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지난 220호(8월 12일자) ‘1918년 인플루엔자의 글로벌 히스토리’에서 살펴봤듯이, 1918년 인플루엔자는 전 지구를 휩쓸며 기간 대비 20세기 최악의 인구학적 재앙을 초래했다.
퀴퀴하고 먼지 날리는 옛날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1918년 인플루엔자는 유행 양상과 인류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아직껏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와 유사한 점이 많다. 바이러스의 부류는 다르지만, 둘 다 공기를 매개한 호흡기 감염병으로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졌고, 바이러스가 변이를 거듭하면서 몇 차례 큰 유행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근본적인 의학적 대응 수단이 부재했던 100여 년 전 인플루엔자 유행 당시뿐만 아니라, 코로나19가 창궐한 불과 몇 년 전에도 백신과 치료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비롯한 비약물적 개입(non-pharmaceutical intervention)을 통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신종 감염병이 유행할 때마다 반복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18년 인플루엔자의 경험은 현재를 진단하고 반드시 들이닥칠 미래의 감염병을 대비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H1N1)가 남긴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정확히는 자손)이라는 것이다.

2009년에 팬데믹을 일으킨 인플루엔자(H1N1)는

1918년 인플루엔자의 바이러스가 돼지 체내에

100년 넘게 남아 있다가 유전자 재편성을 통해 재등장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진짜 섬뜩한 것은 이런 강적을

망각하고 있던 우리 자신이 아닌가?

 

1918년 대유행, 일제 방역의 두 얼굴  
치명적인 1918년 인플루엔자 제2차 대유행의 물결이 식민지 조선을 휩쓸기 시작한 것은 1918년 9월로 추정되며, 유럽과 러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 경유로 침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1차 대유행을 일으킨 인플루엔자바이러스도 조선에 유입됐겠지만, 독성이 강하지 않아서인지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다.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던 영국 태생 캐나다 선교사 겸 수의사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석호필, 1889∼1970)는 1918년 9월 말에 경성에서 첫 증례를 목격하고 10월 중순 이전에 유행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그는 감염자가 조선 인구의 4분의 1에서 절반에 이를 것이며,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았다고 기록했다. 결근자가 속출해 공공기관의 사무가 마비되고 공장도 돌아가지 못했다. 농촌에서는 수확과 파종을 못해 타격을 입었다. 일가족이 모두 사망하는 사례도 빈번했다.
이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식민지 방역 당국은 환자와 사망자의 수를 집계하고 예방법을 공표하기만 할 뿐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예방법에는 밀집 회피와 휴교 등이 권고됐지만, 인플루엔자는 강제적인 조사와 예방 조치가 가능한 ‘법정전염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일본 본토와 대만에서는 마스크 보급과 (그 효과는 차치하고) 백신 접종 등의 대책이 마련됐지만, 조선에서는 이 같은 조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식민 당국은 조선의 비참한 상황을 조선인의 위생 관념 결여와 미신 의존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평소 일제는 감염병 예방을 구실로 헌병경찰을 앞세워 폭력적인 검병적(檢病的) 호구조사와 강제 격리를 일삼아 조선인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과 이웃이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20세기 최악의 감염병 앞에서는 오히려 무대책이었다. 조선인의 울분과 저항 의식은 1919년 3·1운동으로 표출됐고, 인플루엔자에 콜레라까지 대유행하며 큰 사회적 혼란을 빚었다. 조선인 인구 대비 1918년 인플루엔자 사망자 수는 약 1.4%로 추정되는데, 이는 일본 본토의 추계치 0.8%를 크게 상회한다.
식민 본국 일본의 상황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의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 1918년 5월부터 7월에 걸친 ‘제1파’는 고열로 앓아누운 자는 있어도 사망자가 속출할 정도는 아니었다. 1918년 10월부터 1919년 5월 정도까지 이어진 ‘제2파’는 약 26만6천 명의 사망자를 낼 만큼 맹위를 떨쳤고, 1918년 11월에 유행이 가장 극심했다. 치명률은 비교적 낮았지만, 환자가 많아 사망자 수도 많은 형국이었다. 1919년 12월부터 1920년 5월경까지 출현한 ‘제3파’ 때는 환자 수는 적었지만, 치명률이 높아(약 5%) 약 18만7천 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몇 개월 단위의 대유행이 몇 차례에 걸쳐 도래했고, 그때마다 우세종 바이러스는 서로 다른 독성과 전파력을 보였다. 유행이 한번 잦아들었다고 방심하면 안 되는 이유다.

일본 사회의 경직성, 유행 확산에 한몫
인플루엔자가 처음 유입된 1918년 5월, 스모 선수 사이에 유행해 휴장하는 선수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보다 앞서 4월에는 대만에 순회 경기를 갔다가 인플루엔자로 선수 3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입원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인플루엔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제2파’가 닥쳤을 때도 스포츠 경기나 집회의 제한 조치가 거의 없었다.
1918년 11월, 11명의 아이를 양육하던 작가 요사노 아키코(謝野晶子, 1878∼1942)는 아이 한 명이 학교에서 인플루엔자에 걸려 와 온 가족이 드러눕자 당국의 무대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본인의 편의주의가 이런 경우에도 눈에 띕니다 (……) 학생 7, 8할이 감기[인플루엔자]에 걸린 후에야 겨우 상담회를 열어 며칠간의 휴교를 결정했습니다 (……) 왜 정부는 이 위험을 신속하게 방지하기 위해 (……) 많은 인간이 밀집하는 장소의 일시적 휴업을 명령하지 않았을까요.”
화장장에는 관이 계속 쌓였고, 후쿠시마현(福島縣)의 아즈마무라(吾妻村)에서는 마을 인구 276명 중 27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의료진이 쓰러져 환자를 받지 못하는 의료 붕괴의 상황도 벌어졌다. 해군 경순양함 야하기(矢)는 1918년 11월 일본에 돌아오기 전에 인플루엔자 유행지인 싱가포르에 기항했는데, 조건부로 상륙을 허가하는 실책을 범해 승조원 469명 중 48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정해진 것을 바꾸지 않으려 하는 일본 사회의 경직성도 유행 확산에 한몫했다. 당시 교토부(京都府)의 어느 소학교에서는 유행이 극심한 오사카(大阪)·고베(神戶) 방면으로 수학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학교 측은 학부모의 연기 요청에도 변경 불가를 통보했다. 반대로 교토는 각지의 수학여행객으로 붐볐다. 결국 교토시는 일본 11개 도시 가운데 수도 도쿄시(東京市)를 제치고 ‘제2파’ 인플루엔자 사망률 1위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 정부가 기댄 것은 국민의 ‘자숙’이었다. 1919년부터 백신 접종이 시행됐지만, 당대 의학이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탓에 병원체 바이러스가 아닌 다른 박테리아(세균)에 대한 백신이었고, 당연히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설령 당시 효과를 확신했다고 할지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비롯한 역학적 수단이 동반되지 않으면 유행 확산을 막기 힘들었을 테지만, 일본 본토에서도 인플루엔자는 ‘법정전염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 조치는 없었다. 내무성 위생국은 계몽 포스터를 제작·배포해 기침 주의, 마스크 착용, 입안 헹구기, 집안의 환자 격리를 비롯한 개인위생 준수를 요청하는 데 그쳤다.
‘제3파’의 위협이 거세진 1920년 1월에 들어서야 언론도 국민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기침 하나 나와도 외출하지 말라.” “생명이 소중하지 않은가. 마스크는 어디에 버렸나.” 1918년 인플루엔자가 가져온 일본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일반인의 마스크 착용이었다. 이후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일본인의 마스크 착용은 점차 익숙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선택한 자유의 나라 미국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규제는 오히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두드려졌다. 중부 미주리(Missouri)주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서는 사람이 밀집하는 학교, 교회, 상업시설 등을 폐쇄하고 결혼식과 장례식까지 금지하는 고강도 조치를 단행해 사망자 수를 크게 억제할 수 있었고, 뉴욕에서도 일찍부터 방역 규제가 발동돼 동해안 연안 도시 가운데 가장 낮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반면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는 1918년 9월 28일에 군중이 운집한 자유차관 행진(Liberty Loan Parade)을 허용하는 등 사회적 거리두기에 소극적이다가 뒤늦게 방역 조치에 돌입한 탓에 인명 피해가 컸다. 이처럼 도시마다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마스크 미착용자에 대해 전차 승차를 거부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처럼 1918년 인플루엔자는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본의 경제사가 하야미 아키라(速水融, 1929∼2019)는 일본의 1918년 인플루엔자 상황과 대응을 분석하며 당시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 자체를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의료사』등을 쓰고,『정의의 아이디어』『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을 옮겼다.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교롭게도 2019년 그의 사후 한 달도 채 안 돼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이에 대한 일본의 초기 대응은 100여 년 전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는가? 더욱 우려할 만한 사실은, 1918년 인플루엔자(H1N1)가 남긴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정확히는 자손)이라는 것이다. 2009년에 팬데믹을 일으킨 인플루엔자(H1N1)는 1918년 인플루엔자의 바이러스가 돼지 체내에 100년 넘게 남아 있다가 유전자 재편성(reassortment)을 통해 재등장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진짜 섬뜩한 것은 이런 강적을 망각하고 있던 우리 자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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