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

광교화신상회(현 종로타워) → 다료(현 그랑서울) → 광화문통(광화문로) → 낙랑팔라(현 플라자호텔)

→  대한문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 남대문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장곡천정(소공동)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이〈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연재한 중편소설이다. 작품명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소설가 구보의 어느 하루 일상을 보여준다. 근대적 일상성이다.
박태원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고, 1988년 월북 및 납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 단행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금기시됐다. 이러한 이유로 박태원의 작품을 둘러싼 연구는 1980년대 후반이 돼서야 제대로 가능해졌다. 구보 박태원은 강제 병탄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 1월, 아버지 박용환이 운영하는 공애당 약방 다옥정(현 중구 다동) 7번지, 청계천 남쪽에서 태어났다.
거대도시 서울이 식민지 수도 경성이었던 1934년 어느 날 정오, 구보가 다옥정 7번지 집에서 출발해 발걸음을 세우고 가장 먼저 멈춰 선 곳은 경성에서 가장 큰 다리인 광교다. 정식명칭은 광통교(廣通橋)다. 광통교는 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 통로에 위치해 조선인 동네 북촌과 일본인 거류지 남촌과의 경계이자 둘을 연결하는 다리이기도 했다.
90년 전 구보가 건넜던 다리와 도로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묻혔다가 다시 복원돼 150m 옆으로 옮겨졌지만, 새로 만든 돌기둥에 ‘광교/廣橋/GWANGGYO’ 3개어가 굵직하게 병기돼 있다. 광교 모퉁이에서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자전거를 재빠르게 피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앓고 있던 귓병에 대해 생각하던 구보가 별다른 목적 없이 ‘바른 발을 왼쪽으로’ 옮긴 것과 같이 필자도 90년 전 구보처럼 오른발을 왼쪽으로 옮겨보았다.
구보가 식민지 수도 경성의  삶이라는 현실을 거부할 순
없어도 글쓰기를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현실을 고발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과 욕망을 들여다봄으로써 암울한
이곳에서 벗어나는 희망의 통로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신상회, 식민지 경성의 민족자본
광교에서 도보로 3분 정도 거리인 종로사거리에는 거대한 규모의 33층 건물이 솟아있다. 세 개의 기둥이 스카이라운지를 모시고 있는 듯한 기괴한 모양을 뽐내고 있는 종로타워는 화신상회 터에 세워진, 현재 시점의 종로 ‘랜드마크’다. 화신상회는 일제강점기 종로의 랜드마크로서 당시 경성 사람들에게 선망의 공간이었다.
인구 30만 명 정도 되는 경성에 백화점이 다섯 군데나 세워졌다. 일본인의 주거지역 및 상업지구였던 남촌 본정(本町, 현 충무로) 등지에 미쓰코시 외 3개의 백화점이, 조선인의 공간이었던 북촌에는 민족자본으로 만들어진 화신백화점이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화신백화점은 일본인보다 조선인 상류층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1931년, 평안남도 용강군 지주였던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이 증개축해 탄생한 화신상회는 명실공히 북촌 종로의 ‘핫플’로 성장했고, 이후 1937년 11월 화신백화점으로 ‘승격’됐다. 승승장구하던 ‘화신’백화점도 그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화려했던 화신백화점 건물은 사라졌다. 하지만 자본이 선사하는 소비 욕망에 대한 우리의 판타지는 끝나지 않았다. 화신백화점에서 ‘옥상정원’이 하나의 명물로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종로타워 33층에 입점했던 ‘탑클라우드’도 한때 프로포즈의 명소로 젊은이들을 사로잡던 환상의 공간이었던 때가 있었다. 룸펜 인테리겐치아 소설가 구보는 작품 속에서 이러한 근대도시의 스펙터클한 환등상(phantasmagoria)을 끊임없이 경험해 나가는 존재로 그려졌다. 2018년 이후 탑클라우드는 폐점하고 현재는 공유 오피스로 바뀌었다.
하루 여정 중 첫 방문지였던 ‘화신’에서 구보는 아이와 함께 승강기를 기다리는 젊은 부부를 잠시 부러워하다가 ‘행복’을 찾아 이내 밖으로 나오고야 만다. 근대화 물결 속을 유영하는 경성 사람들이 가득한 ‘화신’ 안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구보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태원은 화신상회에 대해 고작 15줄을 할애했을 뿐이다.

광화문통, 역사가 지워진 육조거리
구보의 전차 여행과 다른 코스를 가지는 이번 여정에서는 이쯤에서 광화문로 쪽으로 방향을 틀 때다. 작품 속에서 구보가 만나고 싶어 했던 벗 이상(李箱)이 운영한 ‘하얗고 납작한 다료’ 다방 제비는 종로사거리에서 광화문사거리로 가는 방향인 청진동 골목 첫 번째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골목 안에 흔적으로만 남았다.
광화문통은 조선의 육조거리, 현재의 세종로를 지칭하며 조선 건국 이래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요 행정기관이 모여있던 곳이다. 하지만 육조거리였던 광화문통은 더 이상 옛 자취를 품고 있지 않다. 조선총독부 앞에 있었던 광화문은 1927년 9월 경복궁 동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으로 이전했다.
구보는 ‘멋없이 넓고’ ‘쓸쓸한’ 길, ‘황톳마루’ 네거리를 아무렇게나 걸어간다. 조선시대 육조거리 끝은 황토마루로 막혀있었으나, 1912년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직선으로 연결하는 태평로 도로를 만들면서 누런 흙 언덕 황토마루는 사라지게 됐다.
화신상회 앞에서 동대문행 전차를 탔던 구보는 조선은행에서 하차한다. ‘낙랑팔라(樂浪 parlour)’에 가기 위함이다. 구보가 하루 동안 세 번이나 들리던 1930년대 끽다점 낙랑팔라는 ‘모던’한 음악이 축음기를 통해 들려오는, 젊은 룸펜들의 아지트였다. 현 더플라자 호텔 자리다. 1930년대 가장 유명한 다방이었던 이곳은 도쿄미술대학 출신인 화가 이순석이 운영한 곳으로, 명곡연주회, 문학의 밤 등 행사가 자주 열리는 예술적 장소였다.
소설 속에서 구보씨들은 “일거리 없이 등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인생을 ‘피로하게’ 느끼며 각각 ‘고달픔과 우울을 하소연’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경성부청과 대한문, 식민지 우울의 이중성
첫 번째 낙랑팔라 방문에서 벗을 만나지 못한 구보는 태평통(현 태평로) 방향으로 나와 부청 쪽을 향해 걷는다. 부청은 경성부청으로 현재의 서울시청이다. 경성부청을 가던 중 구보는 넓은 마당 건너 대한문을 바라보게 되는데,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돌아와 거처했던 경운궁 정문 대한문은 경성부청과 대비적으로 ‘너무나 빈약한 옛 궁전’의 정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경성 중심지를 숱하게 지나다녔을 구보에게 이 장면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고’가 아닌, 차곡차곡 몸에 쌓인 좌절과 우울감의 총체가 아니었을까.
늦은 밤 세 번째 낙랑팔라에서 벗 이상과 재회한 구보는 경성우편국이 자리한 황금정 방향으로 내려오지만, 이내 북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종로사거리로 향한다. 남대문통 1·2정목(현 남대문로1가와 2가)과 황금정은 당시 조선 최고의 금융가로, 식민지 조선 금융 자본의 핵으로서 수탈의 첨병이었다.
이제 구보의 하루가 마무리될 시간이다. 새벽 2시가 돼서야 이상과 헤어진 구보는 다옥정 7번지 집으로 돌아온다. 벗 이상은 구보에게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고 진정으로 말하고, 이후 구보는 ‘행복’을 찾기 위해 소설 쓰기에 매진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14시간 동안 구보가 관찰한 식민지 수도 경성은 어딜 가나 두통과 우울을 불러오는 공간이다. 근대적 도시와 전근대 공간이 무자비하게 충돌하는 중층적 공간에서 전근대와 근대의 생활방식은 혼종된 채 표류하는 모습이다. 소설을 통해 도시 산책자 박태원은 경성의 민낯과 경성 사람들을 교묘하게 ‘고발’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그들 중 하나로서 말이다.
1930년대 경성의 모습과 2024년 서울은 너무나도 닮아있다. 구보가 식민지 수도 경성의 삶이라는 현실을 거부할 순 없어도 글쓰기를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현실을 고발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과 욕망을 들여다봄으로써 암울한 이곳에서 벗어나는 희망의 통로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