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배움으로 삶의 위기 극복한 이동희· 이해수 동문

 

 

한국이 불볕더위에 신음하던 올여름 아프리카 잠비아 고지에서 소나무 가지치기와 조손가정에 옥수수가루 등을 전달하는 4주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막 귀국한 이동희(만 67세)·이해수(만 66세) 동문 부부를 만났다. 변지원 교수(중어중문학과)가 어느날 “귀한 학우님들을 소개하고 싶다. 정말 열심히 살고 계셔서 귀감이 된다”라며 위클리에 꼭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기울였을 노력과 살아낸 삶의 무게는 감히 어설프게 옮길 수가 없지만 행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지리라 기대한다. 살아온 삶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고, 교훈 그 자체인 이들 부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배움과 감사’였다.

 

고서정 기자 human84@knou.ac.kr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95년 6월, 영월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이동희 동문은 6만6천 볼트에 감전되는 끔찍한 사고를 겪었고, 두 팔을 잃었다. 두 부부를 구원한 은인이자 세상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돼준 것이 컴퓨터와 온라인 동호회였다.

“남편이 죽는다는 말을 두 달 동안 매일 했었어요. 남편이 살아서 저는 너무 좋았는데, 남편은 너무 힘들어했던 거죠. 밖에 나가지를 않았어요.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천리안 주부 동호회였어요. 내 은인, 나를 살려준 곳이죠. 거기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남편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감전 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한 달 보름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지만 이동희 동문은 “나를 왜 살려놔서 이 고생을 하게 하냐”라며 좌절에 빠져있었다. 그에게 두 팔과 다리가 없이도 씩씩하게 생활하는 A씨를 만나 다시금 일어설 힘을 갖게 해준 것도 동호회 회원들이었다. 당시 동호회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해수 동문을 위해 성금 200만 원을 모아준 것도, 남편에게 꼭 필요한 비싼 약재인 알부민 수백만 원어치를 사다 준 것도 이들 부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움으로 남았다.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부에게 컴퓨터는 적격이었다. 당시 한국전력 사택에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이들 부부밖에 없을 정도로 컴퓨터가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남편에겐 다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막다른 수단이었다. 필사적으로 배웠다.
 “자판부터 제가 가르쳐줬어요. 팔을 다친 후에는 키보드를 다루지 않았으니까요. 의수(義手)가 없을 때는 입에 볼펜을 물고 자판을 치면서 컴퓨터를 배웠는데 욕도 많이 얻어먹었어요. 가혹하게 가르친다고. 처음에는 남편도 싫어했는데 점차 좋아하더라고요.”


컴퓨터는 이들 부부에게 친구가 돼주었고, 이동희 동문은 친구인 컴퓨터를 재활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의수를 착용한 채 컴퓨터를 하는 훈련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계속되는 도전에도 실패를 거듭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이동희 동문은 결국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 정보처리기사, 컴퓨터활용능력2급 등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해수 동문도 PC 정비사 1급, 컴퓨터활용능력 1급, 정보처리기사 1급 등을 따며 함께 전문성을 키우는 동시에 마음도 치유하고 있었다.

컴퓨터로 1등 … 청와대 초청받기도

2002년 청와대 방문 당시 이동희 동문 가족들의 모습

하늘이 감동한 덕분일까. 이들의 노력이 값진 성취로 나타났다. 2000년 인텔코리아와 조인스닷컴에서 주최한 가족홈페이지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된 것이다. 가족 모두 함께 금강산 관광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001년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정보 가족’에 선발돼 상금 300만 원을 받았다. 이때부터 많은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서 운영하는 ‘배움나라’의 튜터로 컴퓨터를 가르치게 됐고, 장애인 가정의 컴퓨터를 수리·조립하는 AS 기사로도 활동하게 된 것이다. 배움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먼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죠. 다행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컴퓨터를 일찍 접했으니까 배움을 나눌 수 있었어요. 장애인의 눈높이에서 뭐가 불편한지 아는 사람들이 가르치니까 다들 좋아했어요.”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공부해야 했고, 실력은 더욱 늘어갔다. 그러던 중 생각하지도 못한 꿈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2월 25일 당시 참여정부 청와대 오찬에 딸과 함께 초청받아, 이동희 동문이 직접 ‘정보화 사례’ 발표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오찬 메뉴는 게살 샥스핀 수프에 딤섬, 해삼 관자 아스파라거스 등이었는데, 이해수 동문은 “전부 난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더 열심히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느꼈다”라고 회상했다.
 
공부가 탈출구이자 해방구

“코로나19로 기말시험이 컴퓨터 시험으로 바뀌면서 제가 답을 부르면 아내가 체크해 답안을 제출했어요. 교재는 발로 넘기면서 봤고, 중어중문학과 수업을 들을 때는 기초한자 등 손으로 쓰는 과목이 많아서 교수님께 말씀을 드리고 워드로 직접 작성해서 제출했죠.”
보통 30분이면 끝낼 수 있는 간단한 과제도 1시간을 꼬박 고생해야 했다. 컴퓨터 타자는 의수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했고, 책을 넘길 때는 발로 책장을 넘겨야 해서 책장이 찢어지기도 했지만, 공부에 대한 이동희 동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해수 동문에겐 책이 탈출구이자 해방구였다. 그는 “시골에서 살았기에 밖으로의 탈출은 공부가 유일했어요.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운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에 항상 책과 함께했어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50대까지는 하루에 4~5시간 자면서 책 읽기에 몰입했다. 그의 필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글솜씨로 상을 받은 것도 여러 번, ‘산새’라는 이해수 동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그가 직접 쓴 정보와 글들이 가득하다.


이동희 동문은 사고 이후에 방송대 법학과, 컴퓨터과학과,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고, 이해수 동문은 행정학과, 컴퓨터과학과, 농학과, 대학원 정보과학과를 졸업했다. 특히, 이동희 동문은 올해 2월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면서 ‘남다른 노력과 열정으로 학업에 전념해 좋은 결실을 맺고 여러 사람의 본보기가 됐다’는 공로로 평생학습상을 수상했다. 이해수 동문도 2023년 2월 성적우수상을 수상하며 농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배움에 목마르다. 그래서일까. 이동희 동문은 영어영문학과를 중도 포기했는데 마치고 싶다고 했고, 여행과 순례를 좋아하는 이해수 동문은 관광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이해수 동문의 작품. 이해수 동문은 손뜨개 마스터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사고로 치료 중에도 ‘감사’


“의사 선생님도 참 잘 만났어요. 어떤 의사가 24시간을 안 자고 옆에서 지켜요? 여선생님인데 그분에게 인사도 못 드렸어요. 우리는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아서 죽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고마웠을까. 원망 외에 담아둘 자리가 없어 보이는 데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환상통(절단된 사지에서 느끼는 통증성 감각 이상)이 없는 것도 행운이라고 했다. 부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그날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물이 나는 아픔이지만 동시에 감사한 기억이기도 하다.


남편을 간호하면서 이해수 동문이 쓴 ‘간병일기’에는 혈압이 270까지 오르고, 체온이 40도 넘게 올라갔던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이해수 동문은 24시간 간호해 준 의료진들에 대한 고마움을 일기에 남겨 둔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보낸 46일이 꿈만 같았답니다. 의자에서 쪼그리고 잤던 잠도, 환자에게 미안해서 굶기도 많이 했건만 날아갈 것만 같은 이 기분, 어려움이 컸기에 기쁨 또한 크더군요.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이 봤기에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느끼고,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많은 친지나 동료들, 주위를 둘러 보니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더군요. 84일 드디어 병실(788)로 돌아오니 모두들 축하해주면서 자기 일인 양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젠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답니다.

 
- 이해수 동문의 간병일기 중에서 -


부부가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도 받은 고마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서다. 이해수 동문은 “남편이 사고를 당하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죠. 남편의 병원 생활이 끝나니 저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봉사를 하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더군요. 욕심도 내려놓게 되고 무엇이든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게 되고요. 저분들보다 내가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낮아지게 됩니다.”

 인생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두 부부에게 구하자 “남편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이런 기쁨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오래도록 사경을 헤맸기에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무엇이든 즐겁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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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184***
    대단하십니다~ 지난해 11월에 중어중문학과에서 중국 시안에 함께 갔을 때 의 두분 모습이 생각납니다. 항상 서로 의지하고 챙겨주시던 모습과 늘 환하게 웃으시던 이해수님~두분 존경합니다~
    2024-10-04 22:44:36
  • ch36***
    대단하십니다. 존경드려요. 두 분의 모습에 저도 용기를 더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새요.
    2024-10-01 15:35:37
  • min3***
    감사했고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40대 후반에 사고를 크게 당해서 일 년 내 거의 고열과 통증으로 지내고 있으면서 비관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동희.이해수 부부님의 글을 접하고는 참으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고통중에 방송대 행정학과를 조기졸업하고 지금은 사회복지학과 4학년에 학생회장으로 열심히 삶을 끌어나가고 있습니다만, 좀 더 희망 속에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을 님들은 주셨습니다. 혹시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을. 고승민 : 010-7491-4789
    2024-09-17 17:30:44
  • min3***
    2024-09-16 22:12:41
  • jung***
    존경스러운 두 분께 감사합니다. 어려운 환경 극복하여 배움과 봉사를 실천하시는 모습에 고개숙여집니다.
    2024-09-12 10:30:33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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