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 국어국문학과에는 졸업한 선배가 운영하는 장학회가 하나 있다. 바로 ‘다연장학회’다. ‘다연(多緣)’이란 낱말에 ‘뭐지?’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다연’은 15년 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최정선 동문(63세)의 호(號)다. 그 이름 안에는 다른 많은 이들과의 인연이 내포돼 있는데, 최 동문의 품성과 그가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기도 한다. 해마다 이 장학회에 500만 원을 기부해 후배들을 돕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학교에 2천만 원이란 큰돈을 선뜻 발전기금으로 내놨다. 역시 용도는 후배들 장학금이다. 그는 왜 이렇게 장학금을 지원하면서까지 후배들을 챙기는 걸까?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작고 가냘프지만,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고 거침없었다. 그의 첫인상이다. ‘정선(正仙)’이란 이름이 별로여서 ‘다연(多緣)’이라고 스님이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지만, 법인 대표이사로 있다 보니 개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결국은 개명하는 대신 별호로 사용했다. 그 이름이 다시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다.
최정선 동문의 고향은 서울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이 학교 육성회장 장학금을 연결해 줘서 가까스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이 인연은 훗날 그에게 새로운 인연의 길을 열어줬다.
“그때의 기억이 정말 뇌리에 박혔어요. 아마 그때 장학금 받던 장면을 담은 사진도 남아 있을 거예요. 잊을 수가 없었어요. 장학금을 현금으로 받아서 이제 중학교에 갈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너무 좋았어요. 누군가의 선의가 삶의 행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대학 대신 취업, 45세 이후를 설계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국어 과외를 하면서 공부했는데, 당시 회사에 다니던 최 동문의 언니가 벌었던 월급보다 그의 과외 수입(?)이 더 많았다. 하지만 1980년 고3 막판에 전국적으로 과외가 금지되면서 대학 진학 대신 회사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첫 직장은 책을 제본하는 곳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회사였다.
열아홉 살의 최 동문은 그 시절 이미 45세 이후의 삶을 계획했다. 매사가 분석적인 그인지라, 은퇴 후를 살아가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할지를 계산하고, 조금씩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연장학회를 통해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원천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는 지금 두 곳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와 그가 대학원을 마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다.
다연장학회를 만든 건 2014년 무렵이다. 처음에는 동아리 후배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다가 코로나19 펜데믹을 거치면서 국어국문학과 학생회 후배들로 수혜 대상을 바꿨다. 학생회가 너무 위축됐고, 형편도 좋지 않아서였다. 최근에는 10명씩 선정해서 장학금을 주고 있다. 최연소, 최고령 학우들도 포함된다. 그의 그런 마음에는 2009년 그를 사로잡았던 학생회 활동 시절의 보람과 긍지가 깃들어 있다.
1학년 1학기 마치고 포기했다가 재도전
그의 두 번째 직장은 조경회사였다. 10여 년 업무를 배워서 마침내 본인의 회사(법인)를 만들었다. 어느 날 회사 직원이 “대표님 최종 학력란에 ‘고졸’이라고 쓰는 게 좀 보기 그래요. 대졸로 하면 안 될까요?”라고 그에게 말했다. 본인은 ‘고졸’이란 사실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 주변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그의 생각도 달라졌다. 그때 문득 과거 제본 회사 시절 직원이 방송대를 다녔던 게 떠올랐다.
“고졸이면 어때, 나만 당당하면 되잖아. 이런 생각으로 지내왔어요. 고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대학을 나왔는데 말이죠. 회사도 운영하면서 혼자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05년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어요. 사실 어렸을 때 꿈은 국어 교사가 되는 거였어요.”
입학은 했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밤새워 일하던 시절이었다. 교재를 훑어본 일도 없었다. 출석수업에서 들었던 내용만 가지고 시험을 봤으니 결과는 뻔했다.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업을 포기했다. 그런데 포기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하게 느껴졌다.
2006년 다시 국어국문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뭔가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교재는 읽지도 않았고, 성적은 과락을 면하는 정도였다. 이 시절 동아리(스터디) 동기들의 격려와 응원이 그를 잡아줬다. ‘함께 가자는 격려와 응원’을 동아리 동기들로부터 뜨겁게 받았다.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계속 연락해서 끈을 놓지 않게 했고, 앞에서 끌고 옆에서 붙들어주고 뒤에서 밀어줬다. 그는 이를 두고 “쓰나미처럼 같이 가니까 휩쓸려 갔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방송대 생활에 변곡점이 온 것은 4학년이 된 2009년이었다.
“중간시험을 보고 나왔는데, 아는 동기 언니가 저를 어디론가 끌고 가더니 차에 태우더라고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간 거죠. 자리에 앉았는데 느낌이 이상했어요. 어떤 남학생이 명찰을 달아주는데, ‘여학생 국장’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서울총학생회 임원 수련회’를 가는 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1박2일 양평으로 끌려갔죠.”
잊지 못할 학생회 임원 시절
아무 준비도 없이 무작정 끌려간 서울총학생회 임원 수련회의 밤, 최 동문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밤새껏 열정적으로 놀았다. 그는 그날 밤 학교생활이란 게 공부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아리(스터디)에는 어느 정도 익숙했던 그에게 학생회라는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다. 학생회 임원으로 봉사하면서 뭔가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2009년, 그때의 4학년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동아리 활동과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특히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봉사가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죠. 절대로 시간을 뺏기는 일이 아니에요. 봉사는 보람과 기쁨의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디서 저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해요. ‘무슨 행사든 빠지지 말아라. 공부만 하면 지친다. 그리고 더불어라는 말을 잊지 말라’라고요. 후배들에게도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방송대 시절을 비롯해 그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녹여내 작품을 쓰겠다고 말하는 최정선 동문은 지금까지도 학창 시절 함께했던 이들과 동아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아홉 명의 멤버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독서토론을 한다. 2024년에는 박완서 소설 읽기를 주제로 잡고 1년간 박완서 작가와 씨름했다. 올해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모임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학교에 바라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
“저희 때는 졸업할 때 논문을 썼어요. 국어국문학과라면 논문을 써서 졸업하는 게 의미 있지 않겠어요? 논문 없이 졸업한다는 게 좀 이상하더라고요. 방법이 없을까요? 후배들은 싫어할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리고 학우들과 교수님들이 좀 더 자주,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해요. 교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으로도 어떤 힘을 얻고, 졸업까지 갈 수 있었다고 말하는 동문들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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