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 인류 지성사 전체를 볼 때, 철학의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은 단연 플라톤이다. 아마도 영원불변의 형상, 즉 이데아의 세계에 시선이 고정된 극도로 사변적인 철학자라는 인상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에 대한 지극히 파편적인 견해일 뿐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끊임없이 고민했던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서 솟아오르는 주제는 정의로운 삶, 행복한 삶이다. 영혼이 병든 사람, 불의한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확고한 입장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그 역이 자동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즉, 정의로운 사람은, 외적인 조건에 전혀 무관하게 정의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일 정의롭게 살아 행복해진다면, 뉘라서 정의를 마다할까? 삶의 목표가 행복을 얻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상 정의와는 하등 관계없는 사람이 온갖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 같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

정의란 그 자체로도 좋고 결과마저도 좋은 것,
즉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따지고 말고 할 것 없이
속에서 샘솟듯이 우러나와서, 진심으로 원해서 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과제가 된다.
스승과 제자, 정의와 행복을 논하다
플라톤은 거의 언제나 소크라테스를 작중인물로 내세우는데,『국가』라는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도전을 받는다. 즉, 고통받는 정의로운 사람이 성공한 악인보다 더 행복하다는 점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당돌한 질문을 던진 제자들의 이름은 글라우콘 그리고 아데이만토스였고, 실제로 이들은 플라톤과 동기간이었다.
물론 이들도 스승처럼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하다는 신념을 함께 나누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자신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가치관과 신념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해 온 전제를 새삼스럽게 의심해 보고 질문하는 일, 이것이 바로 검토의 시작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시작이다. 과연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잘 배운 제자들답다.
이 검토의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렵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판명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허위나 무지로 판명된다면 그건 정말이지 날벼락같은 일일테니까. 그러나 검토를 통해 확실한 앎을 얻을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 삶을 행복으로 연결해 줄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지적인 모험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국가』라는 대화편에서 이 과정을 우리에게 상세하게 알려준다. 이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부자 노인 케팔로스의 집에 초대받아, 집주인에게 일상적인 안부를 묻다가 곧이어 정의를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케팔로스는 남을 속이지 않고 빚 잘 갚는 게 정의라고 선뜻 말하고,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겐 좋은 걸 돌려주고 적에겐 해를 가하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은 통념 수준에서 발설된 것이다. 빚 잘 갚는 게 정의라면, 칼을 빌려 썼다가 정신 나간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도 정의일까? 친구와 적의 구별이 그렇게 쉽다면, 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들 하는 것일까? 또, 정의가 어떤 덕목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적이어도 해를 끼치는 것이 과연 덕이겠냐는 반문도 나올 법하다. 우리의 통념은, 알고 보면 논리적으로도 허술하고 현실적으로도 금세 무력해지는 것투성이다.
그런데, 이 한가한 대화에 트라쉬마코스라는 소피스트가 난입한다. 그 이름도 대담한 싸움꾼이라는 뜻이다. 그는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세상이 어디 그렇게 순진하게 돌아가던가? 정의란 댁들이 말하는 그런 게 아니고, 힘센 사람의 이익이야. 법을 고분고분 잘 지키는 게 정의인데, 그 법 만드는 놈들이 다 힘센 놈들이고, 그들이 자기 좋자고 꾸며 놓은 게 법이지. 그러니까 법 잘 지키는 게 결국은 강자의 이익을 위한 거란 말일세”.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반격에 나선다. “강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게 마련이니,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법을 만들 수도 있겠지. 그럼 그 법을 지키는 것은 무어냐? 통치자의 이익과 반대라는 점에서는 불의겠고, 법을 잘 지킨다는 면에서는 정의일 텐데?”
여기서 트라쉬마코스는 “그런 실책을 범하는 통치자는 통치자라고 볼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반박을 이어간다. “그럼 통치자는 실수 없이 완벽한 통치술을 구사하는 사람이겠구나. 그런데 통치술도 일종의 기술이다. 기술이 있는 사람은 그걸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을 위해 사용한다. 목자의 기술을 봐라, 그게 가축을 위해 쓰이지 자기 좋자고 쓰이던가? 의사의 기술을 봐라, 그 기술도 의사 본인이 아니라 환자를 위해 쓰인다. 통치술 역시 마찬가지다. 통치의 대상이 되는 시민 좋자고 쓰이는 거지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트라쉬마코스도 지지 않으려 한다. “의사? 너 말 잘했다. 의사가 돈 얼마나 많이 버는데, 그게 자기 좋자고 하는 거 아니냐?” 소크라테스가 대답한다. “글쎄, 그건 돈벌이 기술이고, 의술과는 별개야.” 말문이 막힌 트라쉬마코스는 이제 진의를 드러낸다. 그가 바라보는 정의는 사실 남들에게나 좋은 것이고 불의야말로 자신에게 좋은 것인데, 불의가 발각돼 벌을 받을까 두려워 선뜻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요 약한 자이며, 사실 힘만 있으면 누구라도 다 불의를 저지르며 살 거라고 일갈한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화두
이쯤 되면, 우리와 이 작품 사이에 놓인 2500년의 시공간이 어느새 지워진다. 우리의 현실을 아프게 드러내 보이며 냉소적인 논변을 펼치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맞서 소크라테스는『국가』전체의 화두를 던진다. 트라쉬마코스의 말대로라면 사람이 욕구를 마음껏 분출해 가며 제멋대로 불의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요 행복일 텐데, 이런 불의한 사람이 과연 원래 자신이 살아가야 할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걸 행복한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야 할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야 행복하지 않을까? 이게 소크라테스의 질문이자 대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논리로 이기지만, 완전히 설득하지는 못한다. 마침, 스승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나선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스승을 거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느낌이다. 내용은 이렇다. 좋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그저 그 자체로 좋은 것(예를 들면 솔솔 피어오르는 탕수육의 향기), 둘째, 그 자체로는 피하고 싶지만 결과가 좋아서 좋은 것(예를 들어, 팬데믹 시기에 마스크 쓰기.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너도 나도 마스크를 써서 방역이 되니까, 즉 그 결과가 좋으니까 하는 것), 셋째, 그 자체로도 좋고 결과까지 좋은 것이다(몸의 건강이라던가, 영혼의 지혜 같은 것).
여기서 정의가 어떤 좋음이라면, 이 중에서 어떤 좋음이냐는 질문이 제기되고,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좋음, 제자들은 두 번째 좋음이라고 말한다. 즉, 무력한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취하는 삶의 방식이 정의라는 입장이다. 갑이 아니라 을이니까 법을 지키는 것일 뿐, 만일 갑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이쯤에서 제자들은 귀게스의 반지를 예로 든다. 이 반지를 끼면 투명 인간이 된다. 마음먹은 대로 아무 짓이나 하더라도 남의 눈을 완벽하게 피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사람도 순순히 정의를 행하고 살까? 만일,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도 불의한 짓을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이 정의롭고 착하게 살아가는 이유도 따져보면 제 힘이 충분치 못하고 남들의 시선이 무서워서가 아닐까? 제자들의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두 사람의 경우를 든다. 한 사람은 최악의 인물이다. 그러나 능력만큼은 엄청나서 자기가 불의한 사람이란 걸 철저히 감출 줄 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장 정의로운 사람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데, 설령 들켜도 말로 남들을 구워삶을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이도 저도 안 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반대파를 누를 능력이 있다.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실제로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인데, 사람들 보기에는 영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이처럼 상극인 두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평판도 그대로라면, 이 중 누가 행복한 사람이겠냐고 스승에게 질문한다. 
정의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서
이것이 제자들의 질문이고, 이제 소크라테스는 대답을 해야 한다. 이 중 두 번째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고, 정의란 그 자체로도 좋고 결과마저도 좋은 것, 즉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따지고 말고 할 것 없이 속에서 샘솟듯이 우러나와서, 진심으로 원해서 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과제가 된다. 철학이 말랑말랑한 ‘힐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대목이다. 제자들이 스승을 궁지로 몰아넣고, 위아래도 없이 옥석을 가리자고 덤벼드는 걸 보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밝힐 수가 없고, 아마도 그저 사람들이 맞다는 대로 묵묵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철저한 질문이 없다면, 우리는 통념 앞에서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자, 이제 나와야 할 질문은 나왔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정의로운 삶의 가치에 대해서, 정의로운 사람이 왜 행복한지에 대해서 충분한 대답이 이뤄질 수 있도록 대화편『국가』전체에 걸쳐 길고 긴 여정을 펼쳐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