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Weekly 시네마

민족 대명절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팬데믹을 거치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덕담은 어느덧 옛말이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렵게 모인 자리에서 혹시 “취직은 했니?” “시집은 언제 갈 거니”, “아이는 언제 나을 거니?” “아이 공부는 잘하니?” 같은 질문은 아마 안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추석 연휴를 돌아볼 만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제목부터 「장손」(감독 오정민)입니다! 집안 3대가 제삿날 모두 모입니다. 임신한 손녀딸이 “전 부치느라 너무 더우니 에어컨 좀 켜자”고 했다가 한 소리를 듣습니다. 배우를 꿈꾸는 손주이자 3대 장손이 서울에서 내려오자 할머니는 버선발로 맞이하며 “퍼뜩 에어컨 켜라~”고 말씀하죠. 2대 장손 아버지는 오랜 만에 집에 온 아들에게 “언제 연기 그만두고 두부 공장을 물려받을 거냐”고 성화입니다. 구미 김씨 대가족의 70년 세월을 유지하게 해준 ‘은혜로운 밥줄’이죠. 아픈 남편은 병원에 두고 아버지를 도와 두부 공장에서 일하는 첫째 고모는 여전히 얼굴이 어둡습니다. 뜨거운 여름날, 그래도 북적북적 가족이 모이니 좋습니다! 그런데 이별은 뜻하지 않게 오죠. 선선한 가을,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장례를 치르러 모인 자리에서 두부 공장 운영권을 두고 숨겨둔 비밀이 드러나며 가족 간 갈등은 극으로 치닫습니다. 김씨 가족은 어떻게 될까요?

 

「장손」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수상하며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았습니다. 이 영화로 데뷔한 오정민 감독은 5년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고 해요. 한 가족의 미시사를 한국 근현대사의 거시사까지 확장해가는데, 섬세하게 구성된 미장센부터 유려하게 넘어가는 컷 전환까지 도무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곤 믿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대가의 탄생을 목도하게 할지도 모를 영화 「장손」의 오정민 감독을 서대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신인 감독 맞으신 거죠?(웃음)
감사합니다.(웃음) 신인 감독의 기준을 저는 잘 몰라서요. 예전에도 단편은 많이 찍었습니다. 가족이나 연인 등 관계에 대한 영화들이었죠. 물론 톤앤매너는 다르지만요.

 

장편 데뷔작인데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수상했어요. 솔직한 소감은 어땠나요?
자존심은 지켰다, 정도요?(웃음) 사실 좀 더 받고 싶었어요. 상에 대한 욕심보다 제작비 회수에 대한 부담이 있었거든요.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길래요?
순제작비가 6억 원 정도 들었습니다.

 

영화제 관객과 일반 관객이 다르잖아요. 개봉하고 나니 기분은 어때요?
아직 반응들을 많이 체감은 못한 상황입니다. 사실 영화제는 축제라는 그 분위기에 취해서 다들 좀 들떠 있는 측면도 있잖아요? 개봉 후 뭔가 축하해주시는 느낌이 다르긴 한데, 긍정적으로 표현해주시면 창작자로서는 큰 힘이 되긴 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 버전과 개봉 버전에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편집은 달라진 게 없어요. 극장 상태에 따라 화면이 좀 어두워 보이는 곳이 있어서 밝기만 살짝 더 올린 정도입니다.

 

너무 완성도가 높아서 더 손댈 데가 없었다는 이야기죠?(웃음)
과찬이시고요.(웃음) 후회 없이 편집했습니다.

 

장편 데뷔작 「장손」을 쓰고 연출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스무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다투는 집안 어른들을 보면서 부끄러운 일이고, 숨기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집마다 있는 일이라더라고요. 그러면 왜 우리 가족은 멀어지게 됐는지를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저로서는 미워했던 저의 윗세대 삶을 되돌아보고,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들 또한 급격한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 휩쓸려온 인물들은 아닌가 하는 연민의 마음도 들었고요. 그러면 한 가족의 이야기를 대한민국 근현대사로까지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영화가, 세대와 젠더 갈등이 극에 달한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 갈등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목은 처음부터 ‘장손’이었나요?
네. 무의식적으로 초고 때부터 ‘장손’이 가제였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고민이 많아서 특정한 제목을 정하기 어렵더라고요. 장손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논쟁적인 단어잖아요? 게다가 영화가 바로 그 장손의 시점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처음으로 돌아온 거죠.

그래서 1대, 2대, 3대 장손 캐릭터를 다르게 구성한 거군요.
세대별, 젠더별, 계급별로 다양한 인물상을 그리고 싶었어요. 선악이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캐릭터가 아니라 명암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요. 1세대 장손인 할아버지 승필과 할머니 말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에요. ‘생존’이 가장 큰 가치죠.

 

그 아래인 2세대 장손 태건(오만석)은 베이비붐 세대 혹은 586 세대에요. 민주화를 이룩한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고 주장했지만, 지금은 기득권이 되면서 보수적으로 변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어요. 한 캐릭터를 강화하는 방식보다는 어떡하면 확장성 있게 보여줄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 누구에게든 자신을 대입할 수 있도록요.

 

그러면 3대 장손은요?
초고에서는 특정 시대의 태도를 가진 캐릭터를 설정했어요. 밀레니엄 세대가 ‘자아실현’으로 가치가 이동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쓰고 보니 얄팍해 보이더라고요. 아직 우리 세대는 역사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동시대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100년 후 세대가 이 영화를 보더라도 이입할 수 있게끔 3세대 장손 캐릭터는 조금 비워두고 싶었습니다.

 

구미 김씨의 70년 생계를 지탱하는 ‘은혜로운 밥줄’이 두부 공장이더군요. 하고 많은 소재 중에 두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집안의 생계를 유지하는 생산수단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죠. 우선 두부가 가장 아시아적인 음식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두부는 콩을 불리고, 갈고, 끓이는 과정을 거쳐 간수를 친 다음 틀에 부어 순물을 짜낸 다음에야 아주 소량만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두부는 너무나도 쉽게 부서지고 상해버리죠. 두부의 그런 점이 가족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오프닝 시퀀스가 바로 그 두부 공장씬입니다. 첫 화면은 그냥 하얘요. 그러다 사운드가 조금씩 들어오고 김이 빠지면서 두부 공장인 것이 드러납니다. 아주 인상적인 오프닝이에요.
오프닝 시퀀스를 그렇게 설정한 여러 이유가 있었어요. 미학적으로 보면, 영화라는 매체가 표현할 수 있는 상하운동, 깊이 있는 3차원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두부 공장에서 시작해서 두부 공장으로 끝나요. 구미 김씨 집안을 영속하게 만드는, 돈을 벌어 주는 생산수단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죠.

 

또 하나 정말 유치한 거 말씀드리면, 저는 영화가 시작했는데 관객들이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웃음) 극장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한다는 건, 마치 우주선을 탑승해서 출발하는 것처럼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아무 편견 없이 스크린에 집중해주길 바란다는 이유에서 오프닝 시퀀스를 하얗게 만들었습니다.

 

사진도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재죠.
영화 속에 반복해 등장하는 사진은 ‘기록으로 남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기능의 연장선에서 잊힌 역사를 다시 복원해내고 사라질 것들은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영화 자체가 사라져 가는 윗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봤는데,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가치를 아카이빙하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소재죠.

영화는 여름, 가을, 겨울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분열하고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을 이라는 생생한 계절감에 덧칠했죠. 그렇게 구성한 이유와 함께 각 계절 씬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도 설명해주세요.
가족의 긴 세월을 담고 싶었습니다. 가족의 가장 화려하고 따뜻했던 기억에서, 가족 구성원의 죽음 이후 가장 차갑게 스러져가는 이야기를 생각했더니, 계절을 가져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는 시간을 담는 매체니까요.

 

봄을 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산 문제는 절대 아니에요. 제게는 이미 가장 뜨거운 여름에서 가장 차가운 겨울까지, 세 파트가 결정돼 있었어요. 하지만 가족이 아무리 무너지고 붕괴해도 새로운 가정은 또 탄생하기 마련이죠. 영화에서 늘봄이가 태어나듯이요. 저는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각자 상상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봄은 비워뒀습니다.

손숙 같은 톱배우부터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배우들을 모두 모으셨어요. 캐스팅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캐스팅할 때 두 가지 원칙이 있었어요. 경상도 사투리가 가능한 지역 출신 배우여야 할 것, 긴 프로덕션 기간을 소화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맞춰줄 수 있을 것입니다. 손숙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보낸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출연을 약속해주셨어요. 차미경 배우는 전작 「성인식」을 할 때부터 출연을 약속해줬고요. 이후 김시은, 강태우, 안민영 배우가 합류했고, 정재은, 서현철, 오만석, 강승호 배우 순으로 결정됐습니다.

 

실제 부부인 정재은, 서현철 배우를 막내딸 옥자 부부로 캐스팅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장손」은 TK 지역 중에도 아주 보수적인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집안이 배경입니다. 그런데 막내딸은 집안과 다르게 서울깍쟁이 같은, 굉장히 부르주아지 집으로 시집간 사람으로 설정했어요. 가장 서울 사람 같은 도시적 이미지가 있으면서도 지방 사람과 닮아야 했죠. 정재은 배우가 그랬어요. 전형적인 서울 사투리를 쓰기도 했고요.

 

남편인 서현철 배우 역시 공교롭게도 사위 역할에 어울렸어요. 제가 정재은 배우의 연극 공연을 찾아가서 시나리오를 드렸는데요, 제 열정에 감탄했는지 남편을 설득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좀 조심스럽기도 했어요. 부부긴 한데 대화 장면 하나 없고, 둘의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서현철 배우가 “풍경으로 존재해도 괜찮을 거 같다”면서 출연을 결심해주셨죠. 아, 그리고 서현철 배우가 다른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두부는 좋아한데요.(웃음)

 

말은 그렇게 하셔도 신인 감독이 10명 넘는 쟁쟁한 배우들을 현장에서 컨트롤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걱정을 정말 많이 했죠. 신인 감독인데 10분이 넘는 선생님, 선배 배우님들의 연기 앙상블을 어떻게 컨트롤할지가요. 그런데 정말, 제가 원하는 동선과 대사만 말씀드리면, 그 누구라도 굉장히 훌륭하게 수행해주셔서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뒤에서 질문 드리겠지만, 프로덕션만 5년 한 걸 보면 보통 꼼꼼한 성격은 아닌 거 같아요. 2대 장손 태근 역할을 한 오만석 배우가 장례식장 씬을 찍을 때 리허설까지 40테이크를 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실제로는 23 테이크고요. 제가 스크립북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웃음) 사실 리허설까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제 기억에는 서른 번 정도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오만석 배우는 쉬게 하고, 카메라를 세팅했어도 됐는데, 제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배우를 뺑뺑이 돌렸다’는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결국 리허설부터 쭉 카메라 앞에 섰던 거죠. 그래도 오만석 배우가 현장에서는 절대 불편한 내색을 안 비쳤어요. 오히려 엑스트라들이 화장실 가고 싶어 안달났던 기억이 납니다.

 

23 테이크 중에 OK컷은 몇 번째 테이크였나요?
23번째 테이크요.(웃음) 끝나니 모든 분이 손뼉 치더라고요. ‘와, 드디어 자유다!’하는 느낌으로 박수를 친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게 OK가 안 났으면 큰일 났을 겁니다.(웃음)

 

2대 장손 태근의 부인이자 1대 장손의 며느리 수희(안민영)가 달밤에 아무도 없는 마당에 나와 몰래 방귀를 뀌는 장면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새벽부터 종일 쫓기듯 바쁘다가 달구경 같은 사치는 엄두도 못 내고 방귀 한 번 뀌는 한국 며느리의 삶에 대한 애환이 표현된 장면이랄까요?
저는 유머는 불편한 진실을 동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는 방귀쟁이’라는 캐릭터라 유머가 있는 게 아니죠. 2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집안 며느리로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치렀는데, 방귀 하나 마음대로 못 뀌는 게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게 유머와 함께 담겨 있다고 봐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지점들을 공유하는 게 가족인 아닌가 싶습니다.

마을 어귀의 큰 나무 아래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장면에 참 많은 이야기,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자, 영화를 다시 봤을 때는 가장 슬픈 장면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사진을 찍기로 계획했지만, 찍고 나서 느닷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족에게 있어서는 다시 찾아오지 못할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순간인 거죠.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디렉션은 어떻게 주셨어요?
배우들에게도 방금 말씀드린 것과 똑같이 설명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에 후회하는 장면이 없는데, 안타까운 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촬영감독과 빛 하나하나를 시간대를 지켜가면서 찍자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여름에 태풍이 올라오니까, 마냥 해를 기다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배우 한 명 나오는 장면이면 기다릴 수 있는데, 그 바쁜 열 명의 배우들을 모아놓고 해를 기다린다는 건 정말…. 기다린다 해도 다음날 해가 뜬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유일하게 아쉬운 장면입니다. 영화가 이렇게 불편한 매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입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아직도 미스테리한 존재입니다. 가족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사실 정치인들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인 거 같아요. 일개 영화감독인 저로서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 가깝죠. 저 역시 가족이란 어떤 존재인가 알고 싶어서 여전히 가족에 관련된 영화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궁금증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아마 계속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싶어요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하면서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가 있다면요?
가족영화로 한정한다면, 제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꽁치의 맛」(1962)입니다. 한 가족의 미시사를 다루면서 전혀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는 항상 정치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큰 거 같아요. 또 참고하 작품 중에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동년왕사」(1985)도 있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정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데요. 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걸 담고 있는 영화 같아요.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고요. 만약 외계인이 영화가 어떤 매체인가 궁금해한다면, 그 영화를 추천하고 싶을 정도죠.(웃음)

 

한 가족의 미시사로 사회의 거시사까지 조명하는, 레이어가 많은 작품을 좋아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에드워드 감독도 좋아하고요. 이미지와 사운드 측면에선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좋아해서 이번 영화 군데군데에 녹였습니다. 한 분만 더 말하면 임권택, 박철수 감독님 같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처럼 우아하게 영화를 찍고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영화에서 쇼트 선택부터 컷 전환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카메라가 픽스된 상황에서 조명은 중앙에만 있고, 술 취한 아버지를 방으로 데려가는 성진의 좌우 움직임, 기차 밖 풍경에서 줌아웃해서 인물이 들어오게 만드는 컷, 성진이 집에서 나와 트럭 타기까지 상경 장면을 원 테이크로 찍은 것들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죠.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영화를 배운 것인가도 궁금하고요,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지도 궁금해요.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웃음) 사실 어릴 때 꿈은 소설가였어요. 고등학생 때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어떻게 하면 이런 웅숭한 작품을 쓸 수 있을지를 고민했죠. 그러다가 양조위 배우의 눈빛 하나가, 제가 쓸 수 있는 어떤 글보다도 더 깊을 수 있다는 걸, 배우의 살갗이 드러나는 영화라는 매체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대학을 다니면서는 연극동아리 활동도 했고요. 영화적으로 제게 스승이라고 할만한 분은 「불후의 명작」(2000)의 심광진 감독님이십니다. 맨날 매달려서 술 사달라고 조르고 그랬죠.

방금 질문드린 건 상업영화로서의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미덕도 잃지 않죠. 이를 테면 마지막 장면에서 성진의 얼굴을 길게 찍는 컷들도 그렇고요. 밸런스를 잡기가 쉽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기준은 사실 시장이 결정해주는 거죠. 저는 늘 상업영화 만들기를 지향합니다. 어찌됐든 영화는 대규모 자본 투입되는 매체에요.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도 그래요. 작가영화감독보다는 대중영화감독이 되고 싶고요. 이 영화 역시 제도권 안에서 상업영화로 만들고 싶었는데, 가족영화는 장르영화가 아닌 이상 톱스타가 붙어도 안 된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할 수 없이 제가 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영화의 본질에 맞추려면, 제가 찍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물론 주변에서는 다 말렸지만요.(웃음)

 

감독님의 연출 방식은, 영화에서 각 인물이 처한 상황, 그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저 보여주죠. 관객이 자신을 어떤 캐릭터에 대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감독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이 움직이길 바라기도 하거든요.
그건 감독으로서 영화를 대하는 태도나 믿음의 차이 같아요. 저는 영화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바꾸고 싶어서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하고 싶다면, 저는 방송 다큐멘터리를 만들거나 대자보를 쓸 것 같아요. 왜 굳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매체로 선전효과가 떨어지는 일을 하는지 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해요. 물론 영화가 사람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행위는 다르다고 봐요. 다르덴 형제 감독은 바꿨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성숙’이라는 가치를 보여줬기에 존중하죠. 반면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정치적 구호를 앞세운 휴먼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봐요. 아까 잠깐 언급하신 엔딩씬 이야기를 해보죠. 한 세대의 퇴장 그리고 한 가정의 붕괴를 한마디 대사 없이 영화적 이미지로 풀어낸 인상적인 엔딩시퀀스입니다. 시네필이라면 당연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7)가 떠오를 테고요. 처음부터 엔딩씬은 그렇게 구상했나요?
마지막에 성진의 얼굴에 해가 비칠 때, 성진이 집안의 진실을 맞닥뜨리면서도 모르겠다는 그 반응에서 끝났죠. 그리고 이제 제가 원한 건,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윗세대의 퇴장을 어떻게 보여줄까를 계속 고민했어요. 처음 제 선택은 카메라가 픽스된 상태에서 할아버지가 눈길을 계속 올라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삼거리 한쪽에는 두부 공장이 있고, 원경에 산이 있는 배경이죠. 그런 곳을 찾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촬영한 현장이 가장 적합했으니, 수정해야 했습니다.

 

엔딩은 카메라가 고정돼 있다가 마치 녹아내리듯 서서히 움직여도 좋을 거 같았어요. 다만, 카메라가 먼저 움직여서 할아버지를 산으로 인도한다면, 역겨울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가 화면 밖으로 프레임아웃될 때까지 카메라가 참는 거죠. 그때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밀어내듯 끝까지 화면 밖으로 나가려 하고, 카메라는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산이 아니라 화면 안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느낌이 담겼으면 해서 촬영감독에게 움직이지 말고 버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카메라와 할아버지가 부딪히는 느낌이 살면 좋겠어서요. 그런데 엔딩 장면을 두고 관객들 반응이 여러 개로 나뉘는데요. 공장에 들어가지 말라는 아들 말 때문에 산에 간다는 말도 있었고, 할머니 산소에 간다는 해석도 있더라고요. 모든 해석이 재밌었습니다.(웃음)

알겠습니다. 막내 사위 역을 맡은 강태우 배우는 이 영화를 두고 “오랫동안 공들여서 지은 튼튼한 집”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5년의 준비기간, 6개월의 프로덕션 기간 등 영화를 준비하면서 에피소드가 참 많았을 거 같습니다. 
2016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입시를 준비하면서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어요. 2018년부터 영진위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 제작지원을 신청했죠. 계속 떨어졌어요. 2021년 초에 5전 6기만에 제작지원에 선정됐습니다. 추가 펀딩부터 로케이션 헌팅과 캐스팅까지 해야할 일들이 많아서, 2022년 여름부터 촬영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프리 프로덕션 작업을 시작했죠.

 

촬영 회차가 총 27회차에요. 디테일하게 말하면, 2022년 9월에 여름 실내, 가을 실내 장면을 묶어서 16회차 촬영을 했어요. 단풍이 물들 때까지 한 달 기다렸다가 10월 말에 여름 야외 장면 그러니까 장례장면 등을 찍었죠. 그리고 두 달 쉬었다가 2023년 1월에 총 9회로 겨울 장면들을 촬영했습니다. 편집은 2월부터 5월까지 직접 했고요. 6월부터 두 달간 색보정, 믹싱을 해서 8월 말에 모든 후반작업을 마쳤습니다.

 

프로덕션 기간 중 제일 힘들었던 게 있다면요?
프로덕션 기간이 긴 관계로 연결을 해야 하는 집, 공장, 산소 등 로케이션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점이 힘들었어요. 봉분을 만드는 것도 저희에겐 토목공사 수준이었어요. 제작팀, 미술팀의 노고가 컸죠. 더불어 야외 장면이 많아서요. 날씨에 예민한 영화인데 출연진도 많고 롱테이크도 많은 영화여서 난도가 높았죠. 그리고 영화가 세 계절을 지나잖아요. 배우와 스태프들도 세 번 모였다 헤어져야 하니, 그 일정 관리도 힘들었습니다.

차기작은 뭐로 준비 중이세요?
사실 「장손」이 중간에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른 것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장손」과는 완전히 다른 판타지 장르입니다. OTT에서 할 예정이에요.

 

영화만 하실 거 같았는데 OTT로 바로 가시는군요.
저는 똑같이 임할 거 같아요. 다만 포맷 특성상 좀 더 시퀀스에 대해 서스펜스를 강화하고, 시퀀스별로 오프닝과 앤딩을 명확하게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창작자로서 영화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시리즈도 재미있을 거 같고, 연극 연출도 해보고 싶어요. 직업연출자로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 즈음 개봉해 더 뜻깊은 거 같아요. 관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장손」이라는 영화는 다양한 세대, 성별, 그리고 계급에 따라 각자 이입해볼 수 있는 대상이무궁무진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2차원 회화가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조각을 만드는 느낌으로 찍었어요. 영화를 여러번 볼수록 새로운 지점들을 발견하실 거라고 자신합니다. 애인과, 가족과 함께 보고 서로의 해석과 감상을 공유하면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시간을 보내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극장을 나서며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에 자신의 가족을 되돌아본다면 제게는 큰 기쁨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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