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북 리뷰

글쓰기는 건축이다. 글은 개념어를 질서 있게 배열하고 축조한 것이다. 질서 있게 축조하는 데에는 설계도(문법)가 필요하고 신선하고 참한 글 재료를 공급해야 한다. 수사학이란 연장도 동원된다. 개념망인 이론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글로 포착할 현상을 효율적으로 건져 올린다. 그래서 글을 완성한 사람을 ‘지은이’라고 부른다. 집이나 건물을 짓는 것처럼 글쓰기란 축조와 건축으로 비유된다. 정교하게 쓴 글은 아름답다. 마치 멋진 설계에 따라 지은 건축물처럼.

 

이 책은 바로 그런 아름다운 건축 담론의 성찬이다. 저자는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로 강의와 글쓰기에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는 건축학계의 원로다.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는 그의 강의(「서가 명강」, 유니브스타)를 정리한 것이다. 철학, 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물리학 등의 개념과 이론을 멋진 설계도에 따라 잘 배열하고 축조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생각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다. 아울러 현실에서 경험하는 주택, 사무실 건물, 관공서 건물, 예술적 감성을 충족하는 미술관과 박물관, 병원 등에서 보는 현실의 건축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건축담론의 성찬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선 건축은 잡학이고 불순한 학문이라면서 정통적인 건축학의 정체성을 도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건축에는 생각 이상으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시선이 다양하게 연결되기에 건축과 공간은 전문성의 틀을 넘어 횡단적인 태도에서 생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이 사회과학과 정치학, 법학, 행정학, 심리학의 학제적인 담론으로 건축 현상에 대한 미분과 적분의 시각을 종횡무진 가로질러 책의 뼈대와 살을 구성한다. 때문에 명강의와 글쓰기 대가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도 글쓰기, 그림그리기, 기하학, 광학, 수학, 역사, 철학, 음악, 의학, 법학, 천문학 등이 모두 건축과 관계 있다고 했다. 지은이도 다양한 학문영역의 개념과 이론들을 건축이란 그릇 속에서 잘 버무려 맛난 건축지식의 성찬을 낸다. 건축을 이해하는 틀을 축조하는 데 평소에 맛보지 못한 다양한 학문적 재료가 동원된다는 점이 놀랍다. 건축은 본래 이기적이며 욕구와 욕망의 그릇이라고 말한다.

 

2부에서는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발견할 때 건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지원하는 이론적 담론으로 김 교수는 한나 아렌트를 소환한다. 이 점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 아이히만』을 쓴 그 아렌트가 건축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각단을 파악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은이가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아렌트가 지향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에서 무릎을 치게 된다. 사회질서는 공간으로 구축되며,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공간을 요구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공간이 곧 사회적임을 논파한다.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탁자의 사회학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물을 올려놓거나 둘러앉는 탁자는 기본적으로 광장이며,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위해 마련된 지면이다.” 과연 그렇다.

 

횡단적인 학문, 그리고 한나 아렌트
김광현 교수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한 건축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집 벽 뒤에는 법과 제도의 규정이 있다. ‘법이 곧 벽이고 벽이 곧 법’이라는 말로 건축이 제도에서 비롯하며 제도는 건축으로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출현된 공간’의 등장으로 공적 영역에서 격리됐던 프라이버시의 특별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김 교수는 불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은 법과 건축 공간이 주는 평등함이 개입할 때 비로소 평등해질 수 있다고 말한 아렌트의 주장에 주목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아렌트가 ‘세계의 물화(物化)’를 강조하는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노동, 작업, 활동을 구분한 아렌트는 활동이 건축을 통해 보이고 들리고 기억되도록 물화한 세계가 만들어지는지를 밝힌다. 사회가 만드는 건축, 즉 관료제 행정이 요구하는 건축은 사람들의 욕망을 통일시키면서 획일성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래서 사회라는 말의 함정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이 사람을 잇지 못하는 사회, 그래서 사람들의 관계가 사라진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관료제는 건축가에게 생각을 바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행하는 사람에겐 사고와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생각은 지배자의 몫이라서다. 건축가를 행정관료의 명령에 따라 집행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에 강한 반감을 드러낸다. 통치 기준을 금전에 두는 관료제 때문에 가장 싼 건축물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가 건축을 만든다’는 말은 ‘사회는 건축 뒤에 숨어 있다’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깨알 같은 지식의 선물
건축에 투영된 권력과 제도를 논파하는 내용이야말로 권력을 핵심 주제로 다루는 정치학자와 제도론을 설파하는 행정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미셸 푸코는 권력이 제도와 그에 따른 공간 장치로 유지된다고 했다. 공간은 모든 권력 행사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아렌트는 권력이 같은 공간에서 긴밀하게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나온다는 점을 지적했다. 제도는 공간을 요구한다.  정책과 법은 따로 있지 않고 공간과 직결된다. 공간은 제도를 구체화한다. 건축 너머에 있는 세계를 간파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건축은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비판하며 재구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독자에게 깨알 같은 지식을 선사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모든 건축물은 높은 곳에서 드리운 추가 멈출 때 그 수직선을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평면을 만든다. 이 구조물의 엄정한 기준선을 만든 연장이 구(矩)다. 구 이외에 컴퍼스인 규(規), 수평을 재는 준(準), 직선을 긋는 줄인 승(繩)이 있고 나서 법도가 생겼다. 한 점에서 규를 돌리니 모든 점이 같은 거리 있음을 보고 평등을 생각해 냈다. 수평을 재는 준을 보고 승을 곧게 대니 반듯하게 깎을 수 있다. 규구준승(規矩準繩.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이란 말은 건축이 사회에 질서를 주는 것이고, 사회가 만드는 건축이 아니라 사회를 만드는 건축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3부에서는 건축을 소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상품이 된 주택과 주거계급이 등장한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막스 베버도 재산 소유와 비소유가 모든 계급의 위상을 결정하는 기본 요건이어서 주택이 계급이 되고 주택 때문에 사람들이 갈등한다고 했다. 100여 년 전에 이미 한국 사회의 주택 계급론을 예견한 베버의 통찰력이 놀랍다. 행정학자도 간과한 것을 지은이가 적확하게 알렸다.

 

4부에서는 건축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일러준다. 한마디로 우리 각자는 건축가로서 건축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의 기쁨은 자기 의지로 공적인 장소, 모두가 경험하는 집에 나타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들을 때의 기쁨처럼.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인 철학자 셸링에 따르면 ‘건축술은 응고한(얼어버린) 음악’이다. 게다가 음악이란 움직이는 건축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의 일은 건축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귀를 열어준다.

 

강성남 방송대 교수·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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