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시간을 걷다, 모던 서울

경로: 경교장 → 서북회관 터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 → 여운형의 집터

 


백범이 통일 국가를 준비한 경교장

건국운동 현장 답사의 출발점인 경교장은 2005년에 국가사적 465호로 지정됐다. 2013년 3월 2일 복원 완료 후 시민들에게 공개돼 종로 일대에서는 표지판을 더러 볼 수 있다. 그래도 찾기 어렵다면 강북삼성병원을 찾아가면 된다. 경교장 바로 뒤에 강북삼성병원이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도 가깝다.


경교장은 중국 땅을 전전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후 거처였으며,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건국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현장이다. 1938년에 당시 금광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최창학이 지은 최고급 2층 주택이었고, 본래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고 거금을 기부하는 등 친일 행위로 재산을 유지했던 최창학은 해방 후 김구 선생의 귀국에 맞춰 이 건물의 무상 제공을 제안했다.


김구 선생은 죽첨장 입주 후 일본식 건물 이름을 경교장으로 바꿔 불렀다. 죽첨장 근처의 경구교(京口橋)라는 다리를 당시 사람들이 경교(京橋)라고 불렀으므로 이를 따서 새 이름을 정한 것이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로 연면적이 300여 평에 달했다. 당시 유명했던 건축가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23일에 1차로 귀국한 김구 선생은 입국 직후 이곳에 입주했다. 이후 12월 1일 2차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아 12월 3일 조국 땅에서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개최하면서 건국운동의 막을 열었다. 비록 친일파의 저택이었지만 이후 임시정부의 공관이자 한국독립당과 반탁운동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특히 1948년 5월 총선을 앞두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규탄한 김구 선생이 반공 학생들의 반대 시위 속에서 남북 협상을 위해 북으로 출발한 장소이기도 하다.

 

경교장에 칩거하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면담을 요청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2층 응접실 책상에서 서거했다.

수많은 조문객 인파의 통곡 속에서 경교장은 국민장의 추모 공간으로서

마지막 용도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갖은 고초를 겪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 후 1945년 9월 초에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 중장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고 홀대받았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미군정에 의해 ‘임정요인’이라는 단체 자격의 입국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이 허용됐다. 이들은 미군정의 굴종 요구에 굴하지 않고 12월 3일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국무회의를 진행했고 그 노선은 신탁통치 반대와 통일 정부의 수립이었다. 이에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건국 실천원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건국운동을 전개한다.


미군정에 의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가 기획되자 김구 선생은 민족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미군정을 설득해 남북 협상의 기회를 얻어낸다. 38선 이북의 실권자였던 김일성을 만나 통일 정부 수립에 필요한 협의를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김구 선생은 김일성을 만나 쑥섬회담이라는 남북 협상을 여러 날 진행했으나 북에 주둔한 소련군정의 지휘를 받는 김일성과의 회담은 지리멸렬, 성사를 내지 못했다.


역동의 해방 정국은 1948년 남북 협상 좌절 후 남에서는 대한민국이,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비극의 역사로 마무리가 된다. 경교장에 칩거하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면담을 요청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2층 응접실 책상에서 서거했다. 수많은 조문객 인파의 통곡 속에서 경교장은 국민장의 추모 공간으로서 마지막 용도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서거 현장에 펼쳐진, 검붉은 피로 물든 적삼을 바라보며 김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인 조국 독립과 민족 통일의 염원을 되뇌어 본다.


건국운동과 신교육의 산실, 서북학회 회관

경교장을 나서서 광화문 방면으로 걸음을 옮기면 지금은 철거됐지만 새문으로 불렸던 돈의문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을 지나 안국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인사동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태화빌딩이 보인다. 이곳은 예전 태화관 터인데,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의 현장이다. 태화빌딩을 따라 인사동으로 들어서서 종로세무서 방향으로 내려가면 낙원동 도로변에 ‘서북학회 회관 터’라는 표석이 놓여있다.

 


도로에는 표지석만 남아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건축물을 소유주인 건국대학교 법인에서 교내로 이전해 복원 및 보존하고 있다. 현재 광진구 화양동의 건국대학교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상허기념관과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외형이 소박하고 끝이 둥근 르네상스 양식 구조로, 특히 붉은 벽돌과 그 이음 부위를 채운 석조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1908년에 처음 지어져 해방 정국에서 여러 정당의 사무실로 사용됐고 신교육의 교사로도 사용된 역사적인 현장이다.


서북학회 건물은 반지하와 지상 2층의 벽돌 건물로 1900년경 종로2가에 세워진 한미전기회사 사옥을 본따 지어졌다. 처음 건축지는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였다고 한다. 이후 1910년 서북학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협성실업학교(현 광신고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던 것을 1939년에 건국대학교 설립자 상허 유석창이 민중병원 확장을 목적으로 매입했고, 해방 후 민주정치가들을 육성하기 위해 1946년 5월 15일 조선정치학관을 발족시켰다. 이것이 조선정치대학관, 정치대학, 건국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서북학회 회관 건물은 해방 이후 격변하는 현대사 속 정치 활동의 장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1층을 사무실로, 지하실을 기관지 인쇄실로 사용했는데 상허는 이들을 내보내기 위해 한국민주당 창당 대회를 이곳에서 개최하게 하고 사무실을 제공했다. 좌우 세력이 한 건물 위아래층에서 활동하는 기이한 상황이 됐고, 결국 조선공산당이 떠나면서 상허는 계획했던 교육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서북학회 회관 건물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의 현장이면서, 처음 건축 시절의 용도를 충실하게 수행한 건국과 교육의 산실이기도 했다.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협성실업학교, 건국의숙, 조선정치학관, 조선정치대학관, 건국대학교, 외국어학원, 단국대학교가 모두 이 건물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전개한 몽양의 자취

서북학회 회관 터를 뒤로하고 안국역 방향으로 좀더 올라가면 안국역 3번 출구 방향으로 현대건설 사옥이 자리 잡고 있고, 그 골목 안쪽은 현재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명소로 부상한 북촌길이다. 이곳에는 해방 이전부터 국내에 거주하면서 건국을 준비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다.

 


우선 현대건설 빌딩은 여운형이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선포한 휘문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세워졌다. 현대건설 빌딩 왼편 길로 100미터쯤 가면 보헌빌딩이 보이는데, 이곳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있던 장소다. 원래 일제시대 거상인 임용상의 집이었는데 이 시기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로 사용되다가 이후 개발돼 현대식 빌딩이 들어섰다. 여기서 100미터를 못 가서 우측으로 돌면 언덕바지에 몽양 여운형의 집터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길 건너 안동칼국수 건물 자리가 몽양의 집터였다고 한다.


몽양의 집과 건준 본부는 12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200미터 거리에 휘문중학교, 그 건너 골목에 경기여중이 자리하고 있었다. 몽양의 집과 인접해 있던 이 공간은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건국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이다.

 


김구와 이승만 등이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면 몽양은 국내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 계동 자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국내파이면서 국제 정세를 명철하게 읽어내고, 1944년부터 건국동맹과 그 산하에 농민동맹을 두고 해방 이후의 건국운동에 만전을 기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6일에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건국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몽양의 건국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8월 18일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맡겼던 치안권을 회수하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몽양은 9월 6일에 경기고등여학교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미군정이 국내로 들어오기 전에 국가 수립을 선포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9월 8일 국내에 진주하자마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무산시키고 10월 10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해방 당일부터 북촌을 중심으로 전광석화처럼 전개된 국내파 주도의 건국운동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정국의 이념 갈등과 친일파들의 미군정과의 결탁 과정에서 50일 정도의 짧은 기간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몽양이 주도한 건국운동이 성공했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확연히 달라졌을 것임을 확신한다.


2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