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울을 걷다, 모던 서울

평화문화진지 앞에는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 일부가 놓여 있다.

여기엔 이런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부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수많은 장벽들이

낮고 낮아져서, 갈라진 이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손잡을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경로: 서울생활사박물관 → 연촌초등학교 → 서울과학기술대학교(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 → 육군사관학교 → 김수영문학관 → 평화문화진지

서울생활사박물관과 연촌초등학교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한 서울생활사박물관은 해방 후 도시가 어떻게 형성·확장됐는지를 잘 보여 준다. 책과 사진, 일상 소품에서 전쟁 중 삶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분단 현실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전시된 어린이 교재에는「어느 자수 간첩의 이야기」, 「남북 이산가족 교환 방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적대국으로 북을 의식하는 내용이다. 표지 그림, 글자체는 언뜻 보아 북한 자료와 닮아 새삼 신기했다. 과거의 기록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박물관의 시선은 현재 우리가 머무는 공간, 사용하는 사물, 언어가 가진 배경을 숙고하게 했다.
연촌초등학교는 1945년 11월 지역민의 기금으로 개교한 학교다. 해방 후 3개월 만이니 당시 주민들의 초등교육에 대한 열망이 느껴졌다. 다급히 학교를 세운 데는 엄청난 인구 유입도 한몫한다. 해방 후 징용에서 벗어났거나 탄압을 피해 떠났던 이들이 속속 돌아왔기 때문이다.
노원문화원 아카이브 사진에선 다른 마음이 엿보인다. 시민들이 운동장 가득 현수막을 들고 모여 찍은 사진이다. 함께 실린 사진 설명글에는 “휴전 협상이 이루어지자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노해면 주민들이 연촌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휴전협정 반대 데모를 벌이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한국전쟁 후반에는 교착 상태의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서 휴전협정도 함께 진행됐다. 당시 집권층의 입장은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통일을 이뤄야 하며, 다시 전쟁이 일어날 때 미국의 안전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에 따라 휴전 반대 시위가 광범하게 전개됐다. 전재민을 따뜻하게 맞이했던 마음이 새로운 전재민을 만들어 낼 일에 열광한 것이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의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정문 앞 가로수길 끝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건물이던 다산관, 창학관이 보인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초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무마할 목적으로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초반에는 식민지 체제 유지에 필요한 관료와 의사를 양성하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뒀다. 자립에 필요한 과학, 기술을 배울 농학부, 이학부, 공학부도 설치하겠다고 했지만, 오랫동안 미루다가 1937년부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부지에 이공학부 교사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예산 배정과 자재 보급에 우선순위가 밀려 1942년에야 건물이 들어서게 됐다. 그마저도 경성제국대학 학생은 해당 건물을 얼마 사용하지 못했다. 1945년 9월부터는 미군 병원으로 사용됐고 한국전쟁기에는 유엔군 사령부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내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경성광산전문학교의 본관이던 대륙관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급증하는 광산 개발 수요에 대처해 인력을 공급하고 기술을 개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이공학부나 경성광전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들어선 것은 인근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와 관련이 있다. 고등공업교육보다는 군수공업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위치 선정이다. 이공학부의 초대 부장을 지내고 후에 총장이 되는 야마가 신지(山家信次)는 이공학부 개부식 연설에서 “대륙병참 기지로서 필요한 공업적 능력을 확립하고 충실히 하는 것은 실로 반도에 부하된 중대한 책무”라고 밝혔다.

일본군 훈련소 자리에 세워진 육군사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정문에서 산책로로 바뀐 (구)경춘선로를 따라가면 (구)화랑대역과 만난다. 그 옆이 육군사관학교다. 미군정기인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와 함께 제1연대가 창설됐다. 이어 5월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 자리에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개교하는데, 이후 조선경비대사관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됐다. 일본군을 양성하던 자리가 대한민국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는 사전 신청을 해야 방문이 가능하며, 인솔자를 따라서 탐방할 수 있다. 육사기념관 1층의 입구 벽에는 모든 졸업생의 명단이 현판에 적혀 있다. 생도 1, 2기는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포천 지구 전투에 투입됐고, 그중 151명이 전사했다. 기념관 한쪽에는 추모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었지만, 군인을 양성하는 기관인 만큼 전쟁의 참상이나 그로 인한 고통보다는 용맹에 대한 예찬, 활약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군의 존재는 전쟁을 전제한다. 늘 있었고, 있을 수 있으며, 어쩌면 있어야 할 대상으로 전쟁을 바라보기에 꾸준히 대비한다. 그런 시각으로는 참상과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무찌르고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에, 용맹해지고자 하는 기세에 방해가 된다. 군인에게는 필수적인 자세겠지만 그것을 어디까지 확장할지는 고민할 부분이다.
육군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의 무기와 군사 장비, 문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 ‘독립의 길, 창군의 길’에선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 항일운동 태극기 제작에 사용된 목판, 소련과 일본의 기관총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전시품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방문 시기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있기 전이었다. 탐방 중 그의 흉상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흉상 이전이 발표되고 의아했다. 개방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옮기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을 양성하던 자리였던 만큼 오히려 상징적으로 독립운동가의 흉상이 더 주목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근현대사와 시인의 자유, 김수영문학관
시인 김수영(1921~1968)은 전쟁이 준 부자유와 고난을 온몸으로 겪었다. 노원의 이웃 구인 도봉에는 그를 기린 김수영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김수영의 본가와 묘, 시비(詩碑)가 도봉구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곳에 건립한 것이다.
문학관 입구에는 대표작 「풀」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과거 학창 시절 그의 시를 공부할 때는 그의 시적 저항을 군부독재와 관련해서 이해했는데, 전시된 연보를 보니 그가 저항하는 세계, 그가 추구하는 자유는 더욱 광범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경험하면서 ‘온몸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대다수 문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피란길에 오를 때, 김수영은 임신한 아내와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 의용군에 강제 징집됐다. 1950년 10월 28일 의용군을 탈출해 서울에 왔다가 검문에 걸려 ‘강제 징집과 탈출’을 증명할 수 없어 체포돼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52년 11월 28일이었다.
김수영이 석방될 때는 민간 억류인 신분이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남북 대치 상황에 수용소 수감 이력으로 오랫동안 사상적 의심을 받았다. 시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서는 그의 친구마저도 포로수용소에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는지 묻는 대목이 등장한다. 화자는 포로가 아닌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나왔노라 답한다. 하지만 친구는 38선으로 나아가 (너와 같은 처지였던) 포로를 구하기 위해 싸우라고 독려한다. 그에게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장은 구속의 상태에 남아 있으라는 말과 같았을 것이다.

평화문화진지: 통일과 평화의 공존
도봉구 북쪽엔 북한 재침입에 대비해 1969년 설치한 아파트 형태의 대전차방호시설이 있었다. 1층은 공격과 방어, 대피소나 참호 역할이 가능한 군사 시설, 2층부터는 주거공간이었다. 유사시에 북한군이 들어오면 건물을 폭파해 길목을 막기 위한 용도였다. 아파트는 2004년 위험 건축물 판정을 받고 철거됐지만, 방호 시설은 유사시를 위해 남아 있었다. ‘유사시’란 여전한 전쟁 가능성, 위기감을 드러낸다. 그런 마음은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숨어 있다가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는 언제든 다시 튀어나올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흉물스럽던 공간은 평화문화진지로 변모했어도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사무실, 공방, 연습실이 앞쪽에 나와 있지만, 자그마한 책방으로 들어가면 뒤쪽으로 좁은 통로가 비밀처럼 연결돼 있다. 소총 저격 공간을 포함한 방호 공간도 남아 있다. 창동 전투 과정을 담은 지도와 당시 기사도 전시돼 있어 급박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평화문화진지는 서울창포원, 다락원체육공원과 경계 없이 이어져 있다. 또한 오른쪽에는 중랑천이 흐르고, 왼쪽은 도봉산 입구와 잇닿아 오가는 사람이 가득하다. 적대 공간이 하나둘 시민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남북간에도 소통의 길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평화문화진지 앞에는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 일부가 놓여 있다. 여기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부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수많은 장벽들이 낮고 낮아져서, 갈라진 이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손잡을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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