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2007년 1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1년을 머물렀다. 첫날 학장에게 신고하러 갔는데, 학장실이 너무나 좁은 것에 놀랐다. 손님 접대용 나무 의자 딱 하나가 자리할 공간 말고는 여유 공간이 없었다. 우리나라 대학의 학장실과 다른 겉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학에서는 연구비 조달 능력이 교수 및 실험 연구자의 명예와 지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mRNA로 세상을 바꾼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2023)을 수상한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o)의 자전적 에세이,『돌파의 시간』(2024, 까치)에는 연구비로 인한 차별적 대우와 함께 연구자로서 돌파해야 했던 장애물이 고스란히 소개된다.


커리코는 헝가리 태생으로 키슈이살라시에서 성장했다. 이곳은 깡촌이다. 집 밖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고, 흙집 방 하나에 네 식구가 기거했다. 전기와 상수도조차 없고 텃밭에서 채소와 가축사육으로 자급자족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다. 촌구석에 사는 덕에 식물과 동물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학에 눈뜨게 됐다. 텃밭에서 본 해충, 감자잎 벌레가 닭 먹이가 되고 이 닭을 키워 닭요리로 이어지는 데서 자신도 먹이사슬의 일부라는 점을 학습하기도 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대로 자연의 이치를 초등학생 때 깨우친 거다.


그는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내 삶을 애써 비참하게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더 열심히 연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돌파의 시간을 보낸 자만이 할 수 있는
선한 복수이자 감사다.

 

헝가리 세게드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아버지는 푸주한이고 어머니는 집단농장의 경리 일을 했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공산당에 반기를 든 집회에 참가한 부친의 전력 때문에 커리코는 연좌제에 걸려 비밀경찰 관리 대상자로 등록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헝가리에서는 버티기 어려워 미국으로 가게 된다.


고졸인 다섯 살 연하의 남편, 두 살 딸과 함께 중고차를 판 돈 1천200달러를 곰 인형에 숨겨 무사히 미국 템플대에 박사 후(postdoc) 연구자로서 첫발을 디딘다. 남편은 집수리하고 차 고치고, 집에서 딸을 양육하면서 살림을 도맡았다. 커리코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데는 남편의 공헌이 크다.


템플대 실험실의 열악함과 연구비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더 나은 조건의 대학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포스트닥으로 받아준 교수가 그녀의 대학 이동을 막으려고 온갖 협박과 위협을 가해 맘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장벽을 돌파한 커리코는 일단 펜실베이니아대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연구 주제에 대한 대학 측의 무관심, 연구비 조달의 어려움 등으로 연구원 신분 강등 조치까지 당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기관, 돈, 과학이 결탁하는 자본주의적 연구시스템을 적나라하게 체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도 ‘과학연구는 자신의 북극성’이라는 그의 믿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우연히 노벨상 공동수상자인 드류 와이즈먼을 여기에서 만난 건 큰 행운이다.


커리코가 고등학생 때 생물 선생님으로부터 추천받은 책, 한스 셀리에의 『생명의 스트레스』에서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 대신에 통제가능한 것에 초점을 맞추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라는 교훈을 잊지 않았다. 실험실에서는 영화「형사 콜롬보」의 명대사대로 시행착오를 이겨냈다.


영화「형사 콜롬보」는 속임수(trick)를 사수하려는 범인과 이를 깨려는 콜롬보 사이의 밀당 장면을 보여준다. 어수룩해 보이는 콜롬보가 범인을 슬쩍 떠보면, 그때마다 범인이 머리를 쥐어짜서 거짓과 변명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추가 범행으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콜롬보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그러다 범인은 마침내 모순의 덫에 걸리고 트릭의 사슬이 풀리면서 유죄를 시인하게 된다.


피터 포크가 열연한 콜롬보는 늘 시가를 입에 물고 있으며, 후줄근한 레인코트를 입고 다닌다. “우리 집사람이 말이죠…”로 시작하는 그의 말버릇에 범인은 긴장을 푼다. 범인과의 대화 도중 자기 아내를 종종 언급하는데도 한 번도 아내가 영화에 나온 적은 없다. 범죄 수사 기법 가운데 하나다. 콜롬보 형사가 사건 용의자에게 질문하고 돌아서다가 범인의 긴장이 풀어진 틈을 타고 ‘아참, 한 번만 더요(Oh, listen, just one more thing)’라고 범인의 생각 속으로 쑥 들어가는 대목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실험에서 거듭되는 실패에서도 불구하고 콜롬보의 명대사처럼 ‘한 번 더 해보자’라는 투지(grit)가 커리코를 30여 년 동안 실험실의 악조건을 견디게 했던 버팀목이다. 그런 기개는 그에게 주어진 장애물을 돌파할 수 있게 했다. 곰 인형을 안고 미국에 온 딸은 런던과 베이징 올림픽 조정 종목 금메달리스트다.


바운스백커빌리티(bouncebackability). 2005년 6월 콜린스 영어사전에 최신단어 목록에 오른 단어다. 스포츠 선수가 완패나 부정적인 언론보도 이후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말이다. 커리코에 딱 맞는 단어다.

 

그는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내 삶을 애써 비참하게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더 열심히 연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돌파의 시간을 보낸 자만이 할 수 있는 선한 복수이자 감사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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