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볼 때마다 울컥하는 지점이 달라져요. 어떤 때는 딸을 보는 엄마의 모습에 뭉클해지기도 하고요. 또 어떤 때는 TV를 물끄러미 보는 할머니들 뒷모습을 보면서 저분들도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귀한 자식들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보고 나면 생각할 거리,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정말 계속 보고 싶은 영화에요”

 

「딸에 대하여」(감독 이미랑)에서 딸 ‘그린’을 맡은 임세미 배우의 말이다. 열 번 넘게 봤는데, 볼 때마다 뭉클하단다. 그린은 시간강사다. 돌덩이 같은 가방을 메고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동료 강사의 부당 해고에 분노하며 투쟁에 앞장서기도 한다. 가방끈은 길지만 아직 경제적 자립은 하지 못했다. 전세금을 해달라는 딸의 말에 요양보호사 엄마(오민애)는 대출이 안 되니 들어와 살라고 한다. 그런데, 딸이 7년 째 연애 중인 동성 연인 ‘레인’(하윤경)과 함께 집으로 왔다.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는 딸과 세상에 부적합한 딸을 이해할 수 없는 엄마에게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은 있을까?

 

「딸에 대하여」는 완전한 이해 대신 최선의 이해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 세 여성의 성장 드라마다. 『82년생 김지영』을 탄생시킨 민음사 ‘오늘의 작가’ 시리즈 17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원작은 제36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고, 아이유가 추천한 도서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당시 민음사는 “소수자, 무연고자 등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타깃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날 선 언어와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퀴어 딸을 바라보는 엄마가 최선의 이해에 도달해 가는 과정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수작”이라고 평했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면 통상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반응이 많은데, 독립영화인 「딸에 대하여」는 그런 우려와 속설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서울독립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 주요 부문을 석권하면서 원작과는 또 다른 영화만의 매력을 인정받았다. 9월 4일 개봉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1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SNS에 공감을 공유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원작을 영화 언어로 옮긴 이미랑 감독은 “기본적으로 원작을 충실히 옮기되 이것이 반드시 영화여야만 하는 순간들을 빚어내고 싶었다. 딸, 엄마, 할머니 나아가 모든 세대의 이야기로 다가갔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미랑 감독은 제로 웨이스트, 비건의 삶을 공개하며 유튜브로 선한 영향력을 펼쳐온 임세미 배우 자체가 극 중 그린의 신념과 닮아 있다며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2005년 드라마 「반올림 2」로 데뷔해 최근 「최악의 악」, 「여신강림」, 「돌풍」 등에서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는 임세미 배우를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이 영화가 너무 좋다, 소중하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시나리오를 봤을 때도, 촬영을 할 때도 저에게 너무도 많은 고민과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영화가 1년 동안 다양한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볼 때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됐고요. 어떤 씬은 제게 가시처럼 다가오기도 했거든요. 아, 계속 봐야 하는 영화구나 하는 마음이 느껴졌달까요? 아마 관객들은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더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볼 때마다 가시처럼 날아와 박히는 씬들은 뭐였나요?
저만 그러는 게 아니라, 영화제나 GV에서 볼 때마다 다른 배우들도 똑같이 말해요. “왜 오늘은 저기서 터지죠?”라고요. 맨 처음은 요양원 씬이었죠. 엄마가 요양원에서 일했던 걸 못봤으니까요. 아, 엄마가 저렇게 살아왔구나, 요양원에서 사람들을 돌본다는 건 저런 거구나, 늙음이라는 건, 요양원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거구나 이런 것들에 꽂혀서 봤습니다.

 

또 어떨 때는 그린이 엄마랑 싸울 때 레인이 책상 쪽에 앉아 있는 앵글을 보면서 울컥했어요. 저런 말들, 상황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큰 걸까가 느껴져서요. 요양원에서 TV 보는 할머니들 뒷모습은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분명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자식들이었을 텐데, 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저렇게 남겨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쿡 얹히더라고요. 무말랭이 나물 움켜쥐는 모습, 페브리즈 뿌리는 장면, 요양원에서 인터뷰하는 장면들까지 찰나의 모습들에서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돼요.

원작 소설은 언제 읽으셨어요?
시나리오 받고 동시에 읽었어요. 1박 2일 꼬박 읽었습니다. 원작에 좋은 문장들이 너무 많았어요. 시나리오는 ‘이걸 어떻게 영화화시켰지?’ 할 정도로 완벽하게 나왔더라고요.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한 번 더 느꼈죠. 영상 속 대사 없이 흐르는 침묵들 속에 그 문장들이 돌아다니고 있더라고요. 굉장히 멋있는 힘이라고 생각했어요. 문장은 아니어도 내 안에 저 상황의 다른 질문들이 들어올 때 굉장히 좋은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랑 감독이 임세미 배우의 유튜브 채널 ‘세미의 절기’를 보고 섬세하고 추진력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고요. 영화 속 ‘그린’의 모습과 딱 맞아떨어져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죠.
일단 저는 독립영화를 너무 하고 싶었어요. 독립영화 안에서 놀고 싶었고, 또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 있었거든요.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두 편을 같이 한 제작사 ‘아토’와 함께 해서 더 좋았죠. 그때 이미랑 감독님이 “그린을 연기하는 인간 임세미의 삶의 태도가 그린과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한번 돌아보고 삶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됐죠.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나 ‘비건’(vegan, 채식주의) 같이 남들이 불편해하는 걸 저 역시 실천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아직 부족하죠. 매일 한 걸음씩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의 매력은 어떤 건가요?
사실 저는 독립영화의 계보라든가, 상업영화와의 구분도 잘 몰라요. 뭉뚱그려서 제가 바라보는 독립영화는 연극과 드라마로 구분할 때랑 비슷합니다. 미디어에서 연기할 때는 제가 쌓아온 삶을 소모한다는 느낌이라면, 독립영화는 채우는 과정이랄까요? 드라마는 대본, 미술 등이 세팅된 상태에서 ‘자, 오세요’ 하면 리딩 하고, 다음 주에 촬영에 들어가는 거죠. ‘니가 준비한 걸 보여줘’라는 느낌이라면, 연극이나 독립영화는 함께 소통하면서 준비하는 것 같아요. 회차도 짧고, 작품 길이도 짧다 보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요. 그 사이에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공유하면서 같이 쌓아가는 느낌이죠. 지난 여름에 연극 「꽃, 별이 지나」를 했는데, 많이 채워지는 느낌이었어요. 또 뭔가 멋있잖아요. 작은 걸 크게 함께 만들려고 하는 것들이요.(웃음)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요. 그린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린은 엄마의 딸이자 대학 강사로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부당한 것을 보고 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이고, 그걸 응원해 주는 든든한 내 편 짝꿍 ‘레인’(하윤경)과 살아가고 있죠. 영화에서 그린은 또 성소수자이고, 강사 동료를 지키려고 투쟁을 하는데요. 엄마가 딸을 보면서 늙음을 걱정하는 것과 딸이 해고당한 동료 강사를 지키려는 걱정이 다르죠. 이해되지 않는 걸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렇기에 영화 중반에 딸과 엄마가 늙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다투고 나서도 전화로 “엄마, 언제 들어와? 거기서 잘 거야? 데리러 갈까?”라고 말할 수 있었겠죠.

 

제목은 「딸에 대하여」지만 영화는 엄마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요양원 장면이 인상적이더라고요.
「딸에 대하여」라고 해서 친구들이 주인공 했냐고 묻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이 영화는 엄마의 이야기, 늙음의 이야기, 홀로 선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여성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거 같아요.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잖아요. (잠시 침묵) 연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엄마라는 말만 들으면 이상한 감정이 몽글몽글 폭발하는. 저희 엄마도 할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으로 10년을 출퇴근하셨어요. 그때 생각이 많이 났던 영화에요. 누구에게나 있는, 언젠가는 만날 이야기라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그린의 전사가 드러나는 장면이 유독 적어서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거 같아요. 연기 톤은 어떻게 잡았나요?
모든 톤은 이미랑 감독님의 ‘오케이’ 하에요.(웃음) 저는 어떤 사람도 마냥 착하거나 늘 까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순간 툭 하고 말투에서 드러나는 거겠죠. 그린에 대해서는 제가 기자간담회에서 “안녕하세요. 금쪽이 그린입니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긴 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엄마에게 툭 던지는 한마디나, 어느 눈빛 하나에서 성격이 묻어나게요. 왜 저도 엄마랑 1년은 못 볼 것처럼 불같이 싸우다가도 “그래서 순두부 먹을 거야, 복음밥 먹을 거야?”하고 대화를 하거든요.(웃음) 그런데 그린은 엄마랑 그게 안 돼요. 함께 나오는 씬이 많지 않기도 했고요. 다만 제 마음에서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길 바랐던 거 같아요.

기자들과 설정하는 장면에서는 세상과 싸우는 투사 같더라고요.(웃음)
그린은 정말 엄청나게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좀 그런 면이 있긴 한데요. 친구들이 저 보고 과거에 태어났다면 전쟁터에서 제일 앞장섰을 거 같다고 말하기도 하거든요.(웃음) 그 장면 촬영할 때 기억이 나요. 화를 주체하진 못하겠는데, 이성적으로 대화는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기자들이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니까 지금 정상적인 질문을 하는 거냐고 소리를 쳤어요.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환경, 가족 같은 가치들을 그런 상황에 대입했어도 똑같았을 거예요.

 

그렇게 똑부러진 모습을 보이다가 병실에서 엄마 품에 우는 장면도 인상적이더라고요.
아마 원작 소설에는 ‘그린은 엄마 품에 안겨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구절이 있었던 거로 기억해요. 그런데 그게 엄마와 딸 아닐까요? 엄마가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무서운 순간에 처한 딸에게는 엄마밖에 없는 거잖아요. 리더로, 발언자로, 운동가로 모두를 지키고 싶지만, 혹시 못 지켜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함과 남들이 이렇게나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삶의 무게를 엄마 품에서는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엄마가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그런데 왜 뭐라고 그래?”라는 대사도 무게감이 상당합니다.
그런 말을 듣는 우리 어른들은 자신의 인생관에 대해 고민하게 할 대사라는 생각이 들어요. 도대체 우리는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연기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대사를 들을 때면 가슴 어디가 콱 막혀서 울컥해요. 나는 뭐하고 있는 걸까, 저 말을 듣는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나중에 엄마가 돌보는 할머니한테 혼잣말처럼 하는 대사가 있어요. “너무 많이 가르쳐서 그런 거 같아요”라는. 그런데 그럼 덜 배웠으면 좋은 인간이 됐을까요? 더 나은 인간이란 건 있는 건지, 그럼 누구의 관점에서 좋은 인간인 건지, 인간 중심의 세상에서 그 중심에서 빗겨 있는 인간들은 누구인지, 이런 것들을 곱씹어보게 해주는, 정말 너무 좋은 영화인 거 같아요.

 

그린은 의식화 측면에서는 그렇게나 멋있는 사람인데요. 현실에서는 당장 몸 누일 공간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는 ‘꽝’입니다. 연기에서 어떻게 밸런스를 잡으려 했나요?
저는 그런 면에 대해서 ‘그린은 왜 저러지?’하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좀 개인적이고 T.M.I.이긴 한데요. 무명으로 오래 살아가는 배우들이 있어요. 저만 해도 TV 드라마에서는 부잣집 딸에 세상 멋진 사람인데, 집에서는 티셔츠 한 장 입고 퍼질러 있는 보통 집 딸, 한 사람이거든요. 그린은 달라요. 투쟁하고 할 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죠. 이건 질타받을 일이 아닌데, 왜 남들의 시선을 받는지 이해도 안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인의 전세금을 탕진해가면서까지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해야 하는 사람?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자신만 잘 달려가면 되는 인물인 거죠. 물론 엄마가 없었다면 레인과 싸우기도 했겠죠. 그때 왜 코인에 투자를 안 했느냐고 하면서요.(웃음)

 

어떻게 보면 「딸에 대하여」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그래도 내면의 갈등은 있었겠죠?(웃음)

「이상한 나라의 우영우」에서 눈도장을 찍은 하윤경 배우가 동성 연인 레인을 연기했잖아요. 호흡은 어떠셨나요?
「딸에 대하여」를 촬영할 때 마침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라는 대사가 나왔어요. 감사하게도요. 햇살처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는 아니에요. 그래도 연기하는 찰나, 순간에는 최대한 상대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제 상상이나 판단으로 연기하기보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충동을 최대한 그 순간에 대입하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제가 만난 레인은 대본 그대로, 아니 대본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었어요. 알록달록한 히피스러운 모습에 목소리도 힘이 있었어요. 아름답고 다정했죠. 진짜 이름을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레인아”, “그린아”라는 애칭을 만들면서 두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긴 시간을 사랑하면서 만났을까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 끈끈한 관계가 잘 보일 수 있도록 하윤경 배우와 대화를 많이 했어요.

 

둘이 노는, 사랑을 나누는 모습으로 둘의 관계가 잘 보일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가 나오는 장면에서 사운드로만 둘이 들어온다든가, 요리하는 장면 등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장면들을 찍을 때마다 감독님이 둘이 하고 싶은 대사를 편하게 해보라고 하셔서 테이크를 여러 번 가기도 했습니다.

 

여러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관객들도 많이 만나셨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관객이 있나요?
특히 독립영화가 그런데요. 영화를 보는 관객까지가 작품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영화라고 말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관객이 보고 나면 감상이 남아서 작품이 되는 거죠. 평점이야 어떻게 될지언정.

 

「딸에 대하여」를 보러 오신 관객들은 진심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이 오신 거 같아요. 자기 안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분들도 계셨고요. 엄마랑 함께 온 한 관객은 “이 영화 보면서 커밍아웃하려고요”라고 하셨고요. 동성 연인과 함께 온 한 관객은 “처음 소개합니다. 제 애인이에요”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소개해주기도 했죠. 요양원 할머니들을 보면서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추억했다는 관객도 있었어요. 환경권, 동물권에서 활동하는 제 지인들은 “영화가 다 동물, 자연 이야기로 보여요”라고 말했어요. 너무나도 뛰어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이게 우리 영화의 목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런 과정들이 있어서 이 영화가 임세미 배우에게 더 소중한 거군요.
관객을 만날수록 정말 좋은 영화구나, 관객도 좋구나 하는 걸 느끼죠. 그러니 진짜 좀 많이들 보시면 좋겠어요. 좋은 영화로 오래 남으면 좋겠습니다. 「최악의 악」을 제작했던 한재덕 사나이픽쳐스 대표는 VIP시사회 후 “꾸밈 없는 연주, 소박하지만 정직한 연주를 했다. 오랜만에 이런 영화를 봤다”시며 스태프들에게 술을 사주셨어요.(웃음)

이 영화로 임세미 배우에게도 변화가 생겼나요?
사실 이 영화를 하기 전부터 가치관은 많이 달라졌죠. 2019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봤던 얼룩소를 계기로 이듬해부터 ‘비건’(vegan, 채식주의)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때부터 시야가 많이 넓어졌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동물들, 말하지 않는 자연이 하는 말을 인간이 들어야 하는구나 하는 관심이 생겼어요. 장애나 늙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어요. 어른들 싸움으로 굶어 죽고 있는 아이들, 제3세계의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들도요. 왜 저들은 돈이 많고, 왜 저들은 가난할까 하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런데 「딸에 대하여」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가치를 더 명확하게 해준 영화였달까요? 제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왜 멈추면 안 되는지 알려주는 작품이었죠. 태어나서 같이 살아가는 세상이라 해도 이해관계가 달라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도 없는? 가까이 있는 사람과도 그런데 멀리 있는 사람과는 오죽하겠어요. 그럼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를 생각하게 한 작품입니다.

 

마라톤을 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요.
가수 션이 주최하는 8·15 마라톤인데요. 독립 유공자 가족들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한 프로젝트로 올해로 4년차를 맞이했네요. 저는 고작 풀코스의 1/10을 달릴 뿐인데, 굉장한 운동가가 된 것처럼 봐주셔서 좀…. 더 대단한 분들이 많잖아요.

 

광복절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정한 공휴일이지만, 우리가 오늘 커피 마시고 영화 볼 수 있는 일상은 과거에 독립운동했던 분들 덕분이잖아요? 휴일 하루 뭐 하고 놀까 고민하는 것보다 내 재능, 몸뚱아리를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잘 쓴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기쁨을 느껴요. 새벽에 달리기를 준비하면서 즐거워요. 이런 소중한 기쁨들이 쌓이다 보면 미래에는 제가 굉장히 좋은 사람이 돼 있을 것 같아요.

배우 임세미는 어떤 것에서 행복을 느끼나요?
너무 많은데요. 제가 ‘세미의 절기’라고 24절기를 구분하거든요. 저는 매일 바뀌는 자연의 모습에 엄청난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번 여름이 너무 더웠지만, 처서가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부는 것도 너무 감사해요. 촬영장 세트에 갇혀 있다가도 쉬는 시간에 하늘을 빼꼼히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내가 지금 자연에 있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이죠. 풀이 아스팔트에 삐죽 튀어나온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아요. 제가 사랑하는 반려견 흑미가 무사히 지내는 모습만 봐도 좋고, 조카들이 이모, 고모 하며 뛰어오는 모습도 기쁘죠.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행복이랄까요?

 

이렇게 말하기까지 노력한 시기가 있었을 거 같아요.
원래부터 하늘 보고 행복하진 않았죠.(웃음) 젊은 때는 친구들과 놀기도 많이 했고, 유흥도 즐겨봐야 좋은 배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몇 살 숙녀라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하고, 술은 어느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차 있던 시기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해도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취하기도 하고 깔깔 웃기도 하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걸까, 뭐가 불편한 걸까 고민하는 과정을 지난 거죠. 20대 중반에 노희경 작가를 만나면서 명상을 알게 됐습니다. 템플스테이를 가면서 삶의 궤도가 달라졌어요. 네비게이션 앱이 바뀐 것처럼 제 인생길이 완전히 달라졌고, 그렇게 10년이 지나면서 비건을 하면서 또 달라졌죠.

 

한번은 인성적으로나 연기적으로 너무 완벽해 보이는 선배 배우께 질문을 드린 적이 있어요. 따라하고 싶어서요. 왜 이렇게 평화로우세요, 어떻게 그렇게 사세요 하고 좀 개념 없어 보이는 질문을 드렸더니 “니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원단으로 짜이는 거야”라고 답해주셨습니다. 하루하루 제가 실을 꿰다 보면 저도 매일 행복하게 된다는 걸 그때 알게 된 거 같아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성숙함과 강인함은 성실함에서 온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요즘 루틴은 어떤지 궁금해요.
요즘에는 체력을 기르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차기작으로 두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제가 하이브리드 자동차처럼 체력이 막 생겨서 촬영장에서도 끄떡 없었는데, 이제 젊음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는 건지, 구동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이게 연식의 느낌인가 싶기도 하고요.(웃음) 그래서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거에 집중하고 있고요. 소소한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해요. 최대한 저랑 싸우려는 게 아니라 즐겁게 가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넘어져도 괜찮으니까, 오늘 좀 부족해도 괜찮으니까 다치지 말고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가고 있어요.

아까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는데요. 「딸에 대하여」도 독립영화잖아요.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누구나 인생 영화가 있잖아요. 기억하는 명대사들이 있고요. 고백을 앞둔 사람이면 남녀불문 사랑 영화를 볼 테고, 출산을 앞둔 사람이면 엄마들이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듯이요. 그게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화를 소중하게 대해야 하고, 특히나 독립영화가 귀중하게 만들어진다는 걸 많은 분들이 알면 좋겠어요. 물론 독립영화뿐 아니라 상업영화나 텐트폴 영화(흥행 성공을 보장해주는 간판 영화)도 중요하죠. 애니메이션도 유치하게 생각했다가 “인생작이야!”라고 발견할 수도 있고요. 자신의 편견을 깨주는, 선물 같은 순간을 주는 것이 영화 같아요. 영화를 잊지 말고 가끔 찾아봐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그 안에 「딸에 대하여」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