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정년퇴임 교수에게 듣다

27년간의 방송대 교수 생활을 마치고 8월 말 퇴임하는 이영 교수는 일본학과 원년 멤버로서 학과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후학 양성에 매진해 왔다. 학부 시절 중국 현대사에 관심을 가졌지만, 전공을 바꿔 일본 중세사 연구에 나섰다.
이영 교수는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왜구와 고려―일본 관계사」였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즉,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부터 가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 시대 초기까지의 고려와 일본 관계 및 교류사를 해명하는 것을 중심 테마로 한 논문이다. 이 논문은 『倭寇と日麗關係史』(東京大學出版會, 1999.11.)라는 단행본으로 발표됐으며, 이후 2011년 국내에서 『왜구와 고려―일본 관계사』(혜안)로 출판됐다. 이외에도 『팍스 몽골리카의 동요와 고려 말 왜구』(혜안출판사, 2013),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방송대출판문화원 에피스테메, 2015) 등의 굵직한 저서가 있으며, 지금까지 발표한 논문도 56편에 이른다.
이영 교수는 특히 대학원 세미나를 통해 실력 있는 제자들을 육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방학 중에도 쉬지 않고 원서 강독 세미나를 이어 왔는데, 그의 지도로 유력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대학원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학부 학생들에게는 현지답사를 통한 과제물 작성을 강조했다. 텍스트로만 공부하지 말고, 실제 텍스트와 맞물린 역사적 공간의 맥락까지 파악하라는 메시지다.
중국 현대사를 공부하려다가 일본 중세사로 길을 바꿔 연구자의 길, 교수의 외길을 걸어온 이영 교수는 일본 지도자들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주장에는 당연히 한반도 식민지화나 중국 침략 등에 대한 반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양국 간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러한 역사인식에서 유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으로서는 앞으로도 이웃 나라 일본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동향에 경계심을 가지고 꾸준히 일본을 연구하고 알아가야 한다.”
정년을 앞두고 연구실을 정리하고 있는 이영 교수를 8만나, 방송대 교수로서 지낸 시간과 일본학과 창설 이후 일본 연구의 의미, 학우와 학교에 대한 당부 등을 들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1997년 7월 방송대에 부임하셨습니다. 퇴임을 맞은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정년하는 날을 의식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그날이 다 돼 가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무엇보다도 27년간의 재직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신 여러 총장님들과 보직 교수님들 그리고 동료 교수님들, 함께 대학원 수업을 진행했던 튜터 선생님들, 학과 조교 선생님들, 저의 개인 조교님들, 또 두 차례의 지역대학 학장 재임 당시 함께 근무하며 도움을 주셨던 여러 교직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일본 중세사에 관한 연구로 도쿄대학(東京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일본 중제사를 전공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또 ‘일본학과’에서 연구자로, 교육자로 살아오신 그간의 교수로서의 삶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기신다면요
일본 유학 당시 지도교수님이 일본 중세사가 전공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죠. 일본사 연구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1986년 초였고, 그해 가을부터 도쿄대에서 1995년 9월에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약 10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어요.
대학 2년생이었던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과 12·12 쿠데타 그리고 다음 해 짧은 서울의 봄과 5·17 광주민주화운동, 암울한 전두환 시대 등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은 20대 초의 애송이였던 저를 ‘진지하게’ ‘(민족의 발전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려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할 당시에는 중국 현대사, 중국 공산당사에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1981년 한길사에 번역 출간한 노무라 고이치(野村浩一, 1930~2020)의 『중국 현대사』를 읽고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죠. 1982년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중국과 미수교 상태였기에 대만에서 석사를 하고 프랑스로 박사과정을 할 생각이었어요. 대만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일본인 친구를 통해 일본에 호기심을 갖게 됐고, 일본 여행을 하면서 일본 역사를 공부하기로 계획이 바뀐 거죠.
일본 여행에서 받은 충격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컸어요. 물질적 풍요로움은 물론 성숙한 민주주의, 공공질서를 준수하는 일본 시민들의 모습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사회를 본 것만 같았죠. 바로 이웃에 이렇게 발전하고 성숙한 사회가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던 거죠. 폭력과 억압과 부정부패, 부조리가 판치는 군사독재 하의 한국 사회와 비교하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일본처럼 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라고 생각하면 정말 절망감만 느꼈거든요. 그런 상황이다 보니 중국 현대사에서 막연하게 일본 역사로 방향이 바뀌게 됐고, 우연히 지도교수님이 중세사 전공이어서 따라 하게 된 거죠. 사실 이것도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좋았던 것이 일본적인 사회가 형성됐던 것이 중세였기에 일본 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1980년의 민주화 투쟁을 실패로 생각하고 중국 현대사를 공부하기로 했다가, 우연히 일본 역사로 방향을 틀었지만,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 걸어온 길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어요. 다시 말하면, 1970~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으며, 역사를 길게 보면 일시적 좌절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방송대 일본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제가 책무로 생각했던 것은 ‘한국 사회에 일본 역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확산시키고, 계획했던 연구 목표를 완수한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이 두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고 자평하기에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또 학부 학생들,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본의 사적지 답사 여행했던 것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고요. 제 취미가 역사 관련 책을 읽고 답사 여행하는 것인데, 강의를 해서 학생들을 동호인으로 만들고 또 가보고 싶은 곳을 함께 여행했으니,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월급을 받은 것이죠. (웃음)
유일한 불만은 학생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대학원 과정이 생겨나서, 흙 속에서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재능을 지닌 학생을 발견, 그 학생이 지식 습득과 사유를 통해 나날이 발전해 가고,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제게 없는 재능을 지닌 학생들을 보면서 겸허해질 수 있었던, 정말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점수로 평가한다면, 85점 이상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박사과정이 개설되지 않은 방송대 학제에서도 우수한 대학원생 배출에도 앞장서셨습니다. 제자들이 유수 학회지에 논문도 발표하고 성과를 보이기도 했고요. 특히 방학 중에도 매주 원서 강독 스터디를 중단없이 진행하신 걸로도 유명하신데요. 방송대 대학원 일본학과에서 발견하신 가능성, 그리고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교수의 덕목’은 무엇인가요
사실 10여 년 전 일본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 개설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격교육의 특성상 학생들이 지식을 습득하면서 발전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없어서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기 어렵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어요. 또 하나는 학부 과정의 교과 내용이라는 것이 교수에게 있어서는 대개 개론 수준의 내용이므로 몇 년간 녹화하고 강의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특별히 강의 준비를 할 필요가 없게 되고 따라서 점점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라 단순한 ‘강사’가 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거예요. 물론 뛰어난 강사가 되기 위해서도 각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만.
흔히 현대를 ‘지식과 정보’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 지식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 대학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방송대에 기대하는 사회적 역할은 아무래도 ‘연구 중심’이라기보다 ‘교육 중심’에 있다 보니 본교 부임 당시에는 뛰어난 연구 역량을 지니고 있던 교수들도 다양한 학교 업무에 쫓기면서 자연히 연구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수 연수로 영국, 프랑스, 독일의 원격 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죠. 영국 OU의 경우,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를 포함해 전 영국 대학 평가에서 10위 안에 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방송대 창립 당시의 배경이나 현재의 역할 등을 고려할 때, 학부의 대량 원격교육을 통해서 사회의 평가와 인식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소수 인원의 대학원 교육을 통해 훌륭한 연구자, 전문 지식인을 양성해 낼 수 있다면, ‘우리 대학에 대한 사회의 평가와 인식을 제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나름대로 대학원 교육에 열중하기도 했죠.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의 경우, 학생들의 구성은 이른바 명문대 졸업생과 방송대 졸업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문대 졸업생들의 경우는 대부분 본인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이 많고, 대학원에 들어와서도 학업에 뛰어난 능력과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따라서 이분들의 경우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방송대 졸업생들 가운데 놀랍게도 명문대 졸업생에 조금도 뒤지지 않은 잠재 능력을 지니고 놀라운 발전과 성과를 거두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는 “방송대에 와서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았어요. 이런 학생들을 발견할 때마다, 방송대 교수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사실 제 경우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연구자로서 또 교수로서의 기본적인 틀이 갖추어진 계기는 10년 동안의 도쿄대 유학 시절의 경험이었어요. 몇 가지 인상적인 경험을 소개하자면, 제가 수업을 들었던 일본사 교수님이 있는데, 그분은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인)문학부 학장이라는 보직을 맡을 것 같아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도쿄대를 일부러 몇 년 일찍 사임하고 ‘일본 방송대학교’의 교수로 옮겨가셨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제 지도 교수님의 경우, 매번 강의를 마치고 완전히 탈진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한 적이 있는데요. 유학 초기, 아직 연구자로서의 자의식이 부족하던 때, 지도 교수님이 저를 보며 독백하듯이 “연구는 목숨 걸고 하는 것이야”라고 중얼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사회가 교수에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재화와 자유로운 시간을 보장하며 존중해주는 것은, 그가 사회에 의미 있는 지식을 만들어내고 항상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고 또 필요할 때는 용기 있게 정의의 편에 서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현지 답사를 통한 과제물 작성을 강조하셔서 일부 학생들은 버거워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방송대에서 가르치시면서 교육자로서 보람을 느꼈던,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습니다
10여 년 전, 학부 학생들에게 「전근대 한일관계사」 과목의 과제로, 일본과 관련이 있는 사적 10곳을 답사해 사진을 찍고 관련 사실과 감상을 적어서 내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자 학생들이 방송대 학생들의 학습 환경을 모르는 ‘무지막지한(?) 교수의 만행’이라며 불평불만이 들끓었고 당시 학보에까지 기사화돼 성토 대상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작 과제를 수행한 학생들의 반응은 완전히 정반대였어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함께 공부하던 스터디 그룹의 학우들과 함께 졸업 여행 삼아 다녀와서 정말 좋았다, 남편 또는 남(여)친과 좋은 추억 여행이 됐다, 주변에 일본과 관련된 사적이 그렇게 많았는지 정말 놀랐다, 꼭 후배들에게도 같은 과제를 부과해 주기를 바란다 등 다양한 반응이었어요. 코로나19 펜데믹을 거치면서 10곳에서 5곳, 그리고 1곳으로 줄어들었습니다만, 지역대학 출장 중에 우연히 네이버에서 ‘방송대 이영 교수’라고 검색했더니, 당시 학생들의 성토 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글이 “왜? 북한에도 가서 답사하라고 하지!”라는 것을 발견하고 혼자서 크게 웃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인상적인 학생과 관련된 경험을 소개하자면, 대학원 1기생이었는데 일반 대학교의 미대를 졸업해 일본어 번역가로 활동 중인 학생이 있었어요. 함께 공부하면서 그의 우수함을 발견해 학문의 길을 권했는데 당사자는 당시 하던 번역가 일에 만족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10년 뒤 본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냥 번역가만 하기에는 당신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면서 일본 문부성 유학생 시험을 볼 것을 권했죠. 당시 그 학생은 34세로 문부성 유학생 시험 자격으로는 마지막 기회였어요. 그런데 그는 단번에 합격해 다음 해 도쿄대 석사 과정에 입학했고, 수년 뒤 석사 학위만 받고 귀국했더군요. 배우자가 직장을 가진 채, 한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가운데 박사과정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서 귀국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국내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할 것을 권했더니, 아무래도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면 좀더 생각해 보고 마음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한 뒤 잊고 있었는데, 2~3개월 지난 뒤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길래 K 대학 일문학과 박사과정에 추천했죠. 그곳에 입학한 그는 지금은 해당 대학에서 교수와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지닌, 아주 우수한 연구자로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직 법조인인 대학원 졸업생도 인상적입니다. 40대 후반에 우리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석사 논문을 쓴 것을 계기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뛰어난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신진 연구자로 학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그는 원래 아주 우수한 인재였어요. 처음 만나서 과제를 주고 한 달 뒤에 글을 써오라고 했더니 깜짝 놀랄 정도의 짧은 논문을 작성해 오더군요. 그래서 또 다른 과제를 주고 한 달 뒤를 기약했는데, 그와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상한(?) 경험을 하기도 했어요.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편의상 세세하게 분류하고 있지만, 서로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아서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연구자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젊었을 때, 한국사를 전공했는데 그 뒤에 일본어 독해 능력을 갖추고 전공 교수의 적절한 지도를 받으면 한국사와 일본사의 공통부분인 한일 관계사 예를 들면, 왜구 문제나 임진왜란, 근대 항일 의병 운동 등의 연구자가 될 수 있죠. 그래서 대학원에서 제 과목은 도쿄대 대학원에서 유학할 때의 경험을 살려, 원생들에게 과제를 주고 3시간 동안 ‘발표’가 아닌 ‘강의’를 할 것을 요구했어요. 그리고 이 ‘강의’를 잘 준비하려면 적어도 한두 달의 준비 기간이 요구된다고 했죠. 물론 원생 모두가 이 요구를 충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원생들이 놀랄 정도의 수준으로 ‘강의’를 수행해 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지닌, 본인도 깨닫지 못한 잠재 능력을 발견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진로 지도를 하기도 했어요.
수년 전, 본인의 삶이 불우하다고 느끼며 우울증을 앓고 있던 50대의 한 여학생이 학부에서 열심히 노력해 장학금을 받으면서 용기를 얻고,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한 사례가 있어요. 그 역시 3시간의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교수와 다른 원생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또다시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키우면서 더 노력하게 됐고, 또 그만큼 더 발전하고 자신감도 더 커졌어요. 이후 대학원 석사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타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해 하루하루 충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관심을 덜 가지게 됐고,
결국에는 또다시 먼저 서구화,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의해
식민지 지배라는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근년에 우리 사회가 일본에 관심을 덜 가지는 현상은

그런 잘못을 반복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들어요.

 

 

사실 1997년은 ‘방송대 일본학과’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해인데요. 학과 탄생과 이후 국내 일본학 연구에 기여한 의미 등이 큽니다. 이와 관련해서, 방송대 일본학과가 국내 일본(학) 연구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 최근 일본의 전쟁가능국가로의 전환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고 있는데요. 우리가 일본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듣고 싶습니다
일본학과가 시작하면서 일본학적인 지식의 확산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우선 일본의 역사,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 있어서 관련 서적이 교재나 또는 참고 도서로 다수 출간돼 일본에 대한 지식의 폭과 깊이가 확대된 점을 지적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타 대학의 일본학과 또는 일문학과의 학부 또는 대학원 과정에서 우리 학과의 교재를 대량 구입해 사용하는 사례가 많았고 우리 학과의 방송 강의를 다른 대학의 교수들이 자신의 학습과 연구를 위해 잘 보고 있다고 말해주는 경우도 많았어요. 흥미로운 일화가 있어요. 오래전 KBS에서 「이순신」이라는 사극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죠. 드라마 속에 일본군 장수들이 실내에서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배경이 되는 화면에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소개된 적이 없었던 일본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후지산을 배경으로 그린 파도 그림이 걸려있었어요.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9세기였으니, 1592년의 임진왜란 당시에는 존재했을 리가 없죠. 이 화면을 보고 일본학과 학생들이 KBS에 맹렬하게 항의해서 다음 회 상영에는 더 이상 그림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일화죠.
23세의 젊은 애송이 시절에 반일 감정만 가지고 일본 여행을 갔다가 일본에 관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일본이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일본학 특히 그중에서도 일본 역사에 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선, 우리가 학생 시절에 배운 우리 역사의 위인들을 떠올리면 대부분 항일 투쟁과 관련이 있죠. 이순신,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김구 등등, 이분들의 이름만 들어도 우리는 가슴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죠. 이것은 한국인의 아이덴티티가 일본과의 대립, 갈등, 투쟁 속에서 형성돼 왔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우리 조상들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을 접촉해 왔어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상대방을 두려워하거나 지나치게 의식하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이 두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죠. 일본이 국민당 군대와 싸워서 이긴 상해 사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장소에서 조선의 청년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장개석 총통으로 하여금 “5억 중국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크게 칭찬하고 그때부터 상해 임시정부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예산에 포함해 편성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일본을 대단하게 여기던 20세기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아니 더 잘해야 한다”라고 하는, 막연하지만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 문화 예술 분야나 여러 산업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성과를 낳은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해요.   
지금 일본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인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간단히 말하면, 이들은 근대화의 출발이 된 메이지(明治)유신은 성공적인 혁명이었고, 1차세계대전까지는 성공적인 역사였는데, 중국 대륙에 너무 깊숙이 쳐들어가 앵글로색슨 즉, 영미 세력과 충돌한 것이 잘못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주장에는 당연히 한반도 식민지화나 중국 침략 등에 대한 반성이 전혀 보이지 않죠.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양국 간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러한 역사인식에서 유래하고 있어요. 따라서 한국인으로서는 앞으로도 이웃 나라 일본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동향에 경계심을 가지고 꾸준히 일본을 연구하고 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와서 일본이 마치 쇠락해 가는 것처럼 여기고 일본에 관한 관심이 점점 약해져 가는데, 이게 무척 아쉬워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통신사행을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 일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었거든요. 그런 활동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관심이 약해졌고 결국에는 또다시 먼저 서구화,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의해 식민지 지배라는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근년에 우리 사회가 일본에 관한 관심을 덜 가지는 현상은 그런 잘못을 반복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요. 세계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곳이 한반도이니 우리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둘러싼 국가들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방송대를 선택해 학업의 길을 가고 있는 학우들에게도 해주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입각해 말씀드리자면, 시험 결과나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공부를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사 모든 것이 거의 다 그렇지만, 누가 꾸준히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학생 여러분들은, 대학 교수는 대부분 학창 시절의 성적이 아주 우수한 사람이었을 걸로 생각하실텐데요. 그런데 저의 경우, 학부 성적이 4.5 만점에 평점이 3.0도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싫어하거나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평소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 도서관에서 보내다가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이 도서관에 몰리기 시작하면 집에서 편안하게 쉬었던 편이죠. 성적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좋아하고 관심 있는 과목만 열심히 공부했던 거죠. 결과적으로 성적이 아주 우수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사람이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비웃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일본학과 학부생이 되어 공부하라고 하더라도 저는 일본어나 일본 역사 과목 정도는 상위 성적을 받을 자신이 있지만, 그 외 과목은 좋은 성적을 받을 자신이 없어요. 오늘날 새로운 지식은 전 세계에서 쏟아지듯이 생산되고 있는데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으며 또 알 필요도 없어요. 자기가 알고 싶은 것, 관심이 가는 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한 공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 대신 항상 글을 읽고 상상하고 ‘왜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습니다. 과목의 워크북 연습문제에는 정답이 없다며 불만을 표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일부러 답을 달지 않고 교과서에서 찾아보도록 한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도박해서 딴 돈이 쉽게 사라지듯이, 쉽게 알게 된 지식은 금방 머릿속에서 사라집니다.

방송대의 지나온 50년은 원격교육중심기관으로 자리잡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원격교육 확대, 학령인구 감소, 경기침체 등 사회경제적, 교육적 상황은 방송대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고 있는 방송대와 교직원분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씀이 있다면요 
현재 우리 대학의 핵심 체제는 1970년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25~6년 전 하계 교수 연수회에서 강사가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모든 오프라인 강의는 온라인 강의로 대체돼 교실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여러 교수님들과 함께 비웃은 적이 있었어요. 물론 당시 강사가 말했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과 기술의 발달 그리고 전 인류가 함께 경험한 코로나 펜데믹 등으로 인해 세상의 많은 부분이 온라인화됐고 또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잖아요. 더욱이 앞으로 AI 기술이 발달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고요. 전국의 지역대학 건물이나 강의실보다도 오히려 줌(zoom)과 같은 것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게 가성비도 더 좋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공 학과에 따라서 실습이 필요한 과목이 있으니, 대학의 모든 과목이 온라인으로 변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많은 부분이 온라인 수업으로 변해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경험입니다만, 방학 중 대학원 학생들의 스터디(주로 일본 역사 관련 원서 강독)를 프랑스 여행 중 지방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듣고 코멘트를 한 적이 있어요. 또 어떤 때는 파리 시내의 스타벅스 카페에서 스터디에 참가하기도 했고요. 앞으로 외국어 통번역 기능이 발전하면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의 강의에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학생이 ‘줌’을 통해 실시간 참가하는 것도 일상적인 풍경이 될 수 있어요. 앞으로 기술 발전에 따라 세상은 더욱 좁아질 것이고 또 우리들의 활동 공간은 더욱 넓어질 테니까요.
부임 뒤 몇 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일본 방송대에서 우리 대학으로 연수를 왔는데, 그걸 보고 “일본이 우리보다 더 나을 텐데 왜 우리 학교로 시찰 오는 것일까?”라고 의아하게 여긴 적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한국이 과감하게 국가 예산을 투자해서 디지털 개혁을 수행한 데 반해 일본은 전혀 그렇지 못했기에 아날로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죠. 앞으로도 방송대가 유연한 사고와 과감한 개혁으로 시대를 앞서나가고 또 변화를 주도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퇴임 준비는 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퇴임 후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요
현재 재직 기간 동안 발표한 논문을 두 권의 연구서로 엮어서 발행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또 일본에서 번역 출간할 계획도 있고요. 다음으로는 가능하다면 연구 결과를 토대로 콘텐츠 또는 그 전 단계의 콘텐츠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당시 역사의 교훈을 공유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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