천명이던 제주해녀가 2023년 기준 3천명 아래로 떨어졌다. 이 학우가 속한 해녀회도 작년까지 21명이었는데 올해 15명으로 줄었다. 건강, 가족 권유로 그만뒀다. 신입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제주 해녀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해녀 수입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충분치 않아 오래 전 꿈이었던 고깃집 사장을 실천에 옮겼다. 2020년 7월 22일 식당 ‘해녀고기’를 오픈했다. 예전 해녀들이 물질 후 뭍으로 나와 불턱에서 고기와 해산물을 익혀 먹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했다. 단 하루 쉬는 날 없이 연중무휴다. 고무로 된 해녀복 이전에 입던 전통 해녀복에 수경을 끼고 손님들에게 고기를 구워 대접한다. 해녀의 역사와 가치를 알려주면서. 귀가길 제주공항에서 손님들은 그의 사진 옆에서 인증샷을 찍어 그에게 보내기도 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주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연히 찾아온 방송대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2022년 1월 5일. 노형동을 함께 걷던 지인이 방송대를 졸업했는데 쉽진 않았다는 말을 건넸다. 잊고 지냈던 공부 로망이 되살아났다. 한달음에 제주지역대학으로 달려갔다.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아’라는 생각으로 관광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중국어를 전공한 데다 관광도시 제주도를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겠다는 포부였다. 온라인 수업에서 20명이 넘는 학우들과 만나면서는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처음에는 수강신청도 놓칠 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다며 그 따뜻한 마음에 감동했다. 2023년에는 관광학과 4학년 과대표로 봉사했다. 현재는 문화부장이다. 오전에는 물질, 오후에는 고깃집. 공부할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찾는 걸까? “저는 오늘 할 일을 다 적어요. 그중에 가장 쉬운 것부터 먼저 합니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건 마지막에 집중해서 해요. 미루다 보면 쉬운 것조차 못하니까요. 제가 좀 긍정적이거든요. 날씨가 궂어 손님이 없는 오후에는 이어폰을 끼고 형성평가 들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과제를 하는 중에 손님 들어오면 고기 굽는 게 좀 힘들었죠.”(웃음) 제주어촌특화센터에서 미래리더로 활동하면서 이 학우는 교육 측면에 눈을 돌렸다. “현직 해녀가 아이들에게 생존수영을 가르쳐주면 어떨까요? 제주도로 수학여행도 많이 오는데, 아이들에게 추억도 남기면서 슬픈 사건도 잊지 말자는 의미도 있고요. 이걸 어떻게 펼쳐볼지가 요즘 제 고민이에요.”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에 눈에 들어오면 바로 실천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호동 해녀(태어난 이호바다를 딴 해녀삼촌들이 부르는 별명)는 방송대가 더 알려지길 바란다. “해산물 잡는 해녀도 꿈꾸고 배우는 걸 보세요.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 많은데, 조금만 투자해서 도전하면 여러분의 배움도 많아지겠죠? 멋진 선후배도 만날 수 있고요. 이제는 손 내밀면 악수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인데, 익숙치 않아도 먼저 인사해주는 곳, 그 따뜻한 곳이 바로 방송대입니다. 학우와 동문이고요.” 제주=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202호
윤상민
2024-03-02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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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재로 쓰이던 귤껍질, “차로 마시고 칩으로도 즐겨요”
학우들에게 귤피차를 할인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한다 수익이 나면 제주지역대학에 이익금도 나누고 싶다 “제주도가 감귤의 고장이잖아요. 감귤초콜릿처럼 귤로 만든 제품이 많아요. 그런데 귤껍질은 ‘진피(陳皮)’라고 해서 예로부터 한약재로 썼던 거 알고 계시나요? 양파 껍질의 비타민 P성분이 있어서 혈관도 깨끗하게 해준대요. 감기 걸리면 입안이 바짝 마르죠? 귤 보면 침이 고이니, 신 걸 먹어주면 감기에도 좋겠고요. 저는 귤피차, 풋귤차를 만들고 있어요.” 첨가물 ‘0’, 위생에 최우선! 4인 가족 가운데 1명은 관광업에 종사할 정도로 관광업이 성한 제주도의 특성처럼, 김미라 학우(관광 4) 역시 1988년 국내관광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해 여행가이드로 일했다. 남편은 여행사를 운영했다. 평범했던 가이드는 어떻게 사장님이 된 것일까? 뭍에 있는 한 귤피차 생산업체가 연락을 준 게 시작이었다. “관광안내사협회 회원으로 있다 보니 제주에서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조사하고, 어떤 상품이 잘 팔리는지 확인도 해요. 귤피차 판로를 개척해달라는 한 업체의 연락을 받고 1년 정도 오프라인 매장을 확보해 나갔죠. 그런데 업체에서 당장 수익이 안 나온다며 사업을 철수하겠다길래, 제가 제주에 지사를 내겠다고 했어요. 새 상품이 시장에 안착하려면 5~6년은 기다려야 하는 걸 아니까요. 게다가 저는 귤피차의 가능성을 봤거든요.” 이후 본사가 사업을 중단하면서 김 학우는 자연스럽게 농업회사법인 (주)제주허브를 설립하게 됐다. 사회적 기업으로 도의 지원도 받으면서 생산라인을 직접 가동했다. 직원들도 10여 명 고용했고, 남편도 일손을 도왔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중독자’라고 불릴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가이드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공항과 관광객들이 가는 쇼핑센터에 완제품을 납품했고, 귤 분말을 감귤초콜릿 공장에 납품하는 등 B2B 영업 판로도 개척했다. 귤피차는 무농약 귤로 만든다. 먼저 귤을 숟가락으로 일일이 깐다. 건조 단계를 거쳐 말린 귤껍질을 무채처럼 기계로 썬다. 파쇄한 귤피를 로스팅 후 티백으로 만든다.(하단 사진 참조) 일반 티백에는 0.5~1g 정도의 귤피가 들어가지만, 김 학우가 생산하는 ‘오티아 귤피차’(otia는 라틴어로 안락하다는 뜻)에는 3g이 들어간다. 두세 번 우려먹을 수 있는 양이다. 풋귤을 통째로 말려 생산하는 ‘풋귤차’도 생산한다. 풋귤은 청귤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노랗게 익기 전 초록색을 띠는 미숙과의 일종이다. 단맛이 강한 황금향, 천혜향보다는 신맛이 강한 편이다. 여타 공장처럼 주스 원액을 짜낸 귤껍질이 아니라 100% 풋귤을 첨가물 없이 쓴다. ‘건강하고 안전한 로컬푸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김 학우는 위생만큼은 자신 있다고 말했다. 점점 성과가 나오던 중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제주도를 강타했다. 코로나19였다. 예측할 수 없던 환경적 요인으로 정들었던 직원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코로나19로 회사는 (주)탐진유통으로 전환했다. 지금은 귤 수확 철에만 외국인 노동자 10여 명을 고용한다. 직원들이 꺼리는 화장실 청소 같은 일을 솔선수범하면서 짬짬이 방송대 형성평가를 들으며 공부할 수 있는 여유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대동제에서「한잔해」영어로 부르기도 사실 김 학우는 2014년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적이 있다. 중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자녀들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가정통신문에 적는 부모 학력란에 ‘고졸’이라고 적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일만으로도 24시간이 부족한데, 한자를 외워야 하는 부담감에 중도 포기했다. 늦둥이 셋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2020년 관광학과로 입학했다. 수십 년간 관광현장에 있었으니 공부가 좀 더 수월할 거란 판단이었다. 그의 예상처럼 ‘항공권 예약발권’ 강의, 모객 여행 상품 개발 과제물 등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코로나 학번’이라 교류가 없다가, 2021년부터 학생회 임원으로도 봉사했다. 코로나 상황이 조금씩 풀리면서 학우들과 월 1회 문화탐방도 다녔다. 작년 여름부터는 매주 목요일 저녁 두 시간씩 영어스터디도 하고 있다. 그 덕에 11월에 열린 대학동아리연합회 대동제에서「찐이야」,「한잔해」를 영어가사로 불렀다. 스터디원들과 선글라스, 옷도 맞춰 입고 신나게! 공부, 교류만이 아니다. 방송대 생활은 그에게 사업적으로도 힘이 됐다. 제41대 제주총학생회장을 역임한 농학과 김병우 학우를 만나면서는 귤 수급부터 보관까지 수월해졌다. 귤은 수확할 수 있는 3~4개월 동안 1년 치 물량을 확보해야 한다. 수급도 쉽지 않지만, 귤을 저온저장고에 보관해야 하는데 김병우 학우의 도움이 크다. 지난해에는 제41대 제주총학생회 정책국장으로 봉사했다. 그런 그를 보며 주변에서는 대단하다는 사람도 있고, 뭐하러 공부하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상품을 포장하며 강의를 듣고,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조금씩 성장하는 게 느껴질 때면 기분이 좋다. 처음엔 어려웠던 컴퓨터도 이제는 익숙하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방송대 전도사’가 됐고 시동생도 입학했다. 관광학과를 마치면 중어중문학과에 재도전할 계획이다. 온라인 판로 개척 고민 중 김미라 학우는 귤피차, 풋귤차에서 취급 품목을 확장하고 있다. 귤피를 채로 썰어 귤피칩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다. 시장조사를 하면서 톳에서 가능성을 보고 어촌계 직거래 또는 수협 공개입찰로 1년 치 톳을 확보하고 있다. 말린 톳으로는 톳밥 등 건강식을 만들 수 있다. 현재 김 학우의 제품들은 제주공항, 인천국제공항면세점, 관광쇼핑센터 등에서도 살 수 있다. 오프라인 판로를 더 개척하지만, 앞으로는 온라인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외국에서 공부하던 큰아들이 귀국하면서, 온라인 수출, 무역 판로도 알아보는 중이다. 방송대 학우들에게 할인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는데, 온·오프라인 가격 차별화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지 고민 중이다. 수익이 생기면 제주지역대학에 이익금도 나누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제주=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201호
윤상민
2024-02-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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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방송대 교수로 25년 … “스승 같은 제자들과 행복했습니다”
“1997년 시간강사로 서울지역대학에서 강의했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 아기를 업고 강의실 맨 뒤에서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 있었어요. 공부하고 싶은 마음과 아이를 봐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제가 알기에 가슴이 찡했었지요. 답안지를 보니 제 농담까지도 적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스펀지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방송대라는 걸 느꼈죠. 이런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제가 학생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도 ‘공주’였거든요. ‘공부하는 주부’요.”(웃음)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서야 박사과정을 시작했던 이해주 방송대 교수(교육학과)가 2월 29일 퇴임을 앞두고 있다. 1999년 방송대에 부임해, 서울지역대학장을 마지막으로 25년 방송대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퇴임을 앞둔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시원 섭섭하다”라며 해사하게 웃었다. 평생교육사 그리고 평생교육프로그램개발 경진대회 방송대에서 한 여러 일들 중에 평생교육사 자격증 과정을 설치한 것은 이 교수에게 가장 큰 보람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학제가 바뀌고 방송대가 교사자격증을 발급할 수 없게 되면서 만든 대안이다. 하지만,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따도 ‘써먹을 데가 없다’는 학생들의 말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평생교육은 학교 밖, 제도권 교육의 틀을 벗어나 소외된 학습자들에게 교육을 제공해,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했죠. 사실 폼나거나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었기에 가시밭길을 걷는 학생들에게 매우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제가 아는 건, 우리 사회가 평생교육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따뜻해지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로 변한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학생들이 활동할 방법을 고심하다가 ‘평생교육프로그램개발 경진대회’를 기획했다. 경진대회가 올해로 20돌을 맞으며 수상한 프로그램으로 지역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제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방송대평생교육사협의회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랜 기간 자원봉사로만 활동하던 학생들이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지역활동가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흐믓하다고 한다. 학생의 학습에도 관심을 가졌다. 중도이탈률이 50%가 넘던 시기, 이 교수는 학습스터디(동아리)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함께 공부하면 졸업할 수 있다며, 학생들의 스터디 활동을 독려했다. 이어 선배들이 후배들의 학습을 돕는 ‘멘토링 사업’도 제도화했다. 장시원 당시 총장도 적극 지원했다. 교육과학대학장을 하면서는 학과 교수진들과 함께 ‘실습지도교수제도’를 만들었다. 당시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문 활동가들이 거의 무료 봉사처럼 실습지도위원으로 위촉됐었다. 그후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학생 40명당 실습지도위원 1인’이라는 규정이 만들어져 학교차원에서는 실습지도교수제도를 만들어야만 했고, 이들에게 실습비 수당 지급이 가능해졌다. 이 교수는 “우리 과 학생들은 훗날 투터가 되는 것이 꿈이고 그 튜터들의 꿈은 자신의 지역에서 실습지도교수가 되는 거예요. 이들을 중심으로 지역 평생교육활성화가 이뤄지도록 구조화했고, 그것이 전체적으로 학습과 일로 선순환작용을 하고 있다고 봐요. 교육학과의 성공 비결 중 하나겠죠?”라며 웃었다. 낡은 노트 빼곡히 채운 이름들 이 교수는 방송대에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 강조했다. 그냥 대학학위를 얻고자 교육학과에 들어왔던 학생 중에 박사까지 따고 교수가 된 제자가 10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현장에서 평생교육 실천가로 활동하는 이들까지 치면 훨씬 많다. 그는 이들을 ‘스승 같은 제자’라고 표현한다. 인터뷰 도중 갑자기 일어난 이 교수가 겉표지가 다 헤진 노트 한 권을 들고 왔다. “여기 보면, 실제로 지역에서 평생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제자들이 참 많아요. 대구에는 몇 년도에 졸업한 누가 어떤 활동을 하고, 청주에는 어떤 동문이 무슨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고, 이런 것들을 다 넘버링해서 기록했죠. 지역마다 다 있어요. 이걸 계속 늘려가는 것이 제 소망이었거든요.” 20년 넘게 노트에 차곡차곡 기록했던 이름들 중에는 실제 이 교수가 현장으로 찾아가 인터뷰한 이들도 많다. 아이 엄마로 살던 경력단절 여성, 학위가 필요했던 여성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방송대에 오게 되고, ‘00엄마’로 불리다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경험을 한다. 이후 이들은 학습동아리에 가입하고, 함께 토론하며 학습을 하면서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스터디장이나 학생회 임원이 되면서 리더로서의 역할도 경험한다. 교육봉사를 시작하고 봉사활동을 통한 사회참여로 이어진다. 이들 덕분에 이 교수의 전공인 ‘시민교육’이 수년에 걸친 추적으로 도식화될 수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논문 「중년기 여성의 시민성 발달과 시민참여에 관한 연구」(〈통합인문학연구〉 제8권 2호, 2016)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우리 사회에서 방송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방송대가 의미 있는 이유로는 ‘진짜 시민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성인이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인교육이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방송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간 썼던 논문들을 리뷰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시민을 길러내야 할 것인가, 여러 준거에 의해 발생하는 차별을 불식하고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 제시를 지난달 출간한 학술서 『다문화시민교육』(에피스테메)에 담았다. “방송대는 나의 전부” 평생교육원장, 교육과학대학장, 프라임칼리지학장 등 여러 보직을 거쳤지만, 서울지역대학장으로 학생들과 밀착했던 1년은 잊을 수 없다. 서울총학생회의 파행 사태 정중앙으로 들어가 한 학기를 학생들과 대화해 결국 정상화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학생회 구성원들에게 이 교수는 이렇게 당부한다. “우린 결점투성이의 존재입니다. 상대가 어떤 결점이 있다고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어요. 나 역시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닌 걸 인정하면, 상대의 단점도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숙원사업이었던 ‘U3A 프로그램’(University of the Third Age) 시험 가동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고령화되는 현시점에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노인문제를 방송대 지역대학 층위에서 실험해본 것이다. 8주간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거의 ‘100% 만족한다’라고 답할 정도였다. 이 교수는 “노년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U3A를 통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살겠다는 응답이 많았으며 학교가 졸업생에게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졸업생도 있었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U3A와 같은 노년교육 프로그램은 방송대가 앞으로 고령화사회를 위해 중요한 사회적 기여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졸업생이 다시 학교로 재편입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연구와 교육으로 바쁘겠지만, 후배 교수들이나 지역대학장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드러냈다. 그래도 분명히 제가 아는 건, 우리 사회가 평생교육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따뜻해지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로 변한다는 겁니다 25년을 보낸 방송대는 이해주 교수에게 어떤 의미일까? 라는 질문에 ‘나의 전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울컥한 마음을 잠시 다스린 이 교수는 ‘내가 가진 생각, 내 인생의 꿈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학교’였다고 덧붙였다. 퇴임 후에는 지역사회교육실천본부에서 봉사할 예정이며, 개인적으로는 악기와 외국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방송대 일본학과 입학도 생각 중이다. 그런데 “저도 시험 보는 게 두려워서 걱정이 되기는 해요”라며 살짝 웃었다. 이 교수의 마무리 말이다. “후배 교수님들은 알아서 저보다 더 잘하실 테니 걱정 하나 없이 갑니다. 방송대가 우리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학교인 만큼,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더 배우고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성장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것이 개인적인 성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나 사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줘서 좀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에 도움을 주는 사람, 방송대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200호
윤상민
2024-02-16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