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시계가 돌아가면서 세계는 복잡해졌지만
과거의 문제와 문제의식은 남았다.
18세기 상업사회 이론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었으나 계몽사상의 구상들이 벽에 부딪히면서
19세기인들은 전혀 새로운 해답들을 찾기 위해
씨름해야 했다.

 

18세기의 문필가들은 자신들이 몸담은 세계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시기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상업사회는 계몽 유럽의 이러한 역사적 자의식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 역사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현상이 일어난 것은 많은 부분 상업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기인했다. 과거는 근대인들이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었고, 상업사회가 근대인들에게 안겨준 불안의 기저에는 역사의 교훈이 있었다. 한편으로 역사는 그들이 파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이미 역사가 제시하는 익숙한 순환 경로를 벗어났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상업사회와 계몽 유럽의 역사의식
근대 유럽이 스스로를 반추해 볼 기준을 제공했던 로마사에서 결정적인 내리막길은 시민이 아닌 황제에게 전문적으로 복무하는 이들이 군대를 구성하면서 시작됐다. 재정혁명 이후 민병대가 국채로 운영되는 상비군으로 전환되던 시기, 무기 소유와 시민성의 괴리가 국가의 존망에 미칠 영향을 둘러싼 논쟁은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졌다. 시민들이 직접 무장한 자유토지보유자들의 공화국을 이상화하면서 과거 헌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으로, 무장 자유토지보유자는 계몽되지 않은 무질서한 존재라는 인식도 존재했다. 개인의 무장 의무를 떨쳐 내고 다른 이들을 고용하면 더욱 자유롭게 부, 여가, 계몽,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자유와 덕성의 개념을 뒤집는 선언과도 같았다.
근대인들은 고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가 일련의 단계들을 거쳐 발전해왔다는 추론적 역사서술을 발전시켰다. 그 중심에는 유럽인들이 ‘야만과 종교’의 시대를 지나 시민적 사안에 대한 통제를 회복한 과정이 있었다. 계몽사상의 역사서술은 이를 묘사함으로써 유럽인들이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시민정부가 종교 갈등으로부터 개인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주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기여했다. 상업은 국가들의 힘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재했다. 이로부터 이 시대 역사서술의 가장 중요한 수사가 나왔으니, 바로 정복의 시대를 상업의 시대가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편군주정이나 제국은 역사적 정당성을 잃었고, 상업은 교역하는 독립국가들 사이에서 더 잘 수행됐다. 유럽은 여러 조약과 개화된 관습으로 연결된 독립적 주권국가들의 연합으로 이해됐다. 동시대인들은 이러한 체제가 로마제국, 중세 교황의 지배, 종교전쟁, 보편군주정을 넘어선 근대적 질서라 여겼다. 이것은 근대 계몽 유럽의 세계였다.
이러한 유럽의 역사적 자의식은 자체적인 역사서술을 창출했다. 역사발전단계론의 기초를 제공한 것은 물론 물적 조건의 변천이었으나, 계몽사상의 역사서술이 습속(manners)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이전의 역사서술과 구분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습속은 역사서술상의 단절을 보여줄 뿐 아니라 상업사회가 등장하면서 결정적으로 바뀐 사회상을 상징했다. 유럽사 전반은 호전적 덕성의 고대 세계가 정념을 정교화하고 습속을 바꾼 상업적 근대세계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계몽사상가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제질서
계몽사상가들이 이해하고 지키고자 했던 국제질서는 소국과 대국이 공존하는 유럽이었다. 중세부터 살아남은 다양한 공화국들의 쇠락은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징후였다. 상업이 국가방위를 위한 자금조달에 점점 중요해지면서 국가의 규모도 더불어 중요해졌다. 마키아벨리적인 발상을 따른 소국의 전통적 생존전략은 제국이 되는 것이었지만, 18세기 개혁가들은 소국이 어떻게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배제하면서도 생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은 자유에 기초한 사회와 군사력으로 그것을 지킬 역량의 조합 때문에 스위스 공화주의에 매료됐다. 많은 공화국이 스러져 가는 가운데 스위스에서 자유가 살아남은 것은 군사적·경제적 위협에 맞선 공화국들의 격렬한 저항과 투쟁 덕이었다. 이들의 사례는 상비군보다 민병대가 우월하다는 강력한 증거였으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스위스 민병대의 약화는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상업과 국채가 바꿔 놓은 세계에서 약소 정체들의 생존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대국일수록 부패에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경쟁적으로 상업제국을 추구하며 유럽 내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런 가운데 북아메리카의 독립은 영국의 중상주의 체계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상업사회에 적합한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건국기 아메리카에서 첨예한 논쟁을 낳았다. 일부는 상비군과 중앙은행 설립에 반대하며 상업대국에 맞서 독립한 신생국이 구체제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방주의자들은 근대적 맥락에서 대국 공화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연방 형식의 이점을 논증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1787~1788)의 「제10번 논고」에서 당파적 분열이 공화국에 해롭다는 지배적 견해에 맞섰다. 그는 오히려 더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괄하고 서로 다른 이익이 경쟁하고 상쇄할 공간을 확보해 당파 정신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연방주의자들의 실험은 그들이 비판한 군주정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거리를 둔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을 남겼다.
한편 유럽 소국의 개혁가들은 점차 상업제국을 열망하는 대국 군주정들의 개혁이 국제평화의 조건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제네바 개혁파의 지도자인 에티엔 클라비에르(1735~1793)는 프랑스의 변화를 중심으로 삼아, 모두가 적당한 부와 편리를 누리는 상업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북아메리카의 반영감정을 이용해 중상주의적 영국을 배제하는 미국 농업과 프랑스 제조업 간의 평화적 국제무역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프랑스에서 중상주의적 동기를 지닌 지배계급이 사라지고 적당히 부유하고 근면한 인민이 정책의 중추가 되어야 했다. 클라비에르는 부와 덕성스러운 습속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양자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프랑스와 미국이 제조업과 농업을 각기 분담하는 평화적 국제무역체제는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발발 소식을 접했을 때 클라비에르는 혁명이 가져올 신세계에 희망을 걸었다. 클라비에르는 국유지를 팔아서 만든 종이 화폐인 아시냐를 통해 모두가 토지를 소유하는 새로운 경제를 구상하면서 이로써 인민의 덕성을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1790년대 초 재정정책이 모두 실패했고 인민의 습속은 과대평가됐음이 드러났다. 이후 공포정치적 해법이 대두하며, 원래 소국 보호를 목표로 했던 이상은 자유로운 인민들의 거대 공화국 건설로 바뀌었다.
그러나 기번과 같은 이들에게는 어떤 수사를 동원하더라도 혁명군의 침략은 과거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기획에 공화주의를 덧입힌 것에 불과해 보였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가 합병하고 식민화하고 있는 국가들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도덕적 전쟁을 요청했다. 군주정과 공화정으로 분별할 수 없는 새로운 정체들이 생겨나던 18세기 말의 상황에서 새 시대에 적합한 정부형태를 둘러싼 고민은 많은 혼란을 낳은 채 미결 상태로 남았다.

달라진 세계와 남아있는 문제들
세기 전환기의 영국과 프랑스는 상대를 비판하며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나 사실은 서로 닮아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만의 중상주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추진한 대륙봉쇄령은 자충수가 됐다. 그의 중상주의 제국은 1812년 러시아와의 전쟁과 그의 궁극적 몰락으로 이어졌다. 자주권을 상실한 소국 지도자들의 시선은 영국으로 향했다. 1707년 경제발전을 위해 주권을 단념하고 영국으로 연합한 스코틀랜드의 성공 사례를 다른 소국들이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견해가 퍼졌다. 1800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연합이 시범 사례를 제공했다. 그러나 조지 3세가 가톨릭 해방을 거부하면서 아일랜드 민중은 영국인의 시민적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아일랜드의 개신교 지배계급이 중상주의 체계에 편입됐다는 냉소적 평가도 나왔다.
19세기 초의 지식인들은 세기말의 통치가 독립적 국가들의 세계시민주의적이고 개화된 유럽적 공화국이 아닌 전쟁과 제국으로 귀결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이들은 호전적 중상주의에 맞서기 위해 과거와는 다른 계몽을 모색했다. 장바티스트 세(1767~1832)는 정치경제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을 고려해야 한다는 일반적 사실을 발견했다. 세의 경제관은 모든 인민이 부의 창출에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인민이 그 역할을 잘 이해하도록 습속을 개화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 공화주의적이었다. 세는 영국 정책이 국내시장에 피해를 줄 정도로 해외무역에 집중했음에도 안정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대중의 지지에서 찾았다. 영국 인민은 상업을 신뢰하도록 교육받았고, 그것이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역사의 시계가 돌아가면서 세계는 복잡해졌지만 과거의 문제와 문제의식은 남았다. 18세기 상업사회 이론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었으나 계몽사상의 구상들이 벽에 부딪히면서 19세기인들은 전혀 새로운 해답들을 찾기 위해 씨름해야 했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역사학부 대학원에서 18세기 러시아제국의 개혁과 유럽계몽사상의 관계를 중심으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예카테리나 2세의 입법위원회와 러시아의 상업화 논의」등이 있으며, 번역서로『예카테리나 서한집』(공역, 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